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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글로벌 줌업] 일제침략 수괴 조선총독·통감 10명…아베 지역구 출신이 4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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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8·15로 광복을 맞은 지 74년이 된다. 그런데도 일제 통치 35년의 상처는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현실 정치와 사람들의 생활에 영향을 끼친다. 일제가 1910년부터 1945년 해방까지 이 땅에서 조선인을 억압하면서 군국주의·제국주의 침략정책을 추진한 행동 책임자가 조선총독이다. 조선총독의 면면을 살펴보면 식민통치의 추악한 본질이 드러난다.

1905년 을사늑약 뒤 통감·총독 10명 #이토 제외, 전원 군인…총칼로 통치 #아베 지역구 조슈번 출신이 4명 차지 #조슈·사쓰마 출신, 메이지유신 주도 #군·관 요직 독점해 번벌 정치 펼쳐 #셋은 A급 전범으로 체포, 둘만 처벌 #사이토는 쿠데타 세력에 살해 당해 #간토 조선인 학살 책임자가 총독으로 #마지막 총독 아베, 아베 총리와 무관 #제국주의·군국주의 반인류 범죄 실행자

일본의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왼쪽)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과 함께 1905년 찍은 사진. 이토는 아베 지역구인 야마구치현이 있는 조슈번 출신이다.[위키피디아]

일본의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왼쪽)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과 함께 1905년 찍은 사진. 이토는 아베 지역구인 야마구치현이 있는 조슈번 출신이다.[위키피디아]

초대 조선 통감으로 침략의 설계사이던 이토 히로부미를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옥중 모습.[중앙포토]

초대 조선 통감으로 침략의 설계사이던 이토 히로부미를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옥중 모습.[중앙포토]

일왕 대리인으로 전권 행사한 침략 수괴  

일제는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한일협상조약)에 의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시작으로 세 명의 통감을 잇달아 파견해 이른바 ‘통감 정치’를 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사살했다.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한 무장 독립운동의 시작이다.
일제는 이어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으로 대한제국을 불법 병탄했다. 일제는 이 시기에 모두 10명의 통감과 총독을 조선에 보냈다. 이 가운데 데라우치는 통감을 거쳐 총독이 됐으며, 사이토는 총독을 두 차례 지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서양에서 삼권분립 원칙을 도입해 적용하고 있었으나, 조선총독은 본국의 국회나 내각에 책임지지 않고 아무런 간섭이나 견제 장치 없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 조선에서 군과 경찰, 행정기구는 물론 재판소까지 좌지우지하는 권한을 지녔다. 직권으로 법률을 제정하고 공무원을 임명하면서 모든 정무를 통괄했다. 오로지 일왕에게만 책임을 지면서  조선에서 일왕의 대리인 역할을 한 셈이다. 조선총독이 조선인을 억압하면서 군국주의와 제국주의 정책을 효율적으로 추구하기 위한 ‘침략 수괴’의 자리였음을 잘 보여준다.

러시아와 협상을 위해 1909년 10월 26일 하벌빈 역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 초대 조선통감의 모습. 왼쪽 모자를 벗고 있는 인물이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이뤄지기 전의 모습이다. [중앙포토]

러시아와 협상을 위해 1909년 10월 26일 하벌빈 역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 초대 조선통감의 모습. 왼쪽 모자를 벗고 있는 인물이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이뤄지기 전의 모습이다. [중앙포토]

군인이 총칼로 억압…3명은 A급 전범 지목

이 가운데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제외하고는 모두 군인 출신이며, 특히 총독을 지낸 8명은 전원이 군인 출신이다. 일제 통치의 군국주의적이고 폭압적인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영국이 제2차 세계대전 시기를 제외하고는 인도 총독을 행정가나 귀족에게 맡겼던 점과 대조적이다.

