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북 아사 모자'로 알려진 한성옥씨의 여섯살 아들 김동진 군이 방문에 남긴 마지막 그림. 장세정 기자

'탈북 아사 모자'인 엄마 한성옥(42)씨와 아들 김동진(6)군의 영정 사진. 서울 광화문 분향소에 공개됐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아파트에서 새터민(탈북자) 엄마 한성옥(42)씨와 뇌전증(간질)을 앓고 있던 아들 김동진(6)군이 지난 5월 말 세상을 떠났다. 서울 관악구 봉천동(은천동 주민센터 관할) 13평 임대 아파트에는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수도요금 장기 연체에 따른 단수 조치로 식수도 한 방울 나오지 않았고 냉장고에는 유일하게 고춧가루만 있었다.
한씨는 생전에 보증금 547만원에 월세 9만원인 임대 아파트의 관리비를 수개월 연체했다. 지난 7월 31일 수도 검침원이 관리사무소에 알리면서 모자의 시신을 발견했다. 숨진 지 두 달가량 지난 시점이었다. 현장엔 외부 침입이나 타살 흔적이 없었고 자살 흔적도 없어 "굶어 죽었다"는 말이 나왔다. 자칫 단순 변사로 덮일 뻔했던 이 사건은 지난 12일 언론 보도를 계기로 '굶어 죽은 탈북 모자 아사(餓死) 사건'으로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굶주림을 피해 사선을 넘어 탈북했는데 남한 땅에서 굶어 죽었다는 소식에 많은 국민이 충격을 받았다.

허광일(오른쪽) 비대위원장과 탈북자들이 지난 14일 설치한 광화문 분향소를 지키고 있다. 장세정 기자

한성옥씨 모자가 굶어죽었다고 알려지자 빈소에 음식물들이 가득 올려졌다.
모자의 비극을 자기 일처럼 여기고 충격을 넘어 분노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3만 3000명(입국 기준)을 넘은 동료 탈북자들이다. 탈북자 단체들은 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허광일 북한민주화위원장)를 꾸리고 지난 14일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 추모 분향소를 설치했다. 비대위는 '굶어 죽은 탈북 모자 진상 규명 및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을 위한 100만인 서명 운동'도 시작했다.
지난 24일 한성옥·김동진 모자가 살던 임대 아파트를 수소문해 찾아가 봤다. 주변에는 음식점이 즐비했고 먹을 것이 넘쳐났다. 현관 앞에는 중국요릿집과 족발·보쌈 집에서 붙여놓은 광고 전화번호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모자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도시가스 검침 기록을 보니 4월까지만 점검 흔적이 있었고 5월부터 시신이 발견된 7월까지 모두 공란이었다. 모자가 사는 집에서 주민센터와 어린이집까지 걸어가 보니 직선거리로 불과 400여m, 6분 거리였다. 한 주민은 "서로 어울려야 뭐가 힘들고 불편한지 알고 쌀이라도 도와주든지 할 텐데 전혀 그런 게 없었다"며 안타까워했다. 한씨 모자가 고립된 채 살았다는 얘기다.

한성옥-김동진 모자가 살던 임대 아파트에서 주민센터까지는 불과 400여m거리였다. 장세정 기자
동진이의 방문에 그려진 낙서 같은 그림(사진)이 자꾸 떠올라 동진이가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어한 메시지가 무엇이었을지 전문가에게 물어봤다.
"정상적인 6세 아이의 그림에 비해 인지능력 저하가 의심된다. 유아 우울장애 등 정신병리 현상이 의심된다. 전반적으로 정서표현 자체가 별로 없다. 색채 등이 너무 단순해 심리적 발달 자체가 멈춘 듯하다. 만일 병원에 온 아이가 이런 그림을 그렸다면 아동 방임이나 정서적 학대를 의심할 수 있겠다." (신의진 연세대 의대 소아정신과 교수)
"만 6세 아동이 그린 그림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내용이 빈약하고 뭔가 부족함이 엿보인다. 나이에 비해 지식수준이 낮아 발달 장애를 의심하게 된다. 극도로 단순화된 그림을 보니 결핍이 느껴진다. 옷이나 사람 모습을 보면 기아상태같이 뼈대만 앙상하게 그린 게 눈에 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
그렇다면 한성옥·김동진 모자에게는 진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지난 18일부터 25일까지 모두 다섯번 광화문의 추모 분향소를 찾아가 탈북자들을 두루 접촉했다. 함경남도 함흥이 고향인 한씨는 속을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었다고 하나원 동기가 전했다. 김용화 탈북난민인권연합 대표는 "브로커를 통해 중국 동포(조선족)에게 팔려가면서 비극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탈북 1호 여성 박사'인 이애란 자유통일문화원 대표는 "탈북 여성 대부분은 중국에서 인신매매를 통해 강제 결혼을 하고 그 과정에서 원하지 않은 아이를 출산한다. 이것이 탈북 여성이 한국 사회에서 정착하는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지만, 정부의 대책은 전무하다"고 지적했다.

