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한일협정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 부장과 오히라 일본외상의 회담 모습. [연합뉴스]](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908/14/6d18d3cc-270f-4f3f-84b1-ed9acd05dbb6.jpg)
1962년 한일협정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 부장과 오히라 일본외상의 회담 모습. [연합뉴스]
일본 정부는 지난달 30일 한일협정 협상 과정에서 한국 정부에 개인 보상을 제안했지만 한국 정부가 “국내 지불은 국내 조치로써 필요한 범위에서 한다”고 답변했다는 내용을 공개했다. 그러면서 개인에 대한 책임은 한국 정부에 있다고 재차 주장했다.
일본 측이 이날 제시한 협상 내용은 1961년 5월 10일 일본 외무성 회의실에서 열린 제5차 한일회담 예비회담을 가리킨다.
당시 회담에는 장면 정부의 이상덕 대표를 비롯해 7명이 참석했고, 일본 측 참석자는 오시다 대표 등 11명이었다. 이 자리에서는 예비회담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강제징용에 대한 구체적 보상 문제가 협상 테이블에 올랐다. 58년간 근본적 해결이 되지 않은 채 앙금을 남긴 강제징용 갈등의 시작이기도 했다.
당시 양국 대표가 나눈 대화록을 통해 당시 한ㆍ일 양측의 주장과 이에 대한 근거를 전문가에게 들었다. 공개하는 대화록은 일제강제동원 희생자 유족단체의 요구에 따라 한국 외교부가 2005년 공개한 문서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5년 4월 27일 청와대에서 한일수교 회담 문서공개 대책 민관 공동위원회 민간위원들을 초청, 오찬에 앞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908/14/1f21da25-61de-4664-866f-ae0ec165769e.jpg)
노무현 대통령이 2005년 4월 27일 청와대에서 한일수교 회담 문서공개 대책 민관 공동위원회 민간위원들을 초청, 오찬에 앞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한일협정 관련 문서를 확인해보면 당시에도 보상 주체를 국가로 할 것인지, 개인으로 할 것인지를 두고 한일 양국은 치열하게 맞붙었다.
일본 측은 피해자 개인에게 보상하겠다고 주장한 반면 한국 측은 전체 보상금을 한국 정부에 지급해달라고 요구했다. 한국 정부는 개인에 대한 보상은 한국 정부가 “국내조치로 처리할 사안”이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당시 한일 양국 협상 대표가 나눈 대화록은 다음과 같다.
▶한국 측=피징용자 보상금으로 들어가자. 우리들은 새로운 기초 하에 상당한 보상을 요구한다.
▶일본 측=새로운 기초란 어떤 것인가.
▶한국 측=다른 국민을 강제적으로 동원함으로써 입힌 피징용자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대한 보상을 의미한다.
▶일본 측=여러 가지 문제가 있으나 징용될 때에는 일단 일본인으로서 징용된 것이므로 당시 원호 같은 것 즉 일본인에게 지금 한 것과 같은 원호를 요구하는 것인가
▶한국 측=우리들은 새로운 입장에서 요구하고 있다. 그 당시 일본인으로서 징용되었다고 하지만 우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본 사람은 일본을 위해서 일하였겠지만 우리들은 강제적으로 동원됐다. 이 점 사고방식을 고쳐주기 바란다.
![연합군이 진수하면서 무장해제된 일본패잔병들이 달구지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중앙포토]](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908/14/b69f842d-0e43-448b-bd49-011a020e8e23.jpg)
연합군이 진수하면서 무장해제된 일본패잔병들이 달구지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중앙포토]
갈등의 또 다른 불씨,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1951년 9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을 포함한 48개국이 강화 회의 후 체결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태평양전쟁 후 전후 처리를 정리하는 기준이 됐다. 비록 한국은 이 조약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질서의 준거로 작용했기 때문에 향후 한국과 일본의 배상금 협정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국 측엔 불리한 내용이 많아 협상에 나선 한국 정부는 항상 발목이 잡힐 수밖에 없었다. 또한 국제조약상 식민지배에 대해 배상을 규정하는 법이 없다는 점도 한국 정부로선 협상 과정에서 운신의 폭을 좁게 했다.
일단 한국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승전국으로서도 대우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국가가 아니라 분리된 지역으로 규정됐다. 즉, 1910년 한일병합은 일본의 불법적 강점이 아니라 조선과 일본 간에 체결된 합병조약으로 국제법적으로 정당성을 갖췄지만 패전으로 인해 그 권리가 포기됐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승만 정부 때인 1951년부터 시작된 청구협상은 한일 간 큰 인식차를 갖고 시작하게 됐다.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따라 전시에 동원된 조선인은 당시 자국인(일본인)으로서 동원된 것인만큼 배상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오랫동안 고수했다.