이 가운데 둘은 현역 군인 신분으로 군복을 입고 총독을 지냈다. 사이토 한 명을 빼고는 모두 육군 출신이다. 일본에 17명밖에 없는 육군원수 가운데 두 사람이 조선 총독을 지냈으며 나머지는 모두 대장이다. 이 가운데 3명은 태평양전쟁 A급 전범으로 지목됐다. 이 중 두 사람이 기소돼 각각 종신형과 20년형을 받았다. 이 중 하나는 감옥에서 병사했고, 다른 한 명은 말년에 가석방됐다. 유일한 해군 제독은 도쿄로 돌아갔다가 군국주의를 외치는 젊은 장교에게 살해됐다. 통감과 총독 10명 중 5명이 총리를 지냈으니 군과 정치가 한몸이 돼 침략 정책을 추구했던 20세기 초반 일본 군국주의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3대 조선 통감이자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 육군 원수인 현역 군인으로서 조선 총독을 맡아 무담통치로 조선인을 억압했다. 오늘날 아베 지역구인 야마구치현이 있는 조슈번 출신이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

3대 조선 통감이자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 육군 원수인 현역 군인으로서 조선 총독을 맡아 무담통치로 조선인을 억압했다. 오늘날 아베 지역구인 야마구치현이 있는 조슈번 출신이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

아베 지역구인 조슈 출신이 4명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년, 재임 1906년 3월~1909년 6월)는 메이지 유신의 본산인 죠슈(長州)번 출신이다. 현재 아베 신조(安培晋三) 일본 총리의 지역구인 야마구치(山口) 현이다. 1,5,7,10대 일본 총리를 지냈다.
2대 통감인 소네 아라스케(曽禰荒助, 1949~1910년, 재임 1909년 6월~1910년 5월)은 조슈번 출신의 군인으로 육군대장이었으며 외무대신을 지냈다. 소네가 병에 걸려 물러나면서 부임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1852~1919년, 통감 재임 1910년 5월~8월, 총독 재임 1910년 10월~1916년 10월)는 메이지 유신의 주역을 맡았던 조슈번 사무라이 집안 출신의 군인이다. 육군원수로 현역 군인 신분으로 3대 통감과 초대 총독을 지내다. 1902년 9월~1911년 8월에는 육군대신을 겸임했다. 무단통치의 원조로 통하는 데라우치는 일제 식민통치의 군국주의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총독을 지낸 뒤 귀국한 그는 현역 군인 신분으로 1916~18년 18대 일본 총리를 맡았다. 외무대신·재무대신을 겸한 권력자였다. 데라우치는 집에서 숨을 거뒀지만 대를 이어 군에 들어가 육군원수가 됐던 그의 아들을 그렇지 못했다. 일본 역사상 왕족을 제외하면 유일한 부자 원수다. 아들 데라우치 히사이치(寺内 寿一: 1879~1946)는 태평양전쟁 당시 남방사령관을 맡았다가 패전 뒤 영국 여왕의 인척인 루이스 마운트배튼 경에게 직접 군도를 바치며 항복했다. 일본군을 통틀어 육군 18명, 해군 13명만 있던 원수 중 유일하게 적에게 군도를 내밀며 항복했다. 그는 종전 전인 1945년 5월 미얀마 임팔 작전에서 일본군이 참패했다는 보고를 받고 충격을 받아 뇌경색 증세를 보였다. 1946년 말라야 반도의 포로수용소에서 병세 악화로 객사해 싱가포르에 묻혔다.

1945년 9월 2일 도쿄 만에 정박한 미 해군의 미주리 함상에서 태평양전쟁 일본 항복문서 조인식이 열리고 있다. [중앙포토]

1945년 9월 2일 도쿄 만에 정박한 미 해군의 미주리 함상에서 태평양전쟁 일본 항복문서 조인식이 열리고 있다. [중앙포토]

