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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정 이어 또 토막살인…사형 구형에 판·검사는 엇갈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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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12일 오전 제주지법에서 전 남편을 잔혹하게 살해한 뒤 시신을 훼손, 유기한 혐의를 받는 고유정(36)의 첫 공판이 열린 가운데 시민들이 호송차에 오르는 고유정의 머리채를 잡아 당기고 있다. [뉴시스]

12일 오전 제주지법에서 전 남편을 잔혹하게 살해한 뒤 시신을 훼손, 유기한 혐의를 받는 고유정(36)의 첫 공판이 열린 가운데 시민들이 호송차에 오르는 고유정의 머리채를 잡아 당기고 있다. [뉴시스]

"고유정 사건 재판장 고민이 상당할거예요"

판사, 사형 구형 검사에 "한국 사형제 폐지국" 지적도

한 현직 판사가 지난 12일 '고유정 재판'의 방청 열기를 보며 한 말이다. 전 남편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한 혐의를 받는 고씨는 이날 법정에 출석했다가 시민들에게 거친 욕설을 듣고 머리채를 붙잡혔다.

이 판사는 "성난 시민과 검찰은 고씨의 사형을 요구할 것"이라며 "재판장 입장에선 만약 고씨 혐의가 모두 입증된다면 사형 이외의 선택지를 고르기가 매우 부담스러운 상황"이라 말했다. 무기 또는 유기 징역을 선고한다면 여론의 포화가 판사 개인에게 쏟아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고씨의 변호인은 또한 살인 혐의에 대해 "성폭행 시도에 대한 정당방위"라 주장하고 있다. 대법원 양형기준에 따르면 피해자에게 귀책사유가 있는 과잉 방위는 살인범죄 감경 사유에 해당한다. 재판부 입장에선 고씨 변호인의 주장을 방청객처럼 무조건 거부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지난 6월 28일 제주시 동복리 제주환경자원순환센터에서 고유정이 범행 후 인근 클린하우스에 버린 종량제봉투를 찾기 위해 포크레인이 땅을 파내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6월 28일 제주시 동복리 제주환경자원순환센터에서 고유정이 범행 후 인근 클린하우스에 버린 종량제봉투를 찾기 위해 포크레인이 땅을 파내고 있다. [연합뉴스]

대법원, 사형선고 양형기준 매우 엄격

판결의 결론뿐 아니라 판사를 둘러싼 주변 환경의 변화도 흉악범죄 재판을 맡는 판사에겐 부담이다.

최근에는 언론뿐 아니라 유튜브 방송 등에서도 판사의 얼굴과 실명을 공개하며 판결을 비판하는 경우가 잦아져 판사들의 신변보호 요청도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대법원 양형기준과 판례를 살펴보면 사형 선고가 내려지는 사건은 극히 이례적인 '극단적 생명경시 범죄(2인 이상 살해)'에 국한되는 경우가 대다수다.

현재 대법원에서 사형선고가 확정된 마지막 수형자는 2014년 육군22사단 일반전방초소(GOP)에서 총기를 난사해 5명을 살해한 임모 병장이다.

고유정 사건이나 최근 한강에서 토막 난 시신이 발견된 '모텔 살인사건'은 무작위로 1인을 살해한 '비난 동기 살인(살인 동기에 비난할 사유가 있음)'에 해당한다. 사형선고가 가능하지만 이런 사건엔 무기또는 유기징역이 선고됐다.

PC방 아르바이트생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피의자 김성수(29)가 지난해 11월 서울 양천경찰서에서 서울남부지방검찰청으로 송치되고 있다. 김성수는 정신감정 결과 심신상실 또는 심신미약 상태가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뉴스1]

PC방 아르바이트생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피의자 김성수(29)가 지난해 11월 서울 양천경찰서에서 서울남부지방검찰청으로 송치되고 있다. 김성수는 정신감정 결과 심신상실 또는 심신미약 상태가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뉴스1]

이영학에 무기징역, 김성수엔 30년형  

지난해 2월 서울북부지법은 여중생을 성적으로 학대하고 살해한 뒤 시신을 유기한 '어금니 아빠' 이영학(37)에게 이례적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2심에서 "교화 가능성이 있다"며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유족의 반발에도 대법원은 2심 결정을 확정했다.

지난해 10월 PC방에서 아르바이트생 신모씨를 흉기로 약 80회가량 찔러 살해한 김성수(30)에게도 법원은 검찰이 구형한 사형이 아닌 징역 30년형을 선고했다. 30년형은 유기징역의 최고형이다.