또 이 조약은 각국에 남겨진 “일본 재산을 압류하고 유지하고 청산하거나 그 외 처분할 권리는 해당 연합군의 법률에 따라 행사된다”고 명시했다. 또한 1907년 제정된 헤이그 육전법규 46조에 따르면 패전국의 공공재산은 압류할 수 있지만 사유재산권은 침해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이에 따라 일본 측은 당시 60억 달러로 추산되는 한국 내 일본인 재산에 대해 배상해줄 것을 요구했다. 재산을 압류당한 일본인들에게 보상을 해줘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정부는 남겨진 일본인 산업시설은 '적산기업'이라고 부르며 민간에 불하한데다, 이에 대한 배상을 해줄 여력도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1965년 한일 협정에서는 일본도 이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동시에 한국도 청구권을 해결된 것으로 확인한다는 내용의 조항을 넣었다.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일각에선 한국이 참여하지 않은만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기준으로 삼을 수 없다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에서 자의든 타의든 조선인이 일본군의 일원으로 참여한데다 해방도 미국 등 연합국의 승전이 결정적이었던만큼 독자적 목소리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반론 또한 만만치 않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오른쪽 두번째)가 6일 오전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서 열린 원폭 희생자 위령식에서 묵념하고 있다.[연합뉴스]](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908/14/066dc319-d3c7-4387-af40-bd00e4a17a7a.jpg)
아베 신조 일본 총리(오른쪽 두번째)가 6일 오전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서 열린 원폭 희생자 위령식에서 묵념하고 있다.[연합뉴스]
▶일본 측=피해자 개인에 대하여 보상해달라는 말인가
▶한국 측=우리는 나라로서 청구한다. 개인에 대하여는 국내에서 조치하겠다.
▶일본 측=우리 측에서도 이런 사람들 그리고 그 유족에 대하여 상당 정도 원호 조치를 하고 있으며, 한국인 피해자에 대해서도 가능한 한 조치하고자 하는데 한국 측에서 구체적으로 조사할 용의가 있는가
▶한국 측=물론 그런 것도 생각할 수 있으나 이 회의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본다.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우리 국내에서 조치할 성질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 측=이 소 위원회는 사실관계와 법률관계를 확인하는 데 있다. 한국이 새로운 기초 위에서 고려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개인 베이스가 아니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원래 정식 수속을 밟았더라면 지불할 수 있었다고 본다. 우리 측으로서는 현재라도 미불금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는 것은 전 회담에서도 언급했다. 요컨대 우리 입장은 미불금이 본인 손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다.
▶한국 측=우리는 국내조치로서 우리 손으로 지급하겠다. 일본 측에서 지급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일본 측=징용자 중에는 부상자도 있고, 사망자도 있으며 또 부상자 중에도 그 원인이라든가 정도가 있는데 이런 사실을 전연 모르고 덮어놓고 돈을 지불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한일 간에 국민적인 감정이 있다면 유화하기 위해서는 개인 베이스로 지불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한국 측=보상금 지불 방법 문제인데 우리는 우리의 국내문제로서 조치할 생각이며 이 문제는 인원수라든가 금액의 문제가 있으나 여하튼 그 지불은 우리 정부 손으로 하겠다.
▶일본 측=인원수, 금액, 피해 정도는 구체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한국 측에서도 그런 의미에서 청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개인 권리로서도 구체적인 신고를 받아서 지불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는가
![1965년 한일협정 조인식 당일 반대 데모에 나선 대학생들. [연합뉴스]](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908/14/bb5ed9a3-b7cd-4de5-a6c7-5e35e3dcdd61.jpg)
1965년 한일협정 조인식 당일 반대 데모에 나선 대학생들. [연합뉴스]
이러한 대화 내용을 보면 일본의 집요한 개인 보상 의지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한국 정부의 이런 태도가 결국 현재의 갈등의 근원을 만들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①한국은 왜 피해자 개인이 아닌 정부에 지불하라고 요구했을까
전문가들은 당시 한국 정부가 가진 딜레마와 시대적 한계가 작용했다고 본다.
이원덕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는 “지금의 기준으로 재단하기 어렵다. 당시엔 지금 같은 개인의 인권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었다. 실제로 당시에 징용 피해자들이 보상을 요구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이 교수는 “이승만ㆍ장면ㆍ박정희 정부 모두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일괄타결 방식으로 정부가 받아 이를 경제개발 등의 자금으로 쓰려고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정부 관계자는 ”당시 정부의 행정력이나 혼란했던 상황을 참작하면 피해자들을 체계적으로 집계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②일본은 왜 개인 보상을 선호했을까
일본 정부로서는 한일협정을 통해 배상 문제를 확실하게 정리해야 한다는 입장이 강했다. 이 때문에 한국 정부가 다른 용도로 전용할 가능성이 있는 정부 차원 보상보다는 개인 보상을 선호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또 하나 일본 측 입장에서 협상에 유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원덕 교수는 “당시 일본 정부는 징용자 명부를 확보하고 있었던 반면 한국 정부는 갖고 있지 않았다”며 “일본은 일괄 타결보다 개인 보상으로 하는 것이 협상력을 높이고 배상금액도 낮출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외교부가 공개한 1961년 5월 10일 제5차 한일회담 예비회담 회의록의 일부

