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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빼미 식당·극장·서점…중국 ‘야간경제’로 트럼프 맞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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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신경진의 서핑 차이나 

지난 3일 자정께 베이징 야식거리 구이제의 한 민물가재요리 전문식당 앞에 400여 팀의 대기자들이 간이 의자에 앉아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며 기다리고 있다. 신경진 기자

지난 3일 자정께 베이징 야식거리 구이제의 한 민물가재요리 전문식당 앞에 400여 팀의 대기자들이 간이 의자에 앉아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며 기다리고 있다. 신경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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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시즌의 절정이던 지난 3일 자정 무렵, 베이징의 대표 먹자거리인 구이제(簋街)의 샤오룽샤(小龍蝦·민물가재) 전문식당 후다판관(胡大飯館) 본점의 식탁별 대기 숫자다. 2인석, 3~5인석, 6~7인석 테이블과 8~15석 홀까지 모두 396개팀에 이르는 올빼미족 대기 손님들이 식당 앞 간이 의자에 앉아 해바라기 씨를 까먹으며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번호표 담당 종업원은 “자정에도 3~4시간 대기는 기본”이라고 말했다. 1999년 7개 탁자로 개업한 후다판관은 연중무휴 24시간 영업하는 본점을 중심으로 반경 800m 내에 있는 4개 분점과 3개 자매식당이 새벽 2~4시까지 하루 평균 8만 마리의 가재를 팔아치운다. 대기 손님에게 서비스로 제공하는 해바라기 씨만 하루 600㎏에 이른다. 중국인의 일상에 필수품이 된 인터넷 메신저 웨이신(微信)을 이용하면 대기 시간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평일이던 16일 밤 11시에도 64개팀이 기다리며, 중국 야간경제를 환히 밝히고 있었다.
4일 새벽 1시, 젊음의 거리로 유명한 싼리툰(三里屯)의 24시간 서점 싼롄타오펀(三聯韜奮)을 찾았다. 각국 젊은이들로 분주한 클럽과 주점 사이에서 올빼미 독서족 60여 명이 테이블과 서가에서 열독(熱讀)의 토요일 밤을 보내고 있었다.

지난 4일 새벽 1시경 베이징 대표 야간 상권인 싼리툰에 위치한 24시간 서점 싼롄타오펀에서 시민들이 책을 읽고 있다. 신경진 기자

지난 4일 새벽 1시경 베이징 대표 야간 상권인 싼리툰에 위치한 24시간 서점 싼롄타오펀에서 시민들이 책을 읽고 있다. 신경진 기자

심야 영화도 야간경제의 대표주자다. 신작 영화의 자정 개봉은 관례가 된 지 오래다. 여름 시장을 노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분노의 질주: 홉스앤쇼’는 23일 0시에 개봉한다. 지난 4월 24일 전세계에서 가장 먼저 개봉한 마블영화 ‘어벤저스-엔드 게임’은 14만4200개 스크린에서 자정에 일제히 개봉해 초회 상영에서 2억8200억 위안(501억원)의 수익을 기록했다고 시장조사업체 이언(藝恩)이 집계했다. 중국 경제지 매일경제신문은 지난 4년간 자정 개봉 영화가 1531편이라고 보도했다. 상하이의 다광밍(大光明), 궈타이(國泰) 영화관은 7월 15일부터 24시간 상영에 돌입했다.
중국이 24시간 영업하는 심야식당·서점·영화관 등 야간경제 활성화에 팔을 걷어붙였다. 미국의 집중 견제를 받는 수출 주도형 경제 일변도에서 벗어나 쇼핑·레저·요식업·관광 등 내수 주도형 경제로 새로운 돌파구를 찾겠다는 전략이다. 김우정 광저우 무역관 차장은 “아시아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1999년 주룽지(朱鎔基) 총리가 전격 도입했던 황금연휴 정책(춘절·노동절·국경절에 각각 1주일 씩 쉬는 것)을 계승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야간경제는 칭화대 총장과 환경부 장관을 역임한 천지닝(陳吉寧) 베이징 시장의 핵심 정책이다. 베이징시는 7월 12일 14개 부처가 합동으로 13개 항목의 ‘야간경제 번영과 소비 촉진 조치’를 발표했다. 첫째가 장등인(掌燈人·등불을 켜는 사람) 제도다. 무협소설 속 문파의 우두머리를 일컫는 장문인을 본떴다. 시·구·가도(街道·한국의 동)별로 장등인을 임명해 야간경제 촉진을 위한 정책의 입안·실천·개선·발전·경쟁·안전·홍보 등 7대 임무를 맡겼다. 대중교통 운행시간도 연장했다.
금·토 이틀간 지하철 1·2호선의 막차 운행 시간을 0시 30분으로 늦췄다. 박물관·운동시설·관광지의 운영시간을 연장했고, 유명 쇼핑몰과 상권이 벌이는 미식 축제, 루미나리에 등 특색있는 축제를 금융 지원한다. 24시간 편의점 보급, 야간 소비 가이드북 제작과 함께 야간 안전사고 방지를 위한 순찰도 강화했다.
싼리툰의 쇼핑몰 타이구리(太古里)의 마쩌단(馬澤丹) 총경리는 “시 정부 책임자가 올해 들어서만 세 차례 싼리툰을 현지 조사한 뒤에 만든 조치”라며 “야간경제 육성에 그치지 않고 교통·조명·도시경관 등을 포괄해 상권 전체를 업그레이드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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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경제는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있다는 평가다. 대표적인 성공 사례는 야식의 대표 메뉴 샤오룽샤 경제다. 음식 배달 플랫폼 메이퇀(美團)이 최근 발표한 ‘샤오룽샤 소비 빅데이터 보고’에 따르면 2018년 중국인이 메이퇀에서 소비한 가재는 4만5000톤. 일렬로 세우면 지구를 세 바퀴 돌 수 있는 양이다. 2018년 소비액은 2017년보다 4.3배 늘었다. 올해 5월까지 벌써 지난해 매출의 77%를 기록했다. 2018년 샤오룽샤 매출은 4000억 위안(68조4000억원)으로 동유럽 국가 벨라루스의 한해 국내총생산(GDP) 규모다.
류쉐즈(劉學智) 자오퉁은행 금융연구센터 연구원은 “야간경제는 쇼핑·음식·문화·오락·관광·건강·교통 등의 동반 발전을 견인하는 중국 도시경제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자 일자리 창출 전략”이라고 말했다. 황재원 광저우 무역관장은 “지방 정부마다 야간경제 활성화를 위한 다원화·다문화 전략을 추진하고 있어 한국 소비재·서비스 업체가 중국 내수시장에 진출하는 좋은 발판으로 삼을 수 있다”고 제언했다.
장밋빛 전망만 있는 건 아니다. 우선 야간경제가 1970년대 영국에서 도심 공동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추진했던 철 지난 경제학 개념이라는 지적이다. 서민 먹거리인 노천 꼬치구이가 대기오염을 이유로 금지된 것도 한계로 지적됐다. 여름과 겨울의 기온 차가 50도를 넘나드는 베이징 날씨도 또 다른 복병이다. 홍콩 명보는 최근 “매일 3~4시간씩 붐비는 대중교통으로 통근하느라 몸과 마음이 지친 직장인들에게 야간경제는 사치”라고 꼬집었다. 대도시 부동산값 폭등을 피해 교외로 쫓겨간 샐러리맨들에게 야간 소비에 뛰어들 심적·경제적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베이징=신경진 특파원 shin.kyung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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