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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색채, 낙서같은 도형…이태량의 비밀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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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더,오래] 박보미의 아트 프리즘(5)

역삼동의 카페. 강렬한 색채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 박보미]

역삼동의 카페. 강렬한 색채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 박보미]

역삼동의 어느 카페. 어둑어둑하게 조명을 낮춘 공간 안에 강렬한 색채의 작품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빛나고 있다.

뜻을 알 수 없는 문자, 숫자와 도형이 흩어져있다. ‘검은 피카소’로 불리는 미국의 낙서화가 장 미셸 바스키아의 그림들이 연상되기도 한다. 작품은 추상성을 띠긴 하지만 자세히 보면 형상이 있어서 어떤 의미들을 품고 있는 것 같다.

습관처럼 작품을 이해해보려는 희망을 품고 작품 속 이미지들을 찬찬히 뜯어본다. 그림 속에는 일기같은 문장이 쓰여있어서 본능적으로 그쪽으로 눈길이 간다. 작품마다 한글이나 영어로 ‘명제형식(命題形式)’이라는 단어가 서명처럼 적혀있다.

명제형식_Propositional Form_mixed media on paper_50x70cm_2019. [그림 이태량]

명제형식_Propositional Form_mixed media on paper_50x70cm_2019. [그림 이태량]

난 토끼굴로 굴러 떨어진 앨리스가 된 기분으로 수수께끼를 풀어야 할 것 같은 충동을 느낀다. 우선 명제형식이란 영국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저서 ‘논리철학논고’에서 유래한 단어다. 내용의 참·거짓을 명확하게 판별할 수 있는 문장을 명제라고 하는데, 그런 명제의 유형(form)을 명제형식이라고 한다. 보통 철학에선 논증의 타당성을 검증하기 위해서 명제형식을 따져 살펴본다.

비트겐슈타인은 명제형식을 검토하면서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인 언어가 한계가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사람은 언어라는 것으로 생각하고, 세상을 바라본다. 그래서 언어가 일종의 창문 역할이라면, 창문의 모양이 세상을 정확하게 담아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대상을 정확하게 대입하지 못하는 도구라면 논증을 한다 해도 진실에 이르기 어렵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결론을 냈다. 여기서 말할 수 없는 것이란 세상의 문자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가치들, 감각들, 현상들 모두가 될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서툰 언어로 말하는 것보다 중요하고 큰 것들은 말하지 못하는 나머지의 세계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태량 작가는 과연 비트겐슈타인처럼 언어의 한계를 지적하려고 그의 작품 모두에 서명처럼 ‘명제형식’이라고 적어둔 것일까. 작가에게 물어본 적이 없어 사실 명확히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많은 화가가 그렇듯 어쩌면 이태량 작가는 그다지 대화에 소질이 있는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향해 내뱉어야만 하는 많은 감정과 생각의 응어리를 이같이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화가란 본디 자기애가 강한 나르시스트다. 그 중 자기 검열과 비판의식이 강한 사람조차도 그런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하긴 그래야만 세상에 하나뿐인 자신의 작품을 만들 수 있으니까.

그래서 아티스트란 내면에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표현 욕구를 어떻게든 해소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 말마따나 문자 언어가 도저히 자신의 생각을 충분히 드러내주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조형언어를 통해 표현해야 한다.

명제형식_Propositional Form_ mixed media_91x116.7cm_2017. [그림 이태량]

명제형식_Propositional Form_ mixed media_91x116.7cm_2017. [그림 이태량]

나를 둘러싼 이 세계가 존재하는 이유나 원리 같은 것은 인간이 아무리 애써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3차원 세계에서 땅바닥 위주로 볼 수밖에 없는 개미가 그렇듯 말이다. 하지만 어쩌면 매우 발달한 육감, 예민한 통찰력을 가진 자라면 우연히 마주친 사물의 본질을 섬광처럼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작가의 2017년 작품을 보며 상상해본다.

