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존 상태서 거침없는 스윙…‘다 해먹는’ 고진영의 비밀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651호 24면

[성호준의 주말 골프인사이드] LPGA 4승, 114홀 노보기 원동력

지난주 LPGA 투어 캐나다 퍼시픽 여자오픈에서 우승해 올해에만 4승을 올린 고진영. [AP=연합뉴스]

지난주 LPGA 투어 캐나다 퍼시픽 여자오픈에서 우승해 올해에만 4승을 올린 고진영. [AP=연합뉴스]

요즘 고진영(24)을 보면 전성기 타이거 우즈 같은 킬러의 눈빛이 보인다. 우승 경쟁을 할 때 사냥감을 향해 다가가는 맹수처럼 날카롭다. 조용히 다가가 숨통을 끊어 놓겠다는 의지가 번뜩이는 듯하다.

최저타·상금·그린 적중률 등 1위 #5년 전 골프팬에 약속한 말 실천 #“지고는 못 사는 성격” 자신감 넘쳐 #낯선 곳서도 위축 안 되고 더 잘해 #10년간 단 하루도 안 빠지고 연습 #에비앙선 우즈처럼 껌 씹고 경기

고진영은 지난 26일(한국시각) 끝난 LPGA 투어 CP 오픈에서 시즌 4승째를 기록했다. 1라운드 공동 2위로 출발해 2라운드 단독 2위, 3라운드 공동 선두로 올라서더니 최종라운드에서 5타 차 압승을 거뒀다. 고진영은 7월 말 에비앙 챔피언십에서도 역전 우승했다. 상대는 한국에서 자신보다 뛰어난 활약을 한 김효주와 박성현이었지만 고진영의 눈빛에는 ‘내가 이긴다’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브리티시 여자오픈 최종일 고진영은 4타 앞선 시부노 히나코를 잡지 못했다. 경기 후 고진영은 “운이 없었다”고 했다. 우승컵은 내 거라고 믿은 것이다. 골프팬들 사이에선 고진영의 ‘다 해먹겠다’ 사건이 회자된다. 김효주·장하나·김세영 등이 LPGA에 진출한 2015년 KLPGA 미디어데이에서 고진영은 “(잘하는 선수들이 떠났으니) 올 시즌은 다 해먹고 싶다”고 했다. 당시 2년 차에 불과한 고진영이 건방지다는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고진영은 KLPGA 투어에서 다 해먹지 못했다. 그러나 올해 메이저리그인 LPGA 투어에서 진짜 다 해먹고 있다. 최저타, 상금, 올해의 선수상, 그린적중률 등 주요 타이틀에서 압도적인 1위다. 고진영은 30일 포틀랜드 클래식 1라운드 8번홀까지 114홀 연속 노보기 기록도 세웠다.

겨울마다 검증된 스윙 교정

고진영

고진영

한국에서도 2인자에 머물렀던 고진영이 LPGA 투어에서 다 해먹는 비결은 뭘까. 그를 아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특이할 정도로 어릴 때부터 자신감이 넘쳤다. 때론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자신이 최고라고 여기는 선수였다”고 말했다.

주니어 시절, 그의 동기 김효주·백규정·김민선이 고진영보다 잘했다. 그러나 고진영은 자신이 뒤진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는 KLPGA 투어 홈페이지 자기 소개란에 이렇게 썼다. “생일은 7월 7일이다. 그래서 난 항상 행운아라고 생각한다. (중략) 욕심이 많고, 지고는 못사는 성격이고, 남이 잘하는 부분을 내 것으로 꼭 만들려고 하는 성격이다. (중략)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하고 싶다. 국위선양을 하고 싶다. 최종 목적지는 LPGA이고 미국 명예의 전당이다.” “대인관계가 좋은 편”으로 글을 시작한 김효주와,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쓴 김민선, “겸손하겠습니다”라고 한 백규정과 분위기가 다르다. 그는 당당하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투어에선 “고진영의 멘탈은 역대 최고급”이라는 선수들이 있다. KLPGA 투어 데뷔전인 2014년 제주 롯데마트 여자오픈에서다. 그를 3년간 가르친 고덕호 SBS 해설위원은 “다른 신인들처럼 연습 그린에서 선배들에 눌려 기가 죽어 있을까 봐 가봤더니 고진영은 동기인 백규정, 김민선과 함께 만 원 내기를 하고 있더라”고 기억했다.

선배들이 그런 그를 곱게 보지 않았다. 인사를 깍듯하게 안 한다는 등의 이유로 선배와 트러블도 몇 차례 있었다. 고진영은 꿈쩍도 안 했다. ‘다 해먹겠다’ 사건 등과 겹쳐 고진영은 건방진 선수로 온라인에서 팬들의 댓글 펀치도 맞았다. 고진영은 “좋은 말해 주면 감사하고, 나쁜 말 나와도 흔들리지는 않는다”고 했다.

