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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하다] 고유정 얼굴 갖고도 싸웠다···한국, 일만 터지면 '젠더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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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갈등은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커지고 있다. 지난해 10월 홍대 누드모델 몰카 사건을 놓고 벌어진 당당위 시위(왼쪽)와, 혜화역 시위(오른쪽) 모습. [연합뉴스, 중앙포토]

젠더 갈등은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커지고 있다. 지난해 10월 홍대 누드모델 몰카 사건을 놓고 벌어진 당당위 시위(왼쪽)와, 혜화역 시위(오른쪽) 모습. [연합뉴스, 중앙포토]

최근 ‘리얼돌(real doll)’을 놓고 남녀 간 충돌이 벌어지고 있다. ‘리얼돌’은 여성의 신체를 적나라하게 재현한 성인용 인형인데, 지난달 8일 리얼돌의 수입·판매를 금지해달라는 청와대 청원이 올라왔다. 리얼돌이 남성의 성욕을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 쓰이기 때문에 여성의 존엄성을 훼손한다는 게 청원의 취지다. 여성 커뮤니티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이 청원은 한 달간 26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동의를 얻었다. 하지만 남성들 사이에선 “이젠 여성계에서 남성의 성기구 사용까지 막느냐”는 반발이 터져 나왔다.

대한민국 휩쓰는 ‘젠더 전쟁’ <상> #갈등 이슈 중 남녀 충돌 74% 1위 #이념 15% 세대 5.5%보다 압도적 #남성은 취업난, 여성은 범죄공포 #“2030 중심으로 극단혐오로 변질”

국내에서 리얼돌 유통에 법적인 제약은 없다. 앞서 6월 법원은 “사적이고 은밀한 영역에는 국가가 되도록 개입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실현하는 길”이라며 리얼돌 수입을 허용했다. 하지만 온라인에서 리얼돌을 둘러싼 젠더갈등은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격렬하다. 상대 성(性)에 대한 혐오가 난무한다. 여성들이 “폭력ㆍ강간 문화에 익숙한 한남충(한국 남성을 벌레에 비유한 은어)이 리얼돌을 옹호한다”고 공격하자, 남성들은 “꼴페미(페미니스트를 비하하는 은어)들이 여성의 가치가 떨어질까 봐 인형을 질투한다”고 반격했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젠더갈등의 단면이다.

온라인 갈등 10건 중 7건은 ‘젠더갈등’

‘젠더갈등’빅데이터 분석.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젠더갈등’빅데이터 분석.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실제로 최근 온라인상에서 표출되는 여러 사회적 갈등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은 젠더갈등인 것으로 나타났다. ‘탐사하다 by 중앙일보’가 빅데이터 분석업체인 타파크로스와 온라인상의 갈등 관련 데이터 5401만 167건(2016년~2019년 6월)을 분석한 결과 갈등 이슈 중 젠더갈등 관련 내용이 3974만 8138건(73.6%)으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념·정치갈등(15.4%)이나 세대갈등(5.5%), 직장 내 갈등(5.5%) 등을 크게 웃도는 수치다.

젠더갈등의 비중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2016년 온라인상에서 나타난 갈등 약 1505만 건 중 젠더갈등은 1008만 건으로 67.0%였다. 다만 이 시기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에서 비롯된 정치갈등(343만 건)도 22.8%로 비중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 상반기 젠더갈등은 77.4%로 비중이 늘어났지만, 정치갈등은 11.1%로 감소했다.

젠더갈등은 긍정적인 담론을 끌어내기보다 부정적 충돌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젠더갈등과 관련된 온라인의 게시글 중 62.0%가 부정적인 내용이었고, 긍정적인 내용은 8.0%에 그쳤다. 정치 갈등 글은 50.0%, 세대 갈등 글은 39.0%가 부정적인 내용이었던 점에 비춰보면 젠더갈등의 심각성이 잘 드러난다.

미투·몰카·혜화역 시위…‘젠더갈등’ 봇물 

‘젠더 갈등’촉발한 이슈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젠더 갈등’촉발한 이슈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젠더갈등은 특정 사건을 계기로 폭발하는 경우가 많았다. 국내 미투운동의 시발점이 된 서지현 검사의 성폭력 피해 폭로나, 워마드 회원의 홍대 누드모델 불법촬영 사건, 혜화역 시위, 일간베스트(일베)의 몰카 사건 등이 터질 때마다 온라인에서 젠더갈등이 급증했다.

최항섭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근의 젠더갈등은 이념, 지역, 세대갈등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성 대립’으로 ’상대 성은 필요 없다’는 식의 극단적 증오로 표출되는 특징이 있다”고 분석했다.