국제정세와 현실감각 떨어진 군국주의자들 

패전 직전 일본 본토에는 왕족을 제외하고  육군의 하타 슌로쿠(畑俊六,1879~1962), 스기야마 하지메(杉山元, 1880~1945), 해군의 나가노 오사미(永野修身,1880~1947) 등 3명의 원수가 생존해 있었다. 항복 하루 전 일왕은 이 셋을 불러 원수회의를 하며 의견을 물었더니 하타 슌로쿠를 제외한 두 사람은 본토결전이 가능하다고 했다. 당시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현실 감각이 얼마나 떨어졌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다. 본토 결전이 불가능하다고 솔직히 고백한 하타는 패전 뒤 A급 전범으로 기소돼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54년 가석방됐다. 후쿠시마 출신인 그는 1927년 난징 대학살이 발생했을 때 책임자인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 대장의 경질을 건의한 인물이다. 육군대신, 참모총장, 교육총감 등 일본 육군의 세 장관을 모두 역임한 스기야마는 후쿠오카 출신으로 당시 본토 결전을 위한 제1총군의 사령관이었다. 패전 직후 권총 자살했다. 고치 출신인 나가노는 일본 해군의 3요직으로 통하던 해군대신, 연합함대사령관, 군령부총장을 모두 경험한 유일한 인물이다. 진주만 기습 당시 군령부 총장으로 책임이 있어 패전 뒤 A급전범으로 재판을 받던 중 1947년 병사했다.

2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曲川好道: 1850~1924년)는 데라우치에 이어 1916년 현역 군인 신분으로 조선총독에 부임한 뒤 헌병을 앞세운 무단통치를 했다. 1919년 조선 민중이 3·1운동으로 피로써 저항하며 독립운동에 나서자 자리에서 밀려났다. 조슈번 사무라이의 아들로 태어나 보신전쟁·세이난전쟁 등 메이지 유신 이후 벌어진 내란에 중앙군(관군)으로 참전했다. 1912~15년 육군참모총장을 지냈고 15년 육군원수가 됐는데, 그 이듬해에 군복을 입고 조선총독에 부임했다.

일본 총리와 조선총독을 지낸 사이코 마코토가 해군 제독이던 1910년 경의 모습. [위키피디아]

일본 총리와 조선총독을 지낸 사이코 마코토가 해군 제독이던 1910년 경의 모습. [위키피디아]

사이토, 총독 퇴임 뒤 쿠데타군에 피살

3대와 5대 두 차례에 걸쳐 조선 총독 자리를 맡았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実: 1858~1936년)는 총독 가운데 첫 예비역 군인이며, 유일한 해군 출신이다. 해군 대장으로 다섯 차례나 해군대신을 지냈다. 3·1운동 뒤인 1919년 9월 총독에 부임하다가 서울역에서 강우규 의사(1955~1920년) 등의 폭탄 공격을 받았다. 강 의사는 이듬해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서울역 광장에 폭탄을 들고 있는 강 의사의 동상이 우뚝 서있다.
사이토는 제네바 군축협상에 전권대표로 참가하기 위해 1927년 자리에서 물러났다 1929년 총독에 재기용됐다. 1931년 다시 물러난 뒤 귀국해 1932~34년 총리를 지냈다. 총리에서 물러난 뒤 일왕 보좌관인 내대신을 지내다 군국화 강화를 요구하는 젊은 장교의 쿠데타(2·26사건) 당시 도쿄의 자택에서 살해됐다. 47군데에서 총상, 10여 군데에 칼로 베이거나 찔린 상처가 발견됐다.

종전 뒤 참의원에 선출된 전 조선총독

우가키 가쓰시게(宇垣一成: 1868~1956년)는 현역 군인이던 1927년 임시 총독을 지낸 뒤 예비역 대장 신분이던 1931~36년 총독을 맡았다. 1925년 육군대신으로 있으면서 군축을 주도하는 바람에 동료들의 미움을 샀다. 1937년 조각을 맡아 총리가 될 뻔 했으나 육군이 반발하면서 포기했다. 대신 1938년 외무대신 겸 척식대신(대만·남만주 식민과 이권 담당)을 맡았다. 1930~40년대 내각 해산 때마다 총리 물망에 올랐으나 결국 자리에 오르지 못해 ‘정계의 혹성(태양(총리)의 주변을 도는 별이라는 의미)’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종전 뒤 공직에서 추방됐다가 1952년 제한이 풀리자 이듬해 참의원에 출마해 당선했다. 조선총독 출신으로 종전 뒤 선출직 공직은 맡은 유일한 인물이다. 일본이 과거 침략의 역사와 제대로 결별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간토 조선인 대학살 책임자가 조선총독으로

일본 도쿄 스미다(墨田)구 도립 요코아미초(橫網町) 공원에 있는 간토(關東) 대지진 당시 학살된 조선인 추도비.[연합뉴스]

