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3월 7일 일본 도쿄 메이지신궁 경기장. 4-1로 앞선 후반 40분 최정민(1983년 작고)은 일본 골키퍼와 수비수 틈으로 발을 내밀어 쐐기골을 터뜨렸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예선전이었던 한·일전은 선수들에게 차라리 전쟁 같았다. 뛰고, 넘어지기를 거듭한 끝에 한국이 5-1로 이겼다.
광복절 맞아 첫 한일전 사진전 #1954년 5-1 승리 영화로 제작 #12월 18일 한·일전 벌써 관심 #“정치와 스포츠는 분리돼야”
일본 땅에서 태극기가 올라가자 선수들과 재일동포들은 눈물을 펑펑 흘렸다. 이날 승리를 발판삼아 한국은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광복 74주년을 맞아 경기 고양시 원마운트 스포츠클럽에서 당시 사진들이 14일 전시됐다. ‘지면 현해탄(대한해협)에 빠져 죽겠다’는 결의가 담긴 서약서도 보였다.
당시 2골을 넣었던 최정민의 딸인 혜정씨는 “아버지가 죽기살기로 뛰었다는 말을 어머니에게서 들었다”고 말했다. 이 스토리를 다룬 영화 ‘도쿄대첩(가제)’은 내년 연말 개봉을 준비 중이다. 영화 제작자인 차승재 동국대 영상대학원 교수는 “첫 일본전에서 극일을 이룬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해방 후 한국이 가장 먼저 일본을 추월한 분야가 축구였다. 송기룡 대한축구협회 심판운영실장은 “축구는 일제시대 일왕배부터 우리가 더 우월했다”고 전했다. 대표팀 공격수 출신 이회택(73)은 “1960~70년대 우리가 일본에 한수 가르쳐 줄 수 있는 건 축구밖에 없었다. 축구는 국민들의 자존심이었다”고 회상했다. 한국축구는 일본과의 상대전적에서 41승23무14패로 앞선다.
뿌리 깊은 라이벌 의식은 21세기에도 이어졌다. 2007년 아시안컵 일본전에서 이근호와 나카무라 슌스케가 신경전을 벌이자, 이천수(38)가 나카무라 따귀를 날렸다. 이천수는 “일본전을 앞두면 다들 웃음기가 사라졌다. 인터뷰 때 일부러 ‘한국이 더 강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스스로 최면을 걸고 싶었다”고 말했다.
중앙수비 김민재(23·베이징 궈안)는 지난해 일본과의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결승전을 앞두고 동료들에게 “지면 귀국행 비행기에서 뛰어내리자”고 말했다. 이강인(18·발렌시아)은 지난 6월 일본과 20세 이하 월드컵 16강전을 앞두고 팬들에게 “애국가를 크게 같이 불러 주셨으면 좋겠다”라고 당부했다.
한·일전에서는 극적인 골도 많이 나왔다. 이민성(46)은 1997년 9월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벼락같은 중거리슛을 날렸다.
2010년 5월 일본 사이타마에서 열린 평가전에서 골을 넣은 박지성(38)은 천천히 달리며 침묵에 빠진 일본 응원단을 바라보는 ‘산책 세리머니’를 선보였다.
박주영(34)은 2012년 런던 올림픽 3·4위전에서 수비수 4명을 무너뜨린 ‘추풍낙엽슛’을 쐈다.
이승우(21·베로나)는 지난해 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 일본 자동차 기업 광고판을 밟고 올라가 세리머니를 펼쳤다.
일본전에서 패하면 어김없이 ‘참사’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2011년 8월10일 평가전에서 0-3 대패는 ‘삿포로 참사’로 기억된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 예선전 3-3 동점에서 크로스바를 때리는 슈팅을 날렸던 김기복(75)은 “골득실로 일본이 올림픽에 나갔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평생 아쉬움으로 남아있다”고 했다.
한국과 일본은 12월 18일 부산에서 열리는 E-1 챔피언십(동아시안컵)에서 만난다. 2017년 E-1챔피언십에서 한국은 일본을 4-1로 꺾었지만, 앞서 2010년 이후 7년간은 3무2패에 그쳤다.
일본의 경제보복에 따라 한·일 관계가 악화한 가운데 벌써 이 경기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1985년 11월 멕시코 월드컵 최종예선 일본전에서 골을 터트렸던 허정무(64)는 “선수 때는 일본을 지구 최대의 적이라고 생각했다”며“대표팀 감독 시절에는 선수들에게 ‘감정적으로 하지 말고 우리의 경기를 하자’고 당부했다”고 말했다. 김기복은 ”스포츠와 정치는 분리되어야 한다. 정정당당히 겨뤄 우리가 승리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고양=박린·피주영 기자 rpark7@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