낯선 곳에서도 위축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잘한다. 고진영이 처음으로 해외 대회에 나간 2015년 브리티시 여자오픈에서 박인비에 이어 2등을 했다. LPGA 투어 회원이 되어 처음 나간 2018년 호주 오픈에서 우승했다. 최근 우승한 CP 여자오픈에선 캐나다 최고 스타인 브룩 헨더슨과 한 조에서 경기했다. 사실상 원정경기였다. 더골프채널 김용준 해설위원은 “고진영이 헨더슨 어깨에 손을 올리고 ‘이 갤러리가 다 너를 응원하는 갤러리’라고 했다. 내가 너보다 한 수 위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여자 골프 세계 1위 고진영의 기록

여자 골프 세계 1위 고진영의 기록

LPGA 시드를 딴 2017년 하나은행 챔피언십도 인상적이었다. 고진영은 챔피언 조에서 박성현-전인지와 맞대결했다. 박성현의 팬클럽 ‘남달라’와 전인지의 팬클럽 ‘플라잉 덤보’가 홀을 겹겹이 뒤덮고 플래카드를 들고 응원했다. 그러나 동요하지 않았다. 11번 홀에서 고진영은 약 60cm 거리의 버디 기회를 잡았다. 공과 홀 사이 그린 상태가 좋지 않았다. 수리를 해도 되는 피치 마크인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스파이크 자국인지 동반자에게 물었다. 동반자는 수리하면 안 된다고 했다. 고진영은 그냥 퍼트해야 했다. 공은 홀을 스치고 지나갔다.

기분이 나쁘고 흔들릴 만했지만 고진영은 역시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다음 홀에서 버디를 잡고 보란 듯 우승을 차지했다. 고진영은 겨울마다 스윙 교정을 했다. 고덕호 위원은 “KLPGA에서 3~4승씩을 한 검증된 스윙을 고치기 쉽지 않다. 겨울훈련으로 스윙이 완성되지 않는다. 조바심이 날 텐데 거침이 없었다. 고진영은 불안한 스윙으로도 두려워하지 않고 잘 칠 수 있는 자신감이 있다”고 말했다. 고진영의 할아버지, 큰아버지, 아버지가 모두 권투를 했다. 고진영은 “지는 것을 싫어한다. 복싱을 하는 가족에게서 배운 것 같다”고 말했다.

돌아보면 고진영이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진 건 아니다. 처음엔 그랬는지 모르지만 이를 근거 있게 만들었다. 그의 별명은 ‘고선배’다. 고진영이 중학생 때 해외 전지훈련 가서 얻은 별명이다.

▶선배들=“코치님, 날씨 더우니까 오전에는 훈련하고 오후엔 비치에 놀러 가요”

▶고진영=“언니들, 전지훈련 와서 이러면 안 돼요”

▶선배들=“후배가 건방지게 훈계하네, 네가 선배 해라”

고덕호 위원은 “그 나이엔 부모가 시켜 억지로 훈련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진영이는 전혀 그렇지 않아 놀랐다”고 말했다.

고진영이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전지훈련에 가자마자 러프에서 샷을 하다 손목 인대가 늘어나 한 달을 쉬어야 했다. 웬만하면 그냥 한국으로 돌아갔을 텐데 고진영은 “하나님이 퍼트 잘하라고 기회를 주신 것 같다”고 했다. 다른 선수들 라운드 나갈 때 “잘 갔다 오라”고 인사하고 퍼팅 그린에 살았다. 고진영은 전지훈련에서 돌아와 퍼트의 달인이 됐다.

아버지 고성태씨는 “운동을 시작한 후 10년간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연습을 했다. 10~15분 줄넘기를 했고 로드워크를 했다. 진영이가 아버지 닮아서 종아리 굵다고 하는데 다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복싱 선수 출신에게 배웠으니 줄넘기와 로드웍을 제대로 했을 것이다. 고진영은 기본 체력을 확실히 다졌고 LPGA 투어에서 경쟁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든 후 미국에 진출했다.

머리가 좋다. 현명하게 판단한다. 올해 골프 규칙이 바뀌어 깃대를 꽂고 퍼트할 수 있게 됐다. 그럴 경우 홀인 확률이 높아진다는 주장이 있다. 이를 받아들인 선수는 많지 않다. 기존의 관성을 버리기 어려우며 창피하다고 여기는 선수도 많다. 그러나 고진영은 효과가 있다고 판단하고 실행했다. 첫 메이저인 ANA 인스퍼레이션에서 깃대를 꽂고 퍼트해 우승을 차지했다.

손목 인대 늘어나도 퍼트 연습

에비앙 챔피언십에서는 껌을 씹었다. 올해 마스터스에서 타이거 우즈가 껌을 씹으면서 화제가 된 터였다. 심리학자들은 긴장감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한국 정서론 건방지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고진영은 개의치 않고 껌을 씹었고, 타이거 우즈처럼 우승했다. 용품 후원사인 브리지스톤의 백영길 이사는 “냉정하게 따진다. 변화를 위한 변화는 하지 않는데 합리적이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고진영은 한국에서도 LPGA에서 오래 일한 호주인 딘 허든을 캐디로 썼다. 영어도 배웠고 그를 통해 코스 공략에 대한 눈도 떴다. 허든은 한국에 집도 샀다. 그러나 고진영은 더는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자 캐디를 바꿨다. 더 큰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때론 냉정할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 고진영은 타고 난 킬러다.

박원 JTBC골프 해설위원은 “고진영은 지금 완전히 존(zone·고도의 집중상태, 무아지경의 상태)에 들어가 있다. 미국이라는 새로운 분위기에서 동기부여를 받고 새로운 환경에 대한 도전감이 충만해 보인다”고 말했다.

성호준 기자·골프팀장 sung.hoju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