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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동호의 시시각각

조국 ‘프로의 솜씨’ 보여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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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김동호 논설위원

김동호 논설위원

“엄마 아빠가 미안하다.” 요즘 두셋만 모이면 터져 나오는 자조와 한탄이다. 소셜미디어에도 울분이 넘친다. “나를 돌아보니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내가 해준 게 없다는 걸 알았다”면서다. 돈 있으면 다 되는 것 같지만 안 되는 게 있다. 원하는 대학 입학이다. 치열한 경쟁 때문이다. 내가 열심히 해도 모두 열심히 하니 오히려 뒤로 밀려나지 않으면 다행이다. 예외가 있었다. 조국 법무장관 후보자의 딸 얘기다. 결국 ‘할아버지의 재력, 부모의 정보력’에서 아이의 인생과 미래가 결정된다는 게 속설만은 아니었다. 조국은 그걸 제대로 보여줬다.

귀족노조 울고 갈 진보귀족 특권 #계층이동 사다리 교육 어지럽혀 #위선적 부 대물림 용서 받지 못해

조국의 ‘자녀 진학 기술’이 전 국민의 마음을 후벼 파고 있다. 정의에 민감한 2030세대는 배신감에 분노하고, 자녀를 키우는 3040은 무력감에 공분한다. 조국과 같은 586세대는 귀족노조 뺨치는 패션좌파의 특권에 맥이 빠진다. 가히 국민이 집단 우울증에 빠졌다고 할 만하다. 여기서 놓쳐선 안 될 일은 따로 있다. ‘조국 사태’를 통해 위험수위를 드러낸 ‘부(富)와 교육’의 변칙적 대물림 문제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에 살지만, 뉴욕 뺨치는 서울 집값과 무거운 사교육비는 누구나 감당하기 버겁다. 부의 양극화도 심각하다. 상·하위 소득계층 격차는 6분기 연속 최악이다. 그래도 그건 오롯이 ‘당신의 무능과 게으름’ 탓이라고 여기는 게 일반적 시각이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더 열심히 노력하고 더 많이 일하라고 해왔다.

하지만 조국은 이 상식을 무너뜨렸다. 전 재산 56억원보다 많은 74억원 투자를 약정한 사모펀드는 조국 부인이 9억5000만원, 두 자녀가 5000만원씩 투자한 ‘가족 전용 펀드’로 드러났다. 펀드 정관을 보면 냄새가 난다. 출자금을 제때 납입하지 않으면 납입한 출자금의 최대 절반까지 페널티로 물도록 하고 이는 다른 투자자의 몫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세무사들은 이런 방식을 활용하면 세금 한 푼 안 내고 부모의 자금을 자녀들에게 증여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조국의 부모는 각각 ‘21원’ ‘452만원’이 재산이라고 했다. 채무 변제를 회피하려고 이렇게 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조국의 표현을 빌리자면 ‘프로의 솜씨’다. 그는 2016년 국민의당 리베이트 의혹 사건을 두고 “과거 정치권 안에서 ‘관행’으로 묵인되었던 것이 더는 용인되지 않음을 확인한다. 한국 사회의 높아진 눈높이에 신속히 맞추지 못하는 정당과 정치인은 한 번에 훅 간다”면서 “이 사건은 ‘프로의 솜씨’이니 내부 숙정(肅正)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조국이 꾸짖었던 이 사건은 지난달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내로남불이자 조적조(조국의 적은 조국)가 따로 없다. 정작 ‘프로의 솜씨’를 보여주고 숙정이 필요한 사람은 바로 조국 자신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 솜씨는 딸의 ‘금수저 입학’에서 절정을 이룬다. 고교·대학·대학원을 필기시험 한 번 없이 통과하는 ‘신(神)의 재주’였다. 외고 고교생이 2주 인턴으로 의학논문 주인 몫인 제1저자를 차지했다. 더구나 대학교수도 로망인 미국 SCI(과학기술논문 인용색인)급 논문이었다. 이것이 대학·의학전문대학원 진학의 디딤돌이 됐다는 합리적 의심은 차고도 넘친다.

요컨대 국민적 공분은 가난 탈출과 경제적 독립, 나아가 계층이동의 유일한 통로인 교육이라는 공공의 우물을 더럽혔다는 데서 나오고 있다. 교육을 많이 받을수록 경제력이 향상된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다. 시험에 떨어져도 승복하고 물려받은 재산이 없어도 더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우리 사회는 조화롭게 굴러간다. 그런데 한국의 청년들은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희망을 앗아간 거다. 용은 됐고 그냥 가재·붕어·개구리로 살아가자는 체념에 빠질까 걱정된다. 계층이동의 사다리를 망가뜨린 ‘프로의 솜씨’가 우리 사회에 미친 해악이다. 청년의 좌절이 더 깊어지지 않도록 오염된 우물을 정화해야 한다.

김동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