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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 “지하공작자 출신 리커농, 미국과 담판에 적격”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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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1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92>

정전담판 시절 북한주재 중국 대사관에는 전 유엔 특파대사 우슈취안(앞줄 왼쪽 다섯째. 당시 외교부 부부장) 등 대체인력들이 상주했다. 1951년 11월, 평양교외 중국대사관 앞. [사진 김명호]

정전담판 시절 북한주재 중국 대사관에는 전 유엔 특파대사 우슈취안(앞줄 왼쪽 다섯째. 당시 외교부 부부장) 등 대체인력들이 상주했다. 1951년 11월, 평양교외 중국대사관 앞. [사진 김명호]

1962년 2월 9일 오후, 중국 외교부 상무부부장 겸 군사위원회 정보부장 리커농(李克農·이극농)이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났다. 보고를 받은 대만의 국민정부 정치부 주임 장징궈(蔣經國·장경국)는 외출을 서둘렀다. 연금 중인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을 찾아갔다. “몇 시간 전 리커농이 세상을 떠났다.” 장쉐량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상대 혼란시킬 줄 아는 정보통” #개성 정전 협상 총지휘자로 낙점 #마오, 리커농 불러 “말 적게 하고 #세계 최강 미국 궁지에 몰지 말라” #서태후가 애용하던 객차 이용 #전권위임 서명 주저 없이 대필도

장징궈가 떠나자 왕년의 청년 원수(元帥)는 만감이 교차했다. 1936년 시안(西安)의 겨울밤을 생각하며 통음했다. 만류하는 부인의 손길도 뿌리쳤다. “26년 전 시안을 떠나지 말라는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와 리커농의 권고를 한 귀로 흘렸다. 그날 리커농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이공(李公)은 장군도 아니고 군 지휘관도 아니지만, 문무를 겸비했다. 재기와 민첩, 과감함을 갖춘 인재였다. 한창나이에 세상 뒤로하니 애통하고 애석하다”며 붓을 들었다. 밤하늘 바라보며 일필휘지했다. “너 있는 곳 바라보니 처참하고 애석할 뿐, 그날 생각하니 후회가 물밀듯, 너와 손잡고 왜구에 대항했으면, 후세에 빛난 이름 남겼을 것을.”

4년 후, 문혁이 발발했다. 홍위병 대표가 저우언라이에게 엉뚱한 소리를 했다. “리커농은 과거가 불분명하다. 공도 없는 사람이 상장(上將) 계급을 받았다. 역사 문제를 파헤칠 필요가 있다.” 저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리커농이 없었더라면 지금 나는 너희들 앞에 있을 수 없다.” 마오쩌둥도 홍위병 대표들과 만난 자리에서 리커농을 찬양했다. “당에 불멸의 공을 세웠다. 그가 없었으면 상하이의 당 중앙과 수많은 간부가 살아남을 수 없었다. 저우언라이도 일찍 염라대왕 앞에 갈 뻔했다. 2년간 개성과 판문점에서 열린 항미원조 정전 담판도 지휘한다. 청년들은 잘 모른다. 너희들이 일러줘라.” 틀린 말이 아니었다.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화약 냄새가 진동했던 시절, 양측의 정보전도 피비린내를 풍겼다. 리커농은 정보전의 승리자였다.

1950년 6월 25일, 리커농은 신병 치료차 모스크바에 체류 중이었다. 한반도 전쟁 소식 듣자 숙소 밖을 나오지 않았다. 신문이란 신문 다 모아놓고 라디오 곁을 떠나지 않았다. 수행원으로 따라간 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모안영)에게 방송과 언론에 보도된 한반도 전황을 시간별로 보고받았다. 연합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스탈린 면담을 요청했다. 소련 비밀경찰 총책 베리아의 안내로 스탈린과 만난 후 귀국을 서둘렀다.

귀국 직전 마오쩌둥과 중공 중앙에 보고서를 보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조선 내전 폭발은 미국의 새로운 동방침략에 계기를 제공했다. 북조선 인민 정권의 존망뿐 아니라, 막 탄생한 신중국의 안위와도 관계가 있다.”