당시 판결을 선고한 서울남부지법은 여론의 반발에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선고할 사건이 아니라고 판단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른 살인 사건과 비교해 형평성이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검찰은 "형량이 부당하다"며 항소한 상태다.

검찰, 흉악범죄에 사형 구형 "국민 법감정 고려"

법원과 달리 검찰은 흉악범죄에 적극적으로 사형을 구형한다. 검사 출신 변호사는 "검찰 입장에선 피해자의 억울함과 국민의 법감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지난 6월 '강력범죄 전문검사 커뮤니티' 세미나에 참석한 수원지검 여주지청의 원경희 검사(연수원 45기)도 "사형선고가 극히 제한적으로 이뤄지는 등 구형과 선고형이 낮아 비판이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법원의 선고가 국민의 법감정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진주의 한 아파트에서 지난 4월 17일 발생한 방화·묻지마 살인 사건으로 숨진 희생자 황모(74)씨의 발인이 21일 오전 경남 진주 한일병원에서 거행되고 있다. [뉴스1]

진주의 한 아파트에서 지난 4월 17일 발생한 방화·묻지마 살인 사건으로 숨진 희생자 황모(74)씨의 발인이 21일 오전 경남 진주 한일병원에서 거행되고 있다. [뉴스1]

실제 검찰에 따르면 2017년 판결이 내려진 208건의 살인사건 중 법원이 사형 선고를 내린 사건은 한건도 없었다. 무기징역이 20건, 나머지 유기징역의 평균 형량은 14년 9개월이었다. 원 검사는 "생명 침해를 계획한 범죄에는 무기징역을, 그보다 죄질이 중한 살인은 사형 구형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장판사 출신의 도진기 변호사(연수원 26기)는 "검찰 입장에선 사형을 구형해 선고를 받아내겠다는 목표도 있겠지만 사회적으로 범죄 예방의 효과도 고려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도 변호사는 "막상 피의자 입장에서 징역형이 아닌 사형 구형을 받을 경우 압박감이 엄청나다"고 했다.

검찰 간부 출신의 변호사는 "일반적으로 법원은 검찰의 구형보다 낮게 선고한다"며 "그런 점을 예상해 검사들이 구형을 더 세게 하는 기술적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지난 2월 12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형제도폐지소위원회가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형제도 헌법소원 청구를 밝히고 있다. [뉴스1]

지난 2월 12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형제도폐지소위원회가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형제도 헌법소원 청구를 밝히고 있다. [뉴스1]

법원, 검찰 사형구형에 "한국 사형폐지국" 지적

피고인에 대한 사형 적용 여부를 놓고 법원과 검찰이 갈등을 벌이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 11월 서울고등법원은 '양평 전원 주택 살인사건'의 피고인 허모씨에게 1심과 같은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검찰이 사형을 구형하며 항소한 사건이었다.

당시 재판장이었던 김인겸 당시 고등법원 부장판사(현 법원행정처 차장)는 "법무부는 1997년을 마지막으로 20여년째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있는데 검찰이 피고인을 사형에 처해달라며 항소한 것이 올바른 검찰권 행사인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미집행 사형수가 61명인 상황에서 사형 선고의 실질적 효과가 없고 검찰이 상급기관인 법무부와 입장을 달리한다는 주장이다. 대법원은 지난 2월 허씨의 무기징역을 확정했다.

국제사면위원회는 10년 이상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 국가를 실질적 사형폐지국으로 분류한다. 우리나라도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검찰은 사형제가 폐지되지 않은 이상 자체 구형기준에 따라 사형을 구형하는 것이라 반박한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18일 오전 서울 서초구 방배동 자택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18일 오전 서울 서초구 방배동 자택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조국 "사형제만은 안된다" 

흉악범죄가 다시 주목받는 상황에서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조국 후보자의 '사형제 폐지론'도 주목받고 있다. 조 후보자는 2009년 논문 '사형폐지 소론'에서 사형제의 폐지를 "진보와 보수의 대립을 넘어 정치적 결단이 필요한 사안"이라 밝혔다.

같은 해 출간된 저서 『보노보 찬가』에서도 사형제의 범죄예방 효과와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가석방 없는 절대적 종신형을 과도기적으로 채택하되 "살인범의 죽음을 요구하는 우리의 본능은 순치돼야 한다"고 썼다.

사형제 폐지 소신이 강한 조 후보자가 장관으로 임명될 경우 문재인 정부 임기 내 법무부가 사형폐지국 선언과 함께 검찰에 사형 구형을 금지하는 지시를 내릴 가능성도 제기된다. 법무부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지난해 말 '사형 폐지국 선언'을 검토했지만 여론을 고려해 보류한 상태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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