성별과 무관한 사건까지 젠더갈등으로 비화하는 일도 잦다. 전 남편을 살해한 고유정 사건도 본질은 강력 사건이었지만, 뜬금없이 젠더갈등으로 불이 옮겨붙었다. 신상 공개 결정 뒤 고유정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자 “강서구 PC방 살인사건의 범인인 김성수의 얼굴은 공개됐는데 여성인 고유정의 얼굴이 공개되지 않는 건 차별”이란 주장이 제기되면서다. 지난 7월 온라인을 떠들썩하게 만든 충주 티팬티남 사건도 마찬가지다. 해당 남성이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은 것이 ‘공연음란’에 해당하느냐는 논의보다는 “여성 노출은 허용하면서 남성 노출만 처벌하는 건 문제다”는 식의 젠더갈등으로 번졌다.

“여경 폐지하라” 직업까지 파고 든 젠더혐오

특히 최근엔 대림동 여경 사건(실제 구로동에서 발생)으로 촉발된 ‘여경 무용론’처럼 젠더갈등 및 혐오 여론이 특정 직업군으로 파고드는 추세다. 이 같은 갈등은 주로 여성이 소수인 경찰, 군인, 소방관 등 직업군에서 불이 붙었다.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여경이나 여군을 폐지해야 한다’는 비난에 ‘근거 없는 편견으로 여성을 싸잡아 비난하는 건 전형적인 여성 혐오’라며 맞불을 놓는 식이다. 여기에 더해 남성이 소수인 간호사, 보육교사 등의 직업군에 대해서도 ‘남성에게 믿고 맡길 순 없다’는 식의 여성들의 반감이 온라인을 중심으로 퍼지는 추세다. 능력과 관계없이 특정 성에 대한 편견을 바탕으로 개인을 판단하는 그릇된 분위기가 사회 저변에 퍼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특정 이슈를 놓고 남녀가 충돌하는 젠더갈등은 OECD 국가 중에서도 유독 한국에서 격렬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구미 선진국에서도 젠더갈등은 있지만, 한국처럼 ‘남성 vs 여성’의 갈등이 아니라 LGBT(성 소수자)와 관련된 이슈가 대부분이다. 최근 젠더갈등이 극심해진 것과 관련해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초기엔 강남역 살인사건, 미투 운동 등을 계기로 여성 인권을 우려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컸는데, 이 과정에서 젊은 남성들이 ‘우리가 왜 기득권이냐’며 반발을 표출하면서 남녀간 대결 국면이 조성됐다”고 말했다. 구 교수는 “해외와 달리 국내에서는 단순히 여성의 ‘권익신장’ 방향이 아닌 ‘젠더혐오’의 충돌로 흘러가면서 갈등이 커진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젠더갈등을 심화시키는 한국의 특수성으로 병역 문제를 꼽는다. 지난해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만 19세 이상 60세 미만 남성 3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55%가 군 복무를 통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고 생각했다. 특히 20대 남성에선 82.6%가 ‘가능하다면 군대에 안 가는 게 좋다’고 답했고, 68.2%가 군 복무 자체를 시간 낭비라고 인식했다. 이에 대해 연구원은 “인정은 없고 의무만 부여하는 군 복무에 대한 ‘억울함’의 정서가 성차별주의 의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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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전방에서 젠더갈등 주도하는 2030 

한국 사회의 젠더갈등의 중심에는 2030 세대가 있다. [사진 pixabay]

한국 사회의 젠더갈등의 중심에는 2030 세대가 있다. [사진 pixabay]

젠더갈등 이슈를 20~30대가 주도하고 있는 것도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이다. 이념·지역 갈등에 더 익숙한 중·장년층과 달리 성평등이나 성차별 이슈에 민감한 젊은 층이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상대 성(性)에 대해 공격적인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최근 취업난이나 군대 등 문제로 기성세대 남성에 비해 박탈감을 느끼는 20대 남성, 여성을 타깃으로 한 각종 범죄에 공포를 느끼고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도 높아진 20대 여성이 서로를 향해 극단적인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전문가들은 극단적인 방식으로 전개되는 젠더갈등이 사회 통합을 막고, 다양한 사회 이슈에 대한 건전한 논의를 가로 막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허민숙 국회 입법조사관(여성학 박사)은 “과거 젠더 이슈는 여성 안전, 몰카 범죄 등 사회 문제에 대한 담론으로 전개되면서 개선책이 마련되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며 “하지만 최근에는 ‘성평등’이나 사회 문제 해결 차원의 건강한 논의가 아니라 혐오와 증오가 발산되는 장으로 젠더갈등이 변질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서로에 대한 극단적인 비방을 넘어 성차별, 성평등 문제가 얼마나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인지를 사회 전체가 인식해야 한다”며 “젠더 이슈를 사회 공론장에 끌어내 해결책을 찾아야 할 시점이 됐다”고 말했다.

탐사보도팀=손국희ㆍ정진우ㆍ문현경 기자 9key@joongang.co.kr

◆대한민국 휩쓰는 ‘젠더전쟁’

[탐사하다]“범인·적군이 여자라고 봐주나”…체력평가 논란이 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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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하다 영상]이래도 여경 무용론? 취객이 뺨 후려쳐도 '불금 홍대'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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