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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거물의 30년 성추문 ‘와인스타인’…영화로 #미투 만난다

중앙일보

입력

1998년 '셰익스피어 인 러브' 시사회에서 다정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하비 와인스타인(오른쪽)과 귀네스 팰트로. 와인스타인 스캔들이 불거진 후 팰트로도 성추행 피해 사실을 폭로했다. [사진 스톰픽쳐스코리아]

1998년 '셰익스피어 인 러브' 시사회에서 다정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하비 와인스타인(오른쪽)과 귀네스 팰트로. 와인스타인 스캔들이 불거진 후 팰트로도 성추행 피해 사실을 폭로했다. [사진 스톰픽쳐스코리아]

지난 2017년 10월 5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 1면에 실린 장문의 기사를 보고 할리우드 여배우 에리카 로즌바움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기사엔 30년간 영화계를 쥐락펴락 해온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으로부터 성폭력‧성추행 피해를 당한 여성들 8명의 인터뷰가 소개돼 있었다. “업무 이야기를 하자며 호텔방으로 불렀다” “친근하게 스킨십을 시도하다가 마사지를 요구했다” 등의 진술은 그가 수년전 겪은 상황과 거의 같았다. “그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방을 빨리 빠져나갈 생각을 했다”는 여배우 애슐리 주드의 고백도 있었다.

2017년 할리우드 강타했던 미투 다룬 다큐 #여배우들 육성 통해 추악한 문화권력 밝혀 #29일 개막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초청작

여배우만이 아니었다. 2014년 임시직으로 고용됐던 에밀리 네스터도 와인스타인으로부터 “성적 요구에 응하면 경력을 키워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고 폭로했다. 신문은 그가 이듬해에도 벌거벗은 채 여직원에게 마사지해 달라고 졸랐다는 사실도 전했다. NYT에 따르면 1990년 이후 그가 성폭력과 관련, 직원·배우·모델 등 피해 여성과 비밀 합의한 것만 최소 8건이었다. 로즌바움 사례를 포함해 더 추악한 ‘진실’이 수면 아래 잠복해 있을 게 분명했다.

줄 잇는 "나도 당했다"…한국 포함 전세계 강타

실제로 NYT 보도 이후 들불 같은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캠페인이 소셜미디어를 강타했다. 그 중에는 앤젤리나 졸리, 귀네스 팰트로 같은 세계 톱 여배우들이 포함됐다. 하빈스타인을 넘어 각계 권력자를 겨냥한 광범위한 폭로가 엔터테인먼트·언론‧기업‧정계로 퍼졌다. 할리우드 스타 케빈 스페이시, 유명 앵커였던 찰리 로즈와 맷 라워 등이 줄줄이 사과문을 내고 일부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미투는 한국에도 상륙해 고은·이윤택·김기덕·조재현 등 문화계 인사의 권력을 박탈했고, 가장 강력한 차기 대권주자였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를 권좌에서 내몰았다.

미투 스캔들로 추락한 할리우드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오른쪽)이 1980년대 말 동생 밥 와인스타인과 함께 '미라맥스'를 설립하고 활동할 당시 모습. [사진 스톰픽쳐스코리아]

미투 스캔들로 추락한 할리우드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오른쪽)이 1980년대 말 동생 밥 와인스타인과 함께 '미라맥스'를 설립하고 활동할 당시 모습. [사진 스톰픽쳐스코리아]