'탈북자 1호 여성 박사' 이애란 자유통일문화원 대표는 "중국에서 브로커에 팔려가는 북한 여성들의 인권 문제에 대해 문재인 정부와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은 왜 침묵하느냐"고 물었다. 장세정 기자
한씨는 중국에서 아들을 낳았지만 2009년 태국을 거쳐 탈북자 자격으로 혼자 입국했다. 하나원에서 사회적응 교육을 받고 취업하면서 10개월 만에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에서 벗어났다. 그만큼 삶의 의욕이 있었다. 하지만 중국에 떨어져 살던 아들이 보고 싶어서 견디기 어려웠던 한씨는 중국에 있던 남편과 아들을 2012년 한국으로 초청했다. 한국에서 둘째 동진이를 임신한 기간에 남편의 폭행이 있었고 동진이는 뇌전증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조선소에 취업한 남편을 따라 경남 통영에서 한동안 살았는데 조선업 불황으로 일이 끊어지자 2017년 가족 모두 중국으로 이주한다.
하지만 한씨는 곧 남편과 이혼하고 큰아들을 중국에 둔 채 동진이만 데리고 지난해 9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같은 해 10월 서울 관악구 주민센터에 전입신고를 하면서 아동수당(0~5세) 10만원과 양육수당(집에서 보육할 경우) 10만원씩을 받았다. 당시 한씨의 소득인정액(소득+소득의 재산환산액)이 0원이었는데도 주민센터는 기초 수급자로 보호하지 않았다. 한씨는 같은 해 12월 17일 주민센터를 다시 찾았지만, 이때도 역시 주민센터는 한씨의 어려운 상황을 포착하지 못했다. 보건복지부가 관악구와 주민센터를 상대로 뒤늦게 조사해 밝혀낸 사실이다. '송파 세 모녀' 사건 이후 정부는 '찾아가는 복지 서비스' 제도를 만들었다고 떠들었지만, 결과적으로 또다시 구멍이 난 것이다. 담당 공무원들은 "당시 다른 업무가 바빴다"고 변명했지만, 처벌 대상 아닌가 하는 논란이 일고 있다.