1961년 5월 10일 제5차 한일회담 예비회담 회의록

1961년 5월 10일 제5차 한일회담 예비회담 회의록

1961년 5월 10일 제5차 한일회담 예비회담 회의록

1961년 5월 10일 제5차 한일회담 예비회담 회의록

1961년 5월 10일 제5차 한일회담 예비회담 회의록

1961년 5월 10일 제5차 한일회담 예비회담 회의록
한편 회의록에는 일본 측이 강제 동원에 대한 사실을 인정하고 유감을 나타내는 대목도 있다.
▶한국 측=보상금에 있어서는 일본인 사망자, 부상자에 대해서도 상당히 보상하고 있는데 더욱이 다른 국민을 강제로 징용하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통을 준 데 대하여 상당한 보상을 하여야 하지 않는가…일본에서는 어떻게 동원됐는지 모르지만 한국에서는 길가는 사람을 붙들어 트럭에 실어서 탄광에 보냈다. ‘카이로선언’이나 ‘포츠담선언’에도 표명되어 있는 것과 같이 일본은 한국인을 노예취급 했는데 그 당시 (징용 조선인이) 일본인이었다는 것은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다.
▶일본 측=대단히 딱한 일이었으며 의당 원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나 그 가족이 (일본) 외지에 있으면 원호할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의 명부를 명확히 하면 빨리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데 명확히 할 수 없는가.
▶한국 측=약간의 자료가 있으나 불완전하다.
▶일본 측=우리도 그 점을 정리시키고 있으며 불완전하지만 상호 대조하면 명확히 된다고 생각한다. 일본 원호법을 개인 베이스로 지불하면 확실해진다고 생각한다. 일본 측으로선 책임을 느끼며 피해를 받은 사람에 대하여 하등 조치 못 하여 미안하게 생각하며 특히 부상자, 행방불명자, 사망자나 그 가족에 대하여 조치 못 한데 대하여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다.
![일본 공사현장에서 토목 노동을 하는 강제징용 조선인들.[해외교포문제연구소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908/14/f7088dd0-b52f-4e84-bc4f-8c272be5f4ef.jpg)
일본 공사현장에서 토목 노동을 하는 강제징용 조선인들.[해외교포문제연구소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앞서도 말했듯이 이날 협상은 시작에 불과했다.
양측의 협상은 결론이 나지 않았고, 1965년 한일협정에 양국 대표가 서명할 때까지도 뜨거운 감자였다. 1963년 3월 5일 쓰인 ‘한국의 대일청구권 8개 항목에 관한 양측 입장 대비표’ 문서에 따르면 당시 박정희 정부는 총 12억 2,000만 달러를 요구하면서 징병ㆍ징용 피해자 103만 2684명이라며 총 3억 6400만 달러의 피해보상금을 일본에 요구하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아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결국 1965년 타결된 한일협정에선 청구권 협정의 액수가 2억 달러의 차관과 3억 달러(무상)로 대폭 깎였다.
배상과 보상의 차이
보상(補償)은 국가 또는 공공 단체가 적법한 행위에 의하여 국민이나 주민에게 가한 재산상의 손해나 손실을 보충하는 대가인 반면에 배상(賠償)은 불법적인 행위 등으로 남의 권리를 침해한 사람이 그 손해를 물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전후 배상 과정에서 각국은 이같은 용어 차이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으며 한·일 협정과정에서도 양 측은 '보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지금 한일 양국이 바라보는 1965년 한일협정의 청구권 문제에 대한 시각은 180도 다르다.
“한국, 일본과 법인을 포함한 국민의 재산 등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것을 확인한다”라고 명시된 한일청구권 협정 제2조 1항에 대한 해석이 갈등의 근원이다. 일본은 국가는 물론 개인에 대한 보상이 해결됐다고 주장하는 반면 한국은 개인에 대해선 해결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