일본 도쿄 스미다(墨田)구 도립 요코아미초(橫網町) 공원에 있는 간토(關東) 대지진 당시 학살된 조선인 추도비.[연합뉴스]

5대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 1864~1944년)는 1927~29년 총독을 맡았다. 1923년 9월 간토(關東) 대지진 당시 계엄사령관을 맡았다. 당시 혼란을 틈타 일본 군경과 민간인 자경단원들이 조선인을 콕 집어 6000~6600명을 무차별 살해한 광란의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이 벌어졌다. 일본인의 인종청소이자 집단증오 범죄이며 파시즘적인 광기의 학살극이다. 평범한 얼굴의 일본인이 아무렇지 않게 조선인 수천 명과 중국인 600여 명을 집단 학살했다. 단지 조선인이고 중국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1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대지진이 발생해 민심이 흉흉한 가운데 ‘조선인이 방화를 하고 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헛소문이 돌았다. 일본 내무성이 경찰에 내려 보낸 문서에 ‘조선인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내용이 포함된 게 발단인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인은 죽창과 칼, 몽둥이를 들고 조선인을 보는대로 무차별 학살했다. 행정당국과 군대까지 가담했다. 학살은 우에노 공원이나 이케부쿠로 등 도쿄 중심부에서 주변 지역까지 광범위하게 발생했다. 인구 1300만 명의 초현대도시가 90여 년 전에는 1990년대 르완다나 유고슬라비아처럼 ‘인종 청소’의 잔혹한 살육극의 현장이었다. 지금도 백주대낮에 버젓이 ‘조선인을 몰살하라’라고 외치는 혐한(嫌韓) 시위가 벌어지는 도시이기도 하다. 도쿄는 민족차별 또는 인종주의에서 비롯한 유언비어에 선동돼 평범한 사람이 학살에 손을 담근 과거를 갖고 있는 도시다.
야마나시는 계엄사령관으로서 이 잔혹한 인종 학살을 방관하거나 막지 못한 책임이 있다. 그런데도 육군대신까지 지내다 1925년 대장으로 예비역에 편입됐다. 1927년 조선총독에 임명됐으나 경성에 지점을 낸 곡물업체가 측근을 통해 야마나시에게 당시로는 거액인 5만엔을 뇌물로 준 부패 사건으로 해임됐다. 당시 재판에서 미곡업체 대표와 야마나시의 측근은 유죄로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지만 야마나시는 무죄를 선고 받은 황당한 판결이 나왔다. ‘깃털 유죄, 몸통 무죄’의 판결이다.

일본 전범을 단죄한 극동국제군사재판의 모습. 7명이 사형을 선고 받고 처형됐다. [위키피디아]

일본 전범을 단죄한 극동국제군사재판의 모습. 7명이 사형을 선고 받고 처형됐다. [위키피디아]

“국방이 정치 우선” 미나미, 조선인 놀림감으로  

8대 미나미 지로 (南次郎: 1874~1955년)는 육군 중장 시절 조선군(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을 지냈다. 육군대신을 맡던 1931년 9월 18일 만선철로를 폭파하는 자작극을 벌이고 이를 빌미로 만주 지역을 점령한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그 뒤 관동군(만주에 주둔한 일본군) 사령관 겸 만주국 대사를 지냈다. 1936년 육군대장으로 예비역에 편입된 지 불과 몇 달 뒤에 조선총독으로 부임해 1942년까지 자리를 지켰다. “국방이 정치에 우선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 인물로 대표적인 군국주의자로 통한다. 종전 뒤 만주사변 발발의 책임을 물어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종신금고형에 처해졌다. 1954년 가석방됐다가 이듬해 숨졌다. 총독 재임 중 조선인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했는데 일부 조선인은 미나미 총독의 성을 따서 미나미 다로(南太浪)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미나미 총독의 이름인 지로는 차남이란 뜻이며 다로는 장남을 의미하므로 이는 ‘미나미 총독의 형님’이라는 뜻이 된다. 조선인들은 미나미의 내선일체 정책에 이처럼 지독한 풍자로 저항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청사로 쓰이다 해방 뒤 중앙청으로 사용되던 당시의 모습. 1926년 조선인에게 징수한 세금으로 건립돼 김영삼 대통령 시절인 1995년 철거됐다. [중앙포토]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청사로 쓰이다 해방 뒤 중앙청으로 사용되던 당시의 모습. 1926년 조선인에게 징수한 세금으로 건립돼 김영삼 대통령 시절인 1995년 철거됐다. [중앙포토]

