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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시민민족주의’가 답이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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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9호 31면

김환영 대기자/중앙콘텐트랩

김환영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이념의 역사에서 19세기와 20세기의 ‘유령’은 마르크스와 레닌의 『공산당 선언』(1848)으로 상징되는 공산주의였다. 국제사회에서 20, 21세기의 ‘망령’은 민족주의다. 민족주의는1930년대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초래한 주범으로 지목됐다.

사망선고 받았던 민족주의 부활 #트럼프 “나는 민족주의자” 선언 #세계 각국 권위주의 지도자들 #민족주의 내세우며 세계화에 반대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두 주의(主義·ism) 모두 설득력을 상실했다. 두 주의 때문에 무고한 인명이 희생됐다. 그런데 사실상 사형 선고를 받았던 공산주의와 민족주의가 최근 은근슬쩍 세력을 넓히고 있다. 유럽·미국·중국·일본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부활이 두드러진 민족주의가 특히 그렇다.

민족주의의 부활에 대한 강력한 국제적 견제세력으로 가톨릭 교회가 돋보인다. 역대 로마 교황과 가톨릭 교회는 민족주의와는 애초부터 껄끄러운 사이였다. 가톨릭 교회는 민주혁명·자유주의·민족주의에 대해 한때 지극히 적대적이었다. 오늘날 가톨릭 교회가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우호 세력, 후견인으로 탈바꿈했지만, ‘극단적’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여전히 적대감을 숨기지 않는다. 가톨릭 교회가 민족이라는 ‘특수’가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이라는 ‘보편’을 표방하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라는 가톨릭 교회의 믿음을 온 세계에 전파하는 데 민족주의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특히 중국 민족주의가 ‘중국 고유의 종교 전통’을 내세우면 중국에서 가톨릭 교회의 입지는 약화한다. 그래서인지 프란치스코 교황은 기회 있을 때마다 ‘극단적’ 민족주의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선데이 칼럼 8/17

선데이 칼럼 8/17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등장하기 이전의 미국 또한 민족주의의 적이었다. 미국은 민족주의와 대척점에 있는 세계주의·글로벌리즘을 전 세계에 유포했다. 미국이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사실 미국의 국익에 별로 좋을 일이 없었다. 미국은 내부적으로 애국주의는 눈에 보였지만, 민족주의는 그다지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노골적으로 “나는 민족주의자”라고 말한다. 반대파들이 큰 충격을 입은 가운데 미국 내에 애국주의·민족주의 논란이 일고 있다.

미국 최초의 여성 국무장관(1997 ~2001)을 지낸 매들린 올브라이트 조지타운대 석좌교수는 지난해 11월 중앙SUNDAY와 인터뷰에서 민족주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애국심은 중요하다. 우리가 사는 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 게 중요하다. 내 나라의 역사에 대해 알고, 내 나라에는 어떤 국가 이익이 있는지 아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과도한 민족주의는 매우 위험하다. 그런데 권위주의적인 지도자들은 민족주의를 악용한다. 그들은 ‘우리나라는 희생자다. 우리나라는 공격받고 있다. 우리는 외국인을 우리나라에서 추방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계화는 평판이 나쁜 말, 민족주의는 좋은 말이 됐다. 나는 그 반대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계 혹은 국제사회 차원에서 애국주의·민족주의에 대한 올브라이트의 주장은 교황의 주장과 일치한다.

전 세계를 상대로 수출하고 투자하는 한국 또한 세계 각국에서 민족주의가 발흥하면 좋을 게 없다. 세계 각국에서 ‘경제 민족주의’가 정책으로 구현될수록 우리 기업들의 비즈니스가 더 힘들어질 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우리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민족주의의 ‘시대착오적’ 부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최근 국내 정치 상황과 한·일 관계는 우리가 애국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도록 강요했다. 대체로 우리는 지금까지 ‘종족적 민족주의’를 실천해왔던 것 같다. 종족적 민족주의란 “민족이 근대화 이전에 존재한 공동의 문화적 유산과 언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입장”의 민족주의다. 근대의 민족과 근대 이전에 존재한 인종 공동체 사이의 연속성을 부각시킴으로써, 근대화 이후에 민족이 등장했다는 주장에 반대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애국주의(자기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를 위하여 몸 바쳐 일해야 한다는 사상. 또는 그런 태도)가 부상했다. 하지만 민족주의("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가장 중시하는 사상”)는 보이지 않는다.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민족주의는 필연적으로 통일을 중요한 가치로 내세워야 하는데 통일을 내세우다 보면 정적들의 공격을 받기에 십상이기 때문이다. 욕을 먹더라도, 통일을 내세워 일시적이라도 정치적인 손해를 보더라도, 대한민국 정당이라면 통일을 대한민국 최고의 가치로 내세워야 하지 않을까.

세계화 시대에도 민족주의는 필요하다. 남북이 분단된 우리는 ‘통일 민족주의’가 필요한지 모른다. 통일 이전에는 시민 민족주의(市民民族主義)를 꽃피워야 한다. 시민 민족주의는 "자유주의와 결합된 민족주의다. 시민권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인종 등의 전통적 민족 문화보다는 일련의 통합적인 정치적 가치에 근거를 두고 있다.”

시민 민족주의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융합하고 통합하며, 모든 국민·유권자들을 위해 자유·평등·민권·민생·평화를 대변한다. 지금 우리에게 이 같은 시민 민족주의보다 더 우월한 답이 있을까. 적어도 아직은 없어 보인다.

김환영 대기자/중앙콘텐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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