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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피해에도 日대지진에 손길…김복동 할머니 27년 여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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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월 작고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를 기리는 다큐 '김복동' 한 장면. [사진 엣나인필름]

올해 1월 작고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를 기리는 다큐 '김복동' 한 장면. [사진 엣나인필름]

올해 1월 작고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의 생을 비춘 다큐멘터리 ‘김복동’이 개봉 6일째인 13일 3만7000관객을 넘어섰다. 상영관 300개 남짓 작은 영화로선 고무적인 기록이다. 그리고 오늘, 8월 14일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일본의 사죄를 받으려 김복동 할머니가 20년 넘게 매주 나섰던 주한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는 오늘로 1400회째를 맞았다.

위안부 피해자에서 인권운동가로 #평화운동 펼치다 올초 93세로 작고 #다큐 '김복동''낮은 목소리2' 등 #영상과 책으로 돌아보는 발자취

“앞으로 나 같은 피해자는 없어야죠. 여성들이 그런 봉변은 안 당해야죠.” 아흔셋에 작고하기까지 암 투병 중인 몸을 이끌고 1인 시위에도 나섰던 김복동. 그는 여성인권운동가이고, 평화활동가였다.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9명 중 남은 생존자는 20명으로 대부분이 80~90대 고령. 그저 피해자로 남지 않으려, 너무 늦지 않으려, 아픔을 부단히 길로 바꿨던 김복동의 발자취를 여러 다큐와 책으로 돌아봤다.

다큐 '김복동'에서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의 예전 사진. [사진 엣나인필름]

다큐 '김복동'에서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의 예전 사진. [사진 엣나인필름]

용서할 준비는 되어있다 ‘김복동’
감독 송원근 | 2019 | 다큐멘터리
“화면을 잘 보지 않았어요.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나는 용서할 준비 다 되어있다’는 말에 가슴 아팠죠.” 내레이션을 맡은 배우 한지민의 말대로다. 8일 개봉한 이 다큐는 김복동 할머니가 1992년 3월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공개한 후 올해 작고하기까지 일본에 사죄받으려 앞장서온 27년의 여정을 담았다.
그는 열네 살 소녀적 일제에 끌려갔다. 군복 만드는 공장인 줄 알았던 그곳에선 일요일이면 외출 나온 군인들이 아침 8시부터 저녁 5시까지 밀려들었다. 45년 해방된 줄도 모르고 간호노동에 동원돼 머리가 핑핑 돌도록 피를 뽑히기도 했다. 스물두 살, 8년 만에야 귀향한 후엔 부산 다대포에서 장사를 했다. 막냇동생, 조카까지 공부시키며 억척스레 살았지만 “나이가 먹어도 머리에 박혀 있어, 잊어버리지를 안 했다”고 했다. 더는 그런 아픔이 없도록, 세상에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생전 수요집회에 나선 김복동 할머니. 사회를 맡은 배우 권해효가 눈물짓고 있다. [사진 엣나인필름]

생전 수요집회에 나선 김복동 할머니. 사회를 맡은 배우 권해효가 눈물짓고 있다. [사진 엣나인필름]

UN 인권이사회, 미국 캘리포니아 글렌데일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 등 일본의 만행을 증언하기 위해 전 세계에 나서면서 정갈하고 한 점 흐트러짐 없이 강직했던 그다. 영화엔 깊게 묻은 슬픔, 쓸쓸함도 담겼다. “(피해 사실을) 신고하기 전 언니한테 의논하니 조카들도 있으니 제발 하지 말라고 했다. 언니는 그때부터 나에게 발길을 끊었다.” 생전의 증언. 그럼에도 “희망을 잡고 살자. 나는 희망을 잡고 산다” 입버릇처럼 말했던 그다.
아베 정권을 규탄했지만, 동일본 대지진 피해자 돕기 모금에 1호로 기부했고 2년 전엔 재일조선고등학교 학생들에 장학금을 전달하는 등 전 재산을 바쳤다. 그 깊은 속내를 다큐 ‘김복동’은 담담히 담아낸다.

지난해 출간된 증언 소설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 일본군 위안부 김복동 할머니의 회고를 바탕으로 김숨 작가가 소설 형태로 쓴 증언집이다. [사진 현대문학]

지난해 출간된 증언 소설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 일본군 위안부 김복동 할머니의 회고를 바탕으로 김숨 작가가 소설 형태로 쓴 증언집이다. [사진 현대문학]