고이소, A급 전범으로 종신형 복역 중 사망

9대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1880~1950년)은 관동군 참모장과 조선군사령관을 지낸 예비역 육군대장이다. 1942~44년 총독을 지냈으며, 물러난 뒤 1944년 7월부터 1945년 4월까지 총리대신을 맡았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전범으로 종신형을 선고 받고 도쿄 스가모 교도소에서 복역하다 1950년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스가모 교도소는 종전 전 사상범이 주로 수용됐던 곳이다.
전설의 소련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가 1944년 11월 7일 사형 당한 곳이기도 하다. 조르게는 국제공산주의 조직인 코민테른 요원으로 독일 신문기자로 신분을 위장해 일본에서 소련을 위한 스파이 활동을 하다 체포돼 처형됐다. 조르게는 일본 주재 독일 무관으로부터 1941년 6월 22일 시작된 독일군의 소련 침공 정보를 날짜까지 정확하게 입수해 소련에 전했으나 소련 독재자 요시프 스탈린이 무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후 도조 히데키를 비롯해 사형 선고를 받은 A급 전범 7명이 처형됐다. 이들을 비롯한 A급 전범 13명은 1978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됐다. 일본의 침략을 경험한 아시아 국가들이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일본 정치인들이 참배하는 것에 반대하고 항의하는 이유다. 고이소는 감옥에서 죽었다는 이유로 전사자가 아닌데도 야스쿠니에 합사됐다. 야스쿠니에 합사된 유일한 조선총독 출신이다.

일제의 마지막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 아베 신조 총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한자도 다르다. [중앙포토]

일제의 마지막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 아베 신조 총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한자도 다르다. [중앙포토]

마지막 아베 총독, 전범재판 피해

마지막 조선총독은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1875~1953년)다. 인터넷에서 아베신조(安部晋三) 총리의 할아버지라고 주장하는 내용이 나도는데 사실이 아니다. 한자부터 다르고 출신지도 아베 총리의 야마구치가 아니라 이시카와(石川)현 가나자와(金澤)시다. 가나자와는 윤봉길 의사가 처형돼 묻힌 곳으로 위령비가 서있다.
아베 총독은 1944년 7월 부임해 1945년 9월 서울에 진주한 연합군에 의해 쫓겨났다. 1933년 육군대장에 올랐으며 1936년 예편했다. 1939년 8월부터 40년 1월까지 36대 일본 총리를 지냈으나 독일과 동맹을 맺고 미국과 영국에 맞선다는 육군 측의 방침에 반대해 내각 총사퇴를 했다. ‘처세의 장군’으로 통했던 그는 전후 연합군에 체포돼 A급 전범으로 극동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됐지만 재판 시작 직후 피고에서 제외됐다. 어떤 처세가 통한 것일까.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할 때 사용한 것과 같은 형의 브라우닝 권총. 최재형 기념관에 있다. 백성호 기자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할 때 사용한 것과 같은 형의 브라우닝 권총. 최재형 기념관에 있다. 백성호 기자

독립운동은 반인류적 범죄에 대한 저항

아베가 총독 취임 직후 항공대에 근무하던 아들이 영국 군함을 공격하다 충돌해 전사했다. 일본 패망 직후 할복 자살을 시도했지만 미수로 끝나 1945년 9월 9일 부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항복 조인식장에 나와 항복 조인 문서에 서명했다. 추하기 이를 데 없는 일제 조선총독의 마지막 모습이다. 일제 조선침략의 행동대장을 맡았던 역대 통감과 총독의 모습을 살펴보면 이처럼 제국주의·제국주의 추악한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국의 독립투쟁은 이러한 반인륜적이고 반인류적인 범죄에 맞서 싸운 세계사적인 전쟁이었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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