어느 날 작가는 버려진 공장 터를 걸으며 낡아빠진 함석 문짝을 발견한다. 오랫동안 비에 맞아 거무튀튀한 갈색으로 얼룩진 그 고물조각은 바람에 닳고 무관심에 방치된 잡초들과 함께 버려져있다. 시간과 바람, 물이 우연히 만들어 낸 표면의 실금과 벗겨지고 빛바랜 페인트자국은 추상미술작품처럼 아름답고 심오하다.

그는 한참을 바라보다 이 우연히 만난 세상의 일부에 자신의 DNA를 나누어 양자로 삼기로 한다. 잘은 모르지만 이 낡은 문짝이 무언가 세상에 대해 중요한 일면을 암시한다는 끌림을 느낀다. 논증 할 도리는 없지만 세상의 표피를 꿰뚫는 예술가의 통찰력이 그를 사로잡았다고나 할까.

그는 문짝을 뜯어내어 작업실로 가져온다. 검은 물감으로 아래쪽 절반을 칠하고, 위쪽엔 녹슨 무늬가 노출된 채로 둔다. 일부분에 내키는 대로 오렌지색 물감으로 칠한다. 딱히 어떤 형태를 그리려고 하진 않는다. 오히려 무의식적으로 구체적 형태를 갖추려는 것을 애써 경계한다. 어떤 때는 특정하게 형태를 그리려고 할수록 대상의 본질에서 멀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명제형식_Propositional Form_mixed media on canvas_60.6x72.7cm_2019. [그림 이태량]

명제형식_Propositional Form_mixed media on canvas_60.6x72.7cm_2019. [그림 이태량]

 명제형식_Propositional Form_mixed media on canvas_130.3x193.9cm_2019. [그림 이태량]

명제형식_Propositional Form_mixed media on canvas_130.3x193.9cm_2019. [그림 이태량]

그의 작품 속에서 결코 털어놓을 수 없었던 마음 속 깊은 이야기가 드러난다.

깊이 소외된 밤, 작가가 그의 마음을 사나운 야생동물을 대하듯 하나씩 풀어놓는 장면이 떠오른다. 열정과 욕망, 슬픔, 응어리, 죄책감, 기쁨, 환희와 눈물, 번뇌와 후회, 결심 그리고 세상의 진실을 엿본 그 틈새를. 그것은 결코 명제나 말로 표현할 길이 없는 기록이다.

그리하여 새벽 해가 방을 비출 때, 완성된 문장은 하나도 없지만 지우고 다시 쓰고 버리고 새로 쓴 종이가 어지럽게 쌓인 풍경. 그것이 바로 그 자신의 본질과 가장 가까운 내면이라고 느낄지 모른다. 그는 솟아나는 언어를 쓰고 버리고 말하고 반박하며 끝내 ‘명제형식’이라는 단어를 적는다.

물론 이 작품을 굳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과 연관 짓지 않아도 좋다. 당연히 이태량 작가 본인도 자신의 작품의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림 안에서 문자들은 그냥 물감처럼 그림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일 수 있다. 글씨나 문장이나 기호적 요소들은 멀리서 볼 때, 가까이서 시선을 옮기며 볼 때, 배고플 때 화날 때. 즐거울 때 멍할 때, 상황에 따라 눈에 띄는 부분이 달라지는 다층적 레이어의 기능을 하기도 한다.

매력적인 혼돈의 퀴즈 앞에서 모든 질문을 접어두어도 작품은 충분히 감상할 가치가 있다.  어차피 출구가 없는 미로의 입구를 찾으려 고민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저 재즈를 틀어놓고 가사 없는 멜로디를 배경삼아 그가 힘차게 풀어낸 붓자국을 따라가 보자. 우리를 현혹하는 문자들이 그냥 얼룩덜룩한 무늬로 보일 때까지. 마음을 놓고 즐기면 된다. 비트겐슈타인의 그림 ‘오리토끼’처럼 어차피 우리의 시각은 보이는 대로 보이지 않으니까.

작품 만날 수 있는 곳
서울시 강남구 봉은사로 50길 20, 모카런던 <이태량, 모카런던 초대전>

전시기간
2019년 7월 10일 ~ 2019년 10월 6일 (일요일 휴무)

박보미 아트 칼럼니스트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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