“영어 못하지만, 유창한 것보다 낫다”

정전 담판장 주변을 산책하는 리커농(왼쪽). 오른쪽은 미군 포로 관리를 전담한 정치부 주임 두핑(杜平). 1952년 4월, 판문점. [사진 김명호]

정전 담판장 주변을 산책하는 리커농(왼쪽). 오른쪽은 미군 포로 관리를 전담한 정치부 주임 두핑(杜平). 1952년 4월, 판문점. [사진 김명호]

전선에 총성이 난무할 때 다른 한쪽에서 정전을 논의하는 것이 전쟁이다. 1951년 6월 말에서 7월 초까지 중국과 북한은 미국과 수차례 전문을 주고받았다. 7월 10일 개성에서 만나기로 합의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정전 협상 지휘를 누구에게 맡길지 고심했다. 유엔에 파견했던 우슈취안(吳修權·오수권)과리커농을 놓고 저울질했다. 저우언라이가 의견을 냈다. “우슈취안은 국제무대에 얼굴이 알려졌다. 리커농은 지하공작자 출신이다. 상대를 혼란시킬 줄 안다. 영어도 못한다. 유창한 것보다 낫다. 미국과의 협상에 적격이다.”

7월 1일, 마오쩌둥이 리커농을 불렀다. “저우언라이와 의논한 결과 정전 담판 책임자로 너를 낙점했다. 개성에 눌러앉아 협상을 총지휘해라. 차오관화(喬冠華·교관화)와 함께 대표단을 조직해라. 외교부와 군에서 적합한 사람을 추려라.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 학위 받은 푸산(浦山·포산)을 포함해라, 담판 발언 원고는 신화통신 기자 딩밍(丁明·정명)에게 맡겨라. 선젠투(沈建圖·심건도)는 선전 전문가다. 대동해라. 인원은 너무 많아도 안 된다. 3백명 미만이 적당하다. 분산해서 이동해라. 미군 포로 심문관 중에 우수한 청년들이 많다. 잘 활용해라. 회담 대표는 조선인민군 대표가 맡아야 한다. 그래야 훗날 조선이 미국과 직접 담판하기에 용이하다. 우리 측 대표는 덩화(鄧華·등화)와 지에팡(解方·해방)이 나선다. 미군은 세계 최강이다. 대표가 오만할 수 있다. 말 적게 하고 상대를 궁지에 몰지 마라. 당장은 속 시원해도 이로울 게 없다. 전쟁은 변수가 많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 전투행위 중지하고 하는 담판이 아니다.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와 문무를 분담해라.”

리커농은 해소병이 심했다. 심장도 정상이 아니었다. 진통제 복용해야 수면이 가능했다. 마오쩌둥에게 사정을 털어놨다. “병이 심합니다. 판단을 그르칠까 걱정입니다. 제가 아니라도 무방하면 우슈취안이나 시펑페이(姬鵬飛·희붕비)가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훗날 외교부 부부장과 부장을 역임한 중국의 대표적인 외교관들이었다. 마오는 주저했지만 잠시였다. 리커농의 어깨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네가 가라.” 리커농은 토를 달지 않았다. 즉시 출발 준비를 하겠다며 자리를 떴다. 마오는 김일성에게 전문을 보냈다. “중공 중앙과 중국 정부는 조·중 연합대표단 총지휘와 총책임자로 리커농을 파견했다.”

7월 5일 새벽, 리커농 일행을 태운 열차가 베이징에서 출발했다. 청나라 말기 서태후가 애용하던 객차에 오른 리커농이 차오관화에게 농담을 건넸다. “우리가 감히 올라탈 줄 서태후가 상상이나 했을까!” 폭소가 터졌다. 그날 밤, 국경도시 단둥(丹東)에 도착했다. 평양에서 달려온 중국대사관 정무참사 차이쥔우(柴軍武·시군무)의 안내로 국경을 넘었다.

“우리가 올라탈 줄 서태후가 상상했을까”

7월 6일 오전, 김일성은 평양 동북 15㎞ 지점에서 리커농을 만났다. 북한군과 중국지원군 연합대표단을 조직했다. 마오쩌둥의 의견이 그대로 반영됐다. 수석대표는 중국 측에서 덩화와 지에팡, 북한 측에서 이상조와 장평산이 맡기로 합의했다. 연락관도 필요했다. 마오의 전문대로 차이쥔우와 북한군 동원국장 김창만을 연락관에 배정했다. 유엔군 사령관 리치웨이가 연락관 계급을 대령 이하 3명으로 하는 조건을 달자 수용했다. 소장 김창만은 대교 계급장 달고 장춘산으로 개명했다. 차이쥔우도 차이청원(柴成文·시성문)으로 이름을 바꿨다. 나머지 한 명은 북한 측에서 충당했다.

7월 9일, 회담 전날 저녁,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회담 첫날 국제관례에 따라 상대방에게 제시할 전권위임증서를 깜빡했다. 북한 측은 평양에 사람을 파견해 김일성의 서명을 받아왔다. 리커농은 무슨 일이건 대책이 있는 사람이었다. 펑더화이 석 자를 대신 써버렸다. 리커농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7월 10일, 신중국 선포 후 미국과의 첫 번째 담판이 시작됐다. 2년을 끌 줄은 아무도 예상 못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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