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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탄소섬유 독립' 일등공신 "삼성에 안 주면 日도 퇴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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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윤혁 한국탄소융합기술원장이 지난 9일 전북 전주시 팔복동 한국탄소융합기술원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전주=이동현 기자

방윤혁 한국탄소융합기술원장이 지난 9일 전북 전주시 팔복동 한국탄소융합기술원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전주=이동현 기자

일본과의 무역전쟁으로 일본 수입의존도가 높은 부품·소재 분야의 공급 차질 우려가 커지고 있다.

고순도 불화수소(HF)처럼 국내 기술 자체가 개발되지 않은 것도 있지만, 개발이 늦었거나 글로벌 공급망(supply chain)에 젖어 국산 대체재 적용이 안 된 경우도 있다. 국방, 우주·항공 분야, 모빌리티 등의 핵심 소재인 탄소섬유(CFRP)가 대표적이다.

탄소섬유는 일본의 도레이·토호·미쓰비시레이온 등 3개사가 세계 생산량의 66%를 차지한다. 한국이 미래 먹거리로 삼고 있는 수소경제의 핵심부품인 수소연료 저장용기의 소재이기도 하다. 일본의 무역보복 직후 ‘일본이 무기화할 다음 품목’으로 우려가 컸던 이유다.

하지만 다행히 탄소섬유는 상당부분 국산화가 이뤄졌다. 지난 9일 전북 전주시 한국탄소융합기술원에서 ‘탄소섬유 독립’의 일등공신인 방윤혁(55) 원장을 만나 한국 소재 산업의 미래에 관해 물었다.

한국탄소융합기술원이 효성첨단소재와 함께 개발한 수소연료 저장용기. 일본 도레이의 소재로 만든 제품을 대체할 수 있다. 전주=이동현 기자

한국탄소융합기술원이 효성첨단소재와 함께 개발한 수소연료 저장용기. 일본 도레이의 소재로 만든 제품을 대체할 수 있다. 전주=이동현 기자

탄소섬유를 국산화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국민도 많다. 선진국 대비 30년 이상 뒤처진 탄소섬유 개발에 나선 이유는 뭔가. 
한국의 탄소섬유 개발 역사는 생각보다 길다. 1980년대 초에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대기업들이 개발에 뛰어들었는데 20년 만에 두 손을 들었다. 국방·항공우주 분야에 사용되는 전략물자이다 보니 원천기술 개발이 쉽지 않았다. 10년 공백 끝에 효성첨단소재가 재도전에 나섰다. 마침 지방자치단체(전주시)와 주무 부처(산업통상자원부)가 탄소경제 기본계획을 세우고 전문연구기관(한국탄소융합기술원)을 설립했다.
이미 일본·독일 등이 장악하고 있는 시장에서 어떻게 성공 가능성을 확신했나. 
확신은 없었는데 성장 가능성은 충분했다. 2000년대 중반에 이미 시장 성장률이 10%를 넘었은 터였다. 20년 동안 실패했던 분야인 데다 세계 주요 플레이어 6곳이 시장을 장악한 상태여서 도전해봤자 안 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국내 대표 섬유기업인 효성이 과감한 결단을 내린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명예회장(조석래 전 회장)께서 엔지니어(화학공학과) 출신이신 것도 이유였던 것 같다.

부산대 섬유공학과 출신인 방 원장은 국내에선 드물게 탄소섬유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일합섬 연구소에서 탄소섬유의 원료인 프리커서(precursor)를 개발한 경험이 있었다. 한화케미칼을 거쳐 효성에서 타이어코드 연구 팀장을 맡고 있던 2007년 경영진으로부터 탄소섬유 개발 지시가 내려왔다. 탄소섬유 관련 논문 22편, 관련 특허만 44건을 출원한 국내 최고 탄소섬유 권위자였던 방 원장에게 탄소섬유 개발은 운명처럼 다시 찾아왔다.

한국탄소융합기술원 연구원이 브레이딩 장비를 통해 탄소섬유를 관(管)형으로 직조하고 있다. [사진 한국탄소융합기술원]

