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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션샤인' 유진 초이보다 극적인 삶, 독립운동가 최재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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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이었을까. 최재형은 1858년 8월 15일에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로 불리었던 그는 끝내 자신의 생일과 겹치는 광복일을 보진 못했다. 최재형은 1920년 4월 7일 일본군에 체포돼 연해주 신한촌의 벌판에서 총살됐다. 시신도 찾지 못했고, 묘지도 없다. 순국 100년이 되도록 그의 이름 석 자는 국내에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다.

순국 100년만에 기념비 제막식 #안중근과 함께 국내 진공 작전 #'미스터 션샤인'보다 극적인 삶 #

12일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 ‘최재형 기념비 제막식’이 열렸다. 기념비가 세워진 곳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기 전, 안중근 의사가 사격연습을 했던 최재형의 자택(현 최재형기념관)이 있던 장소다.

12일 러시아 우수리스크 최재형 기념관에서 '최재형 기념비 제막식'이 열렸다. 참가자들이 최재형 선생 흉상을 제막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안민석 국회문화체육관광위원장, 소강석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 최재형 선생의 손자 최 발렌틴, 최재형기념사업회 문영숙 이사장.

12일 러시아 우수리스크 최재형 기념관에서 '최재형 기념비 제막식'이 열렸다. 참가자들이 최재형 선생 흉상을 제막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안민석 국회문화체육관광위원장, 소강석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 최재형 선생의 손자 최 발렌틴, 최재형기념사업회 문영숙 이사장.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 소강석 목사는 자작시와 함께 기념사를 읊으며 “오늘 기념비를 세움으로써 최재형 선생의 애국애족 정신과 삶의 궤적이 민족의 가슴에 별처럼 빛나길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안민석 국회문화체육관광위원장은 “100년 전에는 총칼로 싸우는 전쟁이었지만, 지금 한일 간에는 총칼 없는 경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며 “ 오늘 부활한 최재형 선생의 항일 정신으로 한일 경제전쟁에서도 이길 것을 다짐한다”고 말했다. 고려인자치회를 대표해 참석한 이 블라디미르 우수리스크 시의원은 “최재형 기념관은 독립운동의 대부를 기리는 유일한 장소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고려인을 잊지 않고 많은 기여를 하는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최재형의 손자 최 발렌틴(82)도 제막식에 참석했다. 그는 "스탈린 치하에서 아버지로부터는 할아버지 최재형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최재형은 노비의 자식이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남자 주인공 유진 초이의 실제 모델로 거론되는 최재형은 드라마보다 훨씬 더 극적인 삶을 살았다.

최재형 기념관에 전시된 사진. 2012년만 해도 최재형이 살았던 저택에는 러시아인이 살고 있어 내부를 볼 수도 없었다고 한다.

최재형 기념관에 전시된 사진. 2012년만 해도 최재형이 살았던 저택에는 러시아인이 살고 있어 내부를 볼 수도 없었다고 한다.

1869년 함경도 일대에 홍수가 나자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을 때 “두만강을 건너면 비옥한 땅이 많다”는 얘기를 듣고 최재형 일가는 국경을 넘어 러시아 연해주로 갔다. 당시 연해주의 한인들은 자녀들을 러시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국내에서 노비의 자식으로 차별받던 최재형은 오히려 러시아 학교를 택했다. 그는 러시아 학교에 입학한 첫 한국인이었다.

가난했던 최재형은 한겨울에 양말이나 신발도 없이 학교에 다녔다. 맨발로 눈 위를 걷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면 들고 다니던 짚단을 땅 위에 펼쳤다고 한다. 그리고 그 위에 올라서서 잠시 언 발을 녹였다. 최재형은 학교에서 4년 동안 러시아어를 공부했다. 12세 때는 “밥만 축낸다”는 형수의 구박을 견디지 못해 가출했다. 포시에트 항구의 부두에 쓰러져 잠든 그를 러시아 선장 부부가 거두어 친아들처럼 키웠다. 인텔리였던 선장의 아내는 최재형에게 러시아어와 유럽 문화를 가르쳤다. 나중에 그는 중국어도 익혔다. 선장을 따라 6년 동안 배를 타고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세계 곳곳을 항해했다.