아픈 고백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거야』
작가 김숨 | 2018 | 증언집
김복동 할머니의 생전 회고를 소설가 김숨이 듣고 써낸 증언집이다. 소설로 분류되지만, 그의 깊은 한숨까지 새겨낸 고백록에 가깝다. 다큐가 공식적인 영상 기록에 바탕 했다면, 더 내밀한 기억까지 담았달까. “다대포 앞바다에서 횟집 할 때 문 닫고 혼자 술 한잔 마시며 울고는 했어. 내가 살아온 세월이 기가 막혀서.” 열여섯에 일본군인에게 배운 담배를 물며 했던 혼잣말.
그는 딸만 여섯이던 딸 부잣집에서 가장 똑똑해 귀염받던 넷째 딸이었다. “내 나이가 스물두 살(이하 세는 나이)이라고 했어. 집 떠날 때 열다섯 살이었는데, 엄마가 나이를 알려주었어. 나도 세지 않던 내 나이를. 엄마는 죽은 자식의 나이도 세는 사람이니까. (중략) 복 받을 복(福). 아이 동(童).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주었어.”
과거 사연을 말도 못하고 함께했던 연인에 대한 회고는 읽는 것만으로 가슴 시리다. “37년을 내 옆에 그림자처럼 있었던 사람에게도 그 말을 안 했어, 못 했어. 끝까지, 사랑이라는 걸 모르고 살았어. 못 견디게 보고 싶은 게 뭐야? 죽을 만큼 보고 싶은 게. 사랑은 내게 그 냄새도 맡아본 적 없는 과일이야. 빛깔도 본 적 없는. 그래서 너는 사랑을 알아?”
역사적 비극의 피해자를 넘어, 한 여자, 한 사람의 마음이 아프게 다가오는 책이다. 다큐 ‘김복동’을 봤다면, 더더욱 여운이 길다.

변영주 감독의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2' 포스터. 흑백 단체사진 가운데 김복동 할머니가 다른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함께 서있다. [사진 미로비젼]

변영주 감독의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2' 포스터. 흑백 단체사진 가운데 김복동 할머니가 다른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함께 서있다. [사진 미로비젼]

만약 비극이 없었다면 ‘낮은 목소리2’
감독 변영주 | 1997 | 다큐멘터리
71분짜리 다큐엔 할머니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이 가득하다. 밭일하고 일상을 함께하며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들. 그러나, 귀 기울이면 오래 묵은 슬픔이 가만가만 들려온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속내다. 그 중엔 김복동 할머니도 있다. “옛날엔 우리나라에서는 여자들이 그런 데(일본군 위안부) 갔다카만 진짜, 참 수치스런 일이거든. 남한테 말을 못하고 있었는데 우리들이 입을 탁 맥쿠고 있으면 일본의 만행이 어떻게 된 줄 2세들은 모른단 말이다.”
이는 영화 ‘화차’로 이름난 변영주 감독이 22년 전 연출했던 다큐. 93년 제주도 매춘여성의 삶을 어루만진 다큐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을 촬영했던 그는, 당시 자신의 어머니가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한 매춘여성의 고백을 듣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눈을 돌렸다. 그렇게 95년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처음 다룬 1편 ‘낮은 목소리’는 그해 일본 야마가타국제다큐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주목받기도 했다. 2년 뒤 나온 이 2편은, 1편을 촬영하며 가까워진 할머니들의 ‘의뢰’로 시작됐다. 95년 12월 폐암 말기 판정을 받은 강덕경 할머니가 죽기 전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영화를 찍어달라고 요청하면서다.

다큐멘터리 '김복동'에서 김복동 할머니가 1992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밝히던 당시 영상 자료. [사진 엣나인필름]

다큐멘터리 '김복동'에서 김복동 할머니가 1992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밝히던 당시 영상 자료. [사진 엣나인필름]

할머니들의 육성 대화 중 김복동 할머니의 ‘소원’이 유독 귀에 꽂힌다. 만약 일제에 끌려가지 않았다면, 남들처럼 학교에 가 공부했다면, 뭐가 되고 싶으냐는 얘기 중에서다. “배가 불룩하이 아이 하나 낳아봤으면….” 위안부 피해 후유증으로 원치 않게 불임의 몸이 된 그의 오랜 바람이었다.

다르고 또 같은 아픔 ‘어폴로지’
감독 티파니 슝 | 2016 | 다큐멘터리
“역사가 ‘위안부’라 낙인찍는다 해도 우리에겐 그냥 할머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자막처럼, 한국‧중국‧필리핀의 백발성성한 할머니들이 당시 실상을 담담히 들려주는 다큐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끔찍한 폭행을 강조하는 기록이나 그날의 트라우마를, 자극적인 화제몰이의 도구로 삼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북미 최대 다큐멘터리 영화제 ‘핫독스 2016’,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 등에서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영화”(할리우드 리포터)로 소문이 났다.

중국계 티파니 슝 감독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다큐 '어폴로지' 중 한국의 김복동 할머니, 길원옥 할머니 모습. [사진 영화사 그램]

중국계 티파니 슝 감독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다큐 '어폴로지' 중 한국의 김복동 할머니, 길원옥 할머니 모습. [사진 영화사 그램]

촬영 당시 여든여덟이던 김복동 할머니는 영화의 중심이 된 동료 길원옥 할머니의 곁을 지키는 장면에 주로 등장하지만, “전시엔 위안부가 필요하다”는 일본 정치가의 망언에 누구보다 굳세게 맞서는 모습이다. 중국 심심산골에 사는 몸집 자그마한 차오 할머니, 고운 눈매에 늘 서글픈 물기가 서린 필리핀의 아델라 할머니, ‘나그네 설움’ ‘찔레꽃’ 등 평양 실향민의 아픔을 구성지게 부르는 길원옥 할머니 또 김복동 할머니까지. 저마다 다른, 같은 아픔을 지닌 할머니들의 얼굴이 보는 내내 가만히 겹쳐져간다.
제목 ‘어폴로지(Apology)’는 사과란 뜻.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사려깊은 시각을 제시하는 다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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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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