한국탄소융합기술원 연구원들이 탄소섬유 직조장비로 탄소섬유를 짜고 있다. 여기에 수지를 입히고 성형하면 우리가 흔히 보는 탄소섬유가 된다. [사진 한국탄소융합기술원]
한국탄소융합기술원 연구원들이 탄소섬유 생산을 위한 실험에 몰두하고 있다. [사진 한국탄소융합기술원}
프리커서 개발 노하우가 도움이 됐던 건가. 
사실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연구자료도 다 태워버렸었다. 2001년에 태광이 탄소섬유 사업을 포기하면서 이제 안 되겠구나 생각했다. 다시 개발하라니 막막했다. 10년 정도 맥이 끊겨 있다 보니 연구진도 뿔뿔이 흩어졌고 시설이나 장비도 다 없어졌었다. 옛날 연구하던 멤버를 불러모았다. 운이 좋았던 게 탄소융합기술원 전신인 전주기계산업리서치센터가 150t 규모 세미 상용급 탄화설비를 산자부 자금을 받아 만들어 놨던 거였다. 기업이 시장을 보고 뛰어들었고, 정부가 씨드머니(seed money)를, 지자체가 장비를 마련해준 상황이었다. 연구원 절반이 2008년 전주에 내려와 5년짜리 국책과제(고강도 탄소섬유 개발)를 맡았는데 3년 반 만에 달성했다.
20년간 실패했던 탄소섬유 개발에 성공한 비결은 뭐였나. 
실패 경험이 밑거름된 것 같다. 탄소섬유 개발 역사가 오래돼 이미 만료된 특허도 있고, 어떻게 만드는지는 알려져 있었다. 탄소섬유 생산은 원료 중합체를 프리커서로 만드는 공정과 프리커서를 탄화(炭化)해 탄소섬유로 만드는 공정으로 나뉜다. 프리커서를 만드는 공정이 전체 기술의 70~80%를 차지한다. 기계처럼 뜯어본다고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 수 있는 게 아니니 계속 연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특허는 피하면서 만료된 특허를 활용하고, 여기에 우리 아이디어를 더해서 만들었다. 탄소섬유를 만드는 회사가 많지도 않지만, 각 회사가 이를 어떻게 만드는지는 서로 모른다.
일본의 무역보복으로 국내 부품·소재 산업을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공급망)이 얽혀있는 상황에서 모든 부품·소재를 국산화할 순 없다. 탄소섬유는 급성장하는 고부가산업이고 국방, 우주·항공 등 국가 안보와 직결돼 국산화 필요성이 있는 거다. 우리나라 산업구조는 소재부터 중간재, 부품, 완성품과 서비스가 연결된 연속된 형태다. 산업구조 전체의 가치를 올릴 수 있는 차별화된 소재에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
일본의 무역보복은 일본 입장에서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보나. 
일본이 삼성에 저렇게(핵심소재 수출제한) 하면 안된다. 기술력이 뛰어나고 깐깐한 클라이언트가 부품·소재 기업을 강하게 만든다. 항공기에 쓰이는 탄소섬유 중간재(프리프래그)를 도레이가 미국 보잉에 공급하는데, 안전과 직결되다 보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까다로운 품질 관리를 요구한다. 좋은 고객이 계속 피드백을 주니 도레이가 성장할 수 있었던 거다. 일본 반도체 소재 업체가 삼성전자라는 고객을 놓치면 장기적으로 경쟁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한국탄소융합기술원 연구원들이 국내 완성차 업체와 협업해 개발한 자동차 내장용 탄소섬유 부품을 들어보이고 있다. 전주=이동현 기자

한국탄소융합기술원 연구원들이 국내 완성차 업체와 협업해 개발한 자동차 내장용 탄소섬유 부품을 들어보이고 있다. 전주=이동현 기자

탄소융합기술원장으로 중점을 둔 건 어떤 부분인가. 
1990년대까지는 출연연구기관이 연구·개발을 주도했지만, 이후론 기업 역량이 커졌다. 이제 실용화 연구에 주력해야 한다. 출연연은 미래 기술을 개발하고, 우리 같은 전문연구기관은 기업의 애로기술을 해결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원장 부임 이후 기업이 사업 결정을 할 수 있는 사업성 검증에 주력했다.
탄소산업이 일본·독일 같은 앞선 국가와 견줘 경쟁력을 갖출 수 있나. 
탄소섬유뿐 아니라 탄소나노튜브·그래핀·카본블랙 등 탄소 소재 분야의 성장 가능성이 크다. 소재가 개발되면 다음 공급망으로 연결되면서 부가가치도 크다. 4차 산업혁명시대의 모빌리티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이기도 하다. 배터리 용량이 늘어나면서 전기차의 증가하면 탄소복합체로 중량을 줄이는 식인 거다. 외골격 로봇 역시 경량화가 핵심이다. 수요가 작더라도 우주·항공, 방위산업 등 국가가 필요로 하는 분야는 기술력을 확보해야 한다.
일본의 무역보복이 한국 부품·소재 산업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가슴은 뜨거워도 머리는 냉정하게 대처해야 한다. 기업에 오래 있다 보니 플랜(계획)을 세우기 전에 뭐가 문제였는지 리뷰하는 게 습관이 됐다. 탄소섬유만 해도 그렇다. 일본 도레이도 섬유회사다. 우리는 섬유를 섬유로만 봤지만, 일본은 일찍부터 첨단 화학소재로 접근했다. 그게 소재 강국이 된 비결인 거다. 일본과의 무역 전쟁 역시 뭐가 문제였는지 리뷰하고 치밀한 플랜을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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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이동현 기자 offram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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