일제강점기 때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간 한인의 집.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때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간 한인의 집.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가 신한촌을 꾸려서 살았던 한인들. 최재형은 핍박받던 이들을 위해서 살았다.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가 신한촌을 꾸려서 살았던 한인들. 최재형은 핍박받던 이들을 위해서 살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한 최재형은 러시아 군대에 물건을 납품하며 연해주 최고의 갑부로 성장했다. 한인촌의 권업회장을 맡으며 그는 연해주 한인 민족운동과 의병활동을 지원했다. 최재형의 애국심과 자금력은 대단했다. 나중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될 정도였다.

1908년에는 의병 유격대인 동의회를 조직해 안중근과 함께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다. 당시 러시아 국경수비대 비밀 첩보보고서에는 ‘최재형이 무기와 의복 구입비 1만 루블을 지원했다’는 기록이 있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의 배후에도 최재형이 있었다. 이토를 사살할 때 사용한 브라우닝 권총을 구해준 사람도 최재형이었다.

최재형의 딸 올가는 생전에 남긴 회고록에서 “안응칠(안중근)이란 사람이 세 개의 인물 그림을 우리집 벽에 붙여 놓고 사격 연습을 했다”고 밝혔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 사용된 체코와 소련제 무기 구입에도 최재형이 크게 힘을 썼다. 연해주 일대 독립운동에서 최재형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안중근이 “집집이 최재형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고 회상할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연해주 일대의 한인을 학살하던 4월 참변 때 최재형은 결국 죽임을 당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할 때 권총을 제공하고, 자금을 대줬던 인물도 최재형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할 때 권총을 제공하고, 자금을 대줬던 인물도 최재형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할 때 사용했던 것과 같은 모델인 브라우닝 권총. 우수리스크의 최재형 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할 때 사용했던 것과 같은 모델인 브라우닝 권총. 우수리스크의 최재형 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일본 군대가 들이닥칠 것을 알고 가족은 최재형에게 “빨리 떠나라”고 재촉했다. 그러자 최재형은 “내가 떠나면 일본인들은 어머니와 너희 모두를 체포하고 때리고, 고문하고, 나를 배반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나는 이미 늙었으며 많이 살았다. 나는 죽을 수 있다”며 집을 떠나지 않았다. 이튿날 새벽, 일본군에 체포된 최재형은 그날로 총살됐다. 당시 62세였다. 최재형기념사업회 문영숙 이사장은 “연해주 독립운동은 최재형을 빼고선 말할 수 없다. 그는 연해주 독립운동의 심장이었다”고 말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진군해 들어오는 일본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진군해 들어오는 일본군.

연해주 4월 참변 때 일본군이 노획한 독립군의 무기들.

연해주 4월 참변 때 일본군이 노획한 독립군의 무기들.

그런데도 ‘최재형’이란 이름은 오랜 세월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다. 스탈린 치하에서 최재형의 자녀는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거부의 자식이란 이유로 '인민의 적'으로 몰린 채 딸 올가는 10년 형을 선고 받고 7년간 복역했다. 아들도 2년 가까이 감옥에 수감됐다. 최재형의 4대손인 초이 일리야 세르계예비치(17)는 현재 모스크바에 거주하고 있으며,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9월 18일 개강하는 인천대 어학원에 입학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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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은 최재형 순국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국땅에서 나라 잃은 한인의 서러움에 '페치카(난로)'처럼 온기를 주고, 연해주 독립운동의 불꽃을 지폈던 ‘페치카 최’를 기리는 추모행사가 이어질 전망이다.

최재형 기념비 제막식에서 참석자들이 최재형 순국 100년만에 기념 흉상을 건 것에 대해 축하를 하고 있다.

최재형 기념비 제막식에서 참석자들이 최재형 순국 100년만에 기념 흉상을 건 것에 대해 축하를 하고 있다.

우수리스크(러시아)=글ㆍ사진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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