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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열치열’ 한국인 폭염에 강하다?…“독일인보다 더위 잘 견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10일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한낮에 서울 종로구 경복궁을 찾은 외국인 어린이들이 이마에 쿨패치를 붙이고 있다. [뉴시스]

지난 10일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한낮에 서울 종로구 경복궁을 찾은 외국인 어린이들이 이마에 쿨패치를 붙이고 있다. [뉴시스]

미국 동부의 보스턴에서 살다가 재작년에 한국으로 온 라민(28)은 아직도 여름철만 되면 무더위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그는 “한국의 여름은 덥고 습해서 집 밖에 나가면 그때부터 땀이 나기 시작한다”며 “한국인들은 (나처럼) 땀을 그렇게까지 많이 흘리는 것 같지 않아 신기하다”고 말했다.

폭염으로 인한 열 스트레스가 거주하는 국가나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으로 확인됐다.
기상청 산하 국립기상과학원이 2017~2018년에 한국인을 대상으로 온도에 따른 열 스트레스를 실험한 결과다.

국립기상과학원은 2년간 서울대학교 인공기후실에서 성인 남성을 대상으로 인지 온도에 따른 열 스트레스를 실험했다.
인지 온도란 기온뿐 아니라 습도, 풍속, 지표면에서 반사되는 복사열, 신진대사량 등을 모두 고려한 폭염 진단지수를 말한다.

한국인 열 스트레스 상대적으로 낮아 

연구진은 독일 기상청에서 개발한 독일인의 인지 온도를 기준으로 한국인의 열 스트레스를 측정했다.
실험 결과, 같은 인지 온도에서 받는 열 스트레스가 한국인이 독일인보다 낮았다.
35도의 인지 온도에서 독일인은 ‘더움’, 한국인은 ‘약간 더움’ 수준의 열 스트레스를 받았다.

또, 독일인은 40도에서 ‘매우 더움’ 수준으로 열 스트레스가 상승했다.
하지만, 한국인은 40도까지는 ’약간 더움’이라고 느꼈고, 45도 이상이 돼서야 열 스트레스가 ‘매우 더움’ 수준에 가깝게 높아졌다.

한국 여름철 폭염에 대한 열 스트레스.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한국 여름철 폭염에 대한 열 스트레스.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한반도의 여름철 날씨에 대한 열 스트레스 역시 한국인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지난 30년간(1987~2016년) 한국의 일 최고 인지 온도에 대한 열 스트레스 빈도를 분석한 결과, 독일인은 ‘매우 더움’ 수준의 열 스트레스가 30%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반면, 한국인은 ‘약간 더움(37%)’ 수준의 열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하종철 국립기상과학원 응용기상연구과장은 “한국인은 독일인보다 열에 대한 내성이 강하고 민감도가 낮았으며, 한반도 기후에 대한 열 스트레스도 상대적으로 낮았다”며 “인체가 기후에 적응하다 보니 고온다습한 한국의 여름철 더위에 적응이 돼서 독일인보다 더위를 덜 타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열치열’(以熱治熱, 열은 열로써 다스린다)로 대표되는 한국 특유의 더위 극복 문화가 영향을 미쳤다는 해석도 있다.

절기상 중복인 지난달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한 삼계탕 전문점 앞에 시민들이 점심 식사를 위해 줄 서 있다. [연합뉴스]

절기상 중복인 지난달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한 삼계탕 전문점 앞에 시민들이 점심 식사를 위해 줄 서 있다. [연합뉴스]

‘대프리카’ 대구 시민, 더위 적응력 높아

지난달 30일 오후 뜨거워진 대구 도심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다. [뉴스1]

지난달 30일 오후 뜨거워진 대구 도심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다. [뉴스1]

국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더위를 견디는 정도가 달랐다.
특히, 이른바 ‘대프리카(대구+아프리카)’로 불릴 정도로 여름철 폭염이 극심한 대구에 사는 사람들은 서울 사람보다 무더위를 잘 견디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2월 한국지역사회생활과학회지에 게재된 ‘서울과 대구 지역 거주 성인 남성의 여름철 폭염 인지 및 체온 조절성 행동 비교’ 논문에 따르면, 대구에 사는 성인 남성은 서울에 사는 성인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더위에 따른 열 스트레스에 강했다.

연구진은 서울과 대구에 5년 이상 거주한 성인 남성 200명씩을 상대로 한낮에 더위 체감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다.
조사 당시 대구가 서울보다 WBGT(온열지수)가 더 높았는데도 서울 사람들이 대구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더 덥고, 더 불쾌하다’고 응답했다.
대구 사람들이 더위로 인식하기 시작하는 실외 온도 역시 평균 30도로 서울 사람(평균 29도)보다 1도가량 높았다.

기상 전문가들은 이렇게 거주 지역에 따라 더위를 견디는 정도가 다른 건 기후 순응도에 따른 차이라고 보고 있다.
김백조 국립기상과학원 재해연구센터장은 “대구 등 고온이 많이 발생하는 분지 지역에 사는 사람은 어느 정도 기온이 올라도 잘 적응하는 반면에 인천 등 폭염이 심하지 않은 해안가에 사는 사람은 조금만 온도가 올라도 신체가 받을 수 있는 스트레스가 클 수 있다”고 말했다.

“기온 위주 폭염 특보 개선해야”

폭염특보가 내려진 5일 오후 서울 여의대로에 지열로 인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며 온도계가 지면온도 47도를 가리키고 있다. [뉴스1]

폭염특보가 내려진 5일 오후 서울 여의대로에 지열로 인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며 온도계가 지면온도 47도를 가리키고 있다. [뉴스1]

폭염으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단순화된 폭염 특보 기준을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현재는 최고기온이 33도 이상인 날이 2일 이상 지속할 것으로 예상하면 폭염주의보, 35도 이상에서 2일 이상 이어질 것으로 예상하면 폭염 경보를 발령한다. 예상 기온만으로 폭염을 판단하는 것이다.

독일이나 일본 등 외국에서는 기온뿐 아니라 습도와 기류까지 반영해 폭염 특보를 내린다.

하 과장은 “열 스트레스는 거주하는 지역이나 연령, 성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며 “온도와 습도, 풍속 같은 기상학적 요인 외에도 신진대사량 등 인체 특성까지 고려한 한국형 인지 온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천권필 기자 fee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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