이 모든 폭풍의 시작인 와인스타인이라는 인물은 어떤 사람일까. 이 질문에 답하는 다큐멘터리가 오는 29일 개막하는 제2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집행위원장 박광수, 이하 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된다(8월31일, 9월 4일). 우르술라 맥팔레인 감독의 ‘와인스타인’(원제 Untouchable)이다. 영국 BBC가 제작한 이 다큐멘터리는 올 초 제35회 선댄스영화제에서 공개됐고 9월 26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영화에선 로즌바움을 비롯해 로잔나 아퀘트, 파즈 드 라 휴에타 등 여배우들이 카메라를 앞에 두고 직접 성폭력 피해를 증언한다. 대체로 할리우드 입문 초기에 와인스타인을 맞닥뜨렸던 이들은 그를 통해야만 경력이 쌓이는 ‘권력의 마수’를 실감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가 완력을 동반해 성적 요구를 했을 때 심적 갈등을 겪었음을 솔직히 드러낸다. 완강히 거부한 이는 이후 경력의 손해를 입었고, 마지못해 굴복한 이는 트라우마로 인해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NYT와 뉴요커의 동시 폭로로 빛을 보기까지 와인스타인 스캔들은 할리우드에서 공공연한 루머로 돌았다. ‘와인스타인이 뭘 어떻게 했다’가 아니라 ‘여배우들이 그와 자고 배역을 따냈다’는 식의 조롱과 힐난이었다. 이런 딱지가 두려워 피해자들은 오랫동안 침묵했고, 침묵이 다시 피해자를 만들어냈다. 심지어 그를 둘러싼 스캔들 압력이 거세지자 와인스타인은 페미니즘 운동 진영에 거액의 기부금을 보태면서 이미지 세탁을 시도하기도 했다.

할리우드의 추악한 성추문 중심에 섰던 권력자 

1952년생인 와인스타인은 79년 동생 밥과 함께 ‘미라맥스’를 설립하면서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80년대 말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나의 왼발‘ ‘시네마 천국’ 등을 제작해 흥행과 작품성을 동시에 인정받으면서 거물로 우뚝 섰다. 92년 회사가 디즈니에 인수된 뒤에도 자율성을 보장받으면서 ‘펄프 픽션’(1994), ‘잉글리시 페이션트’(1996), ‘굿 윌 헌팅’(1997), ‘셰익스피어 인 러브’(1998) 등을 성공시켰다. 탁월한 수완으로 독립 영화를 주류 영화계로 편입시키고 수익산업으로 키우면서 할리우드 권력으로 자리매김했다.

미투 스캔들이 불거진 후 와인스타인은 한때 사과하는 듯했다가 본격 소송에 돌입하자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를 한 적이 없다”고 반격에 나선 상황이다. 특히 “성폭행이 있었다고 피해자들이 주장한 날에도 친근하게 연락이 오갔다”며 e메일을 근거로 제시하기도 했다. 스캔들 직후 그는 자신이 공동 창립한 제작사 와인스타인 컴퍼니로부터 해고당했고, 이후 회사는 파산 절차를 거쳐 현재는 랜턴 캐피털이라는 투자사에 넘어간 상태다.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여성영화제는 다음달 5일까지 총 8일간 열린다. 올해는 31개국에서 출품된 119편의 영화를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상영한다. 오는 29일 서울 성산동 문화비축기지 T0 문화마당에서 열리는 개막식은 영화제 집행위원이기도 한 변영주 영화감독과 5대 페미니스타로 위촉된 배우 김민정의 사회로 진행된다.

29일 개막하는 제2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개막작 ‘신은 존재한다, 그녀의 이름은 페트루냐’(테오나 스트루가르 미테브스카 감독)의 한 장면. [사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29일 개막하는 제2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개막작 ‘신은 존재한다, 그녀의 이름은 페트루냐’(테오나 스트루가르 미테브스카 감독)의 한 장면. [사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 ‘신은 존재한다, 그녀의 이름은 페트루냐’(테오나 스트루가르 미테브스카 감독)는 2014년 실제 벌어진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동유럽의 그리스 정교 세계에서 행해지는 구세주 공현 축일 이벤트를 통해 심각한 곤경에 빠진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밖에 더 많은 작품 소개를 영화제 홈페이지(www.siwff.or.kr)에서 만날 수 있고 온라인 예매도 가능하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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