한성옥씨 모자가 살던 임대 아파트 외벽에 도시가스 검침 기록이 남아 있다. 4월까지만 점검 흔적이 있고 5월부터 시신이 발견된 7월까지 모두 공란이다. 중국요리 등 음식점 홍보물도 보인다. 장세정 기자
한씨는 1월에 한국에서도 이혼 신고를 했다. 1~2월 한씨와 마지막 통화를 한 김용화 탈북난민인권연합 대표는 "두부와 돼지고기를 좀 가져가라고 했는데 아픈 동진이를 두고 나올 수 없었는지 연락이 없었다"고 전했다. 3월부터는 동진이가 6세가 되면서 아동수당 10만원이 끊겼고 이때부터 고정 수입은 보육수당 월 10만원이 전부였다. 결국 휴대전화비를 내지 못해 전화가 차단되면서 모자는 세상과 연결이 끊어졌다. 지인들은 한씨가 다시 중국으로 간 것으로 여겼다. 5월 13일 은행 통장에서 마지막으로 3858원이 인출됐고, 한씨의 통장 잔액은 0원이었다. 이후 약 보름만인 5월 말, 모자는 숨진 것으로 경찰이 추정했다. 그런데 한씨 모자의 시신이 7월 31일 발견될 때까지 경찰서 신변보호관조차 한씨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비극을 피할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탈북자들은 한씨 모자가 극심한 생활고에다 고립감과 외로움이 겹치면서 삶의 의욕을 잃었고 급기야 아무것도 먹지 못해 굶주림으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고 있다. 탈북자 봉사 단체인 '홍익인간 세상을 위한 모임' 박진혜(45) 회장은 "한성옥씨와 비슷한 경험을 했지만, 가까스로 극복했다"고 말했다. 그는 "탈북자들은 인적 네트워크가 없다 보니 주변과 쉽게 차단되고 자기만의 울타리를 친다. 방에 누워 있으면 '왜 내가 탈북해 이곳에 왔나' 하는 자괴감이 든다. 한씨는 이 고비를 못 넘은 것 같다"고 말했다.

박진혜(왼쪽) '홍익인간 세상을 위한 모임' 회장과 이나경 탈북 미혼모 장애인 자립지원협회 대표가 한성옥 모자 분향소에서 "탈북 여성들의 인권에 대해 한국 정부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박진혜 '홍익인간 세상을 위한 모임' 회장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공개 면담을 요청했다. 장세정 기자
이나경(46) 탈북 미혼모·장애인 자립 지원협회 대표는 "탈북자 중에 혼자 어렵게 아이를 키우는 미혼모가 5000명이나 된다"고 했다.또 "시한부 선고를 받은 탈북자도 700명이나 되는데 탈북 5년이 지나면 정착 지원이 끊겨 대책이 절실하다"고 호소했다. 제2, 제3의 비극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지난 23일 관악경찰서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부검 결과 '사인 불명'으로 나왔다"고 밝히자 탈북자들은 반발하고 있다. 허광일 비대위원장은 "질병도 자살도 타살도 아니었고 누가 보더라도 굶어 죽었는데 사인 불명이라고 하니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정부가 김정은 눈치 보기를 한다"며 반발했다. 최정훈 비대위원은 "정부가 일방적으로 장례를 진행하면 탈북자들의 분노가 폭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애란 자유통일문화원 대표는 "이번 사건은 문재인 정권 들어 탈북 인권 단체들에 대한 압박과 탈북자들에 대한 무시와 소외가 낳은 인재"라고 지적했다. 노현정 NK경제인연합회장은 "통일부 장관, 하나재단 이사장, 하나센터장, 구청장, 서울시장에게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21일 국회에서 '탈북 아사 모자 사건 긴급 현안 점검 라운드 테이블'이 열렸다. 정병국, 김영우 자유한국당 의원과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 무소속 이언주 의원이 참석해 탈북자 대표들의 의견을 청취했다. 이 자리에는 통일부와 하나재단, 보건복지부, 서울시 관계자도 참석했다. 장세정 기자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해 광화문 광장에 설치된 '기억의 빛' 전시장에서 한성옥씨 모자 분향소까지 거리는 불과 30m다. 6차로를 사이에 두고 있다. 하지만 '사람이 먼저'라던 문재인 정부 인사들은 한씨 모자의 분향소를 찾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탈북자들은 "정부가 김정은 눈치를 본다"고 비판했다. 장세정 기자
모자의 비극을 취재하면서 특이한 현상을 발견했다. 수천 명의 시민이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애도하고 분향소를 찾고 있다. 그런데 '사람이 먼저'라며 인권을 외쳐온 문재인 정부 관계자는 아무도 분향소에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 세월호 희생자를 위해 설치한 '기억과 빛' 전시장에서 분향소까지는 불과 30m다. 북한을 의식한 때문인지 이 정부와 '미리 온 통일'이라는 탈북자의 거리감이 너무 멀어 보였다.

장세정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장서윤 인턴기자가 동영상 편집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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