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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D램 독주 막자…일본의 ‘치킨게임’ 중국만 어부지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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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8호 04면

반도체 패권 경쟁

세계 3위 D램 반도체 업체인 마이크론이 일본 내에서 생산능력 확대를 서두르고 있다. 정보기술(IT) 전문미디어인 아난드텍은 최근 “마이크론이 지난 4월 대만 타오위안에 새 D램 공장 건설을 시작한데 이어 일본 히로시마에도 20억 달러를 들여 13나노미터(nm) 공정을 적용한 라인을 깔 예정”이라고 전했다. 2017년 20억 달러를 투자해 히로시마 공장 증설작업에 들어가 최근 완료한데 이어 추가로 차세대 생산라인 투자 확대에 나선 것이다. 이는 일본의 D램 반도체 재도전의 신호탄으로 볼 수 있다.

일본 소재-한국 반도체-중국 제품 #동아시아 IT 분야 공급망 무너뜨려 #히로시마 공장 증설한 마이크론 #20억 달러 추가로 투자하기로 #삼성·하이닉스 ‘탈 일본’ 채비 나서 #단기적 비용 증가, 이익 감소 우려 #결국 소재·장비 독립 계기될 수도

상반기 대일 반도체 수출 비중 1.03%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일본 D램 반도체 업계에서 히로시마 공장은 ‘아픈 손가락’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D램 시장의 70%를 차지했던 일본 업체들은 90년대 이후 삼성의 공세에 밀려 입지가 축소됐다. 미국의 정보기술(IT) 버블로 필라델피아반도체지수가 1000선 이상으로 급등한 2000년 D램 시장에서 한국의 삼성·하이닉스, 미국 마이크론 등이 3강을 차지했다. 그 뒤를 독일 인피니온, 일본 NEC·도시바·히타치·미쓰비시 등이 추격하는 상황이었다.

2007년 대만 업체들이 ‘타도 삼성’을 앞세워 시장에 뛰어들면서 치킨게임이 시작됐다. NEC와 히타치가 합작으로 설립한 엘피다는 대만 파워칩과, 인피니온에서 분리된 키몬다는 난야와 손을 잡고 증산에 나섰다. 2006년 6.8달러였던 512Mb D램 가격은 2009년 0.5달러로 폭락했다. 삼성을 제외한 반도체 기업들은 분기당 적자가 5000억원을 넘나들었다. 결국 키몬다는 2009년 파산했다. 엘피다는 공적자금 300억엔, 채권단 융자 1000억엔을 지원받아 버텼지만 2012년 마이크론에 매각됐다. 타오위안 공장은 대만 렉스칩이, 히로시마 공장은 엘피다가 운영하다 차례로 마이크론에 넘어갔다.

이후 7년째 이어지고 있는 삼성·하이닉스의 D램 독주체제를 일본 정부가 흔들고 나섰다. 한국을 수출 간소화 대상국인 ‘화이트 리스트’에서 제외하고 포토레지스트(감광액), 불화수소(에칭 가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반도체 관련 핵심소재의 수출 규제에 나선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일본 정부는 단순한 수출 관리라고 주장하지만, 한국 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명분삼아 한국 반도체 산업을 견제하는 측면이 강하다”고 말했다. 가격과 기술 경쟁을 통한 치킨게임에서 밀려난 기업 대신 정부가 2차 치킨게임의 총성을 울린 셈이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한국은 올 상반기에 872억 달러어치의 정보통신기술(ICT) 관련 상품을 수출했다. 이 가운데 일본에 대한 수출은 20억 달러(2.32%)에 불과하다. 중국(49.2%), 베트남(14.8%), 미국(10.5%)은 물론 대만(3.1%)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특히 반도체의 경우 전체 수출액(481억 달러)의 1.03%인 4억9800만 달러어치만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 전자업체들이 생산라인을 상당 부분 해외로 이전했기 때문이다. 요미우리신문은 일본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한국이 D램을 일본에 팔지 않아도) 반도체를 대만에서 살 수 있어 큰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일본의 지난해 메모리 반도체 수입액 중 한국의 비중은 17%로 대만(59.3%)보다 낮다.

아베 정부는 ‘일본산 부품·소재→한국산 반도체→중국산 전자제품’으로 이어지는 IT 분야의 동아시아 공급망(서플라이체인)을 흔들었다. 실제로 올 상반기에 한국은 전자부품 21억 달러, 화학약품 18억5000만 달러 등 부품소재 분야에서 67억 달러의 대일 무역적자를 기록했다. 전체 적자 100억 달러의 3분의 2에 달한다. 한국은 반도체 등을 중국에 팔아 116억 달러의 흑자를 냈다. 일본이 부품·소재 공급을 끊으면 한국이 타격을 받는 구조다.

이런 일본의 시도가 큰 성과를 거둘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이재윤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공급 차질 우려로 글로벌 IT 업체들이 메모리반도체 물량 확보에 나서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실적이 좋아질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삼성의 반도체 재고만 15조원 규모에 달해 공장 가동률이 떨어져도 연말까지 공급에 차질이 없다는 것이다. 주요 부품과 소재의 ‘탈 일본 정책’을 추진할 시간을 번 셈이다.

국내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업체들에도 이번 사태는 위험이자 기회가 될 수 있다. 반도체 산업 성장이 둔화될 경우 국내 장비·소재 업체들도 동반 하락이 불가피하지만, 중장기적으로 기술력과 규모를 갖춘다면 새로운 공급망에 합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니혼게이자이 “한·일 루즈-루즈 게임”

익명을 요청한 SK하이닉스 공정분야 관계자는 “반도체는 생산라인 건설 단계부터 주요 장비·소재업체 엔지니어들과 함께 최적화 작업을 한다”며 “지금까지는 일본 업체들과 오랜 시간 손발을 맞춰왔기 때문에 공급선 다변화에 적극적이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 과정에서 비용이 들고 생산수율이 떨어져 이익이 감소하는 부작용은 감수하겠다는 각오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3개월에서 6개월 정도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다만 한국 반도체의 탈 일본 정책은 결국 양국 모두에게 상처를 남긴다는 것이 문제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세계 1, 2위인 삼성과 SK하이닉스를 제외하고 세계 시장에서 수출 대상 기업을 찾기 어렵다”며 “한국과 일본의 ‘루즈-루즈’ 게임”이라고 보도했다. 반도체 전문가인 유노가미 다카시는 “일본 정부의 압박은 한국 업체에 위협이 되겠지만 일본 기업에도 큰 피해가 예상된다”며 “결국 일본 정부가 제 무덤을 파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 반도체 업체만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중국의 대표적인 증권 사이트인 동방재부망(东方财富网)에는 “최근 중국 상무부에서 일본 정부에 ‘한국에 대한 부품·소재 수출 감소분을 채워주는 대신 반도체 연구개발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는 글이 올라왔다. 일본 대신 불화수소 등을 한국에 판매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중국은 현재 20%인 반도체 자급률을 2025년까지 70%로 높이기 위해 4000억위안(70조원) 이상을 쏟아부었지만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D램 개발에 앞장섰던 중국 푸젠진화가 미국 정부의 제재로 사실상 개발이 무산됐고, 64단 낸드플래시 개발에 성공했다고 발표한 양쯔메모리(YMTC)도 양산 기술 확보에는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중국이 한일 갈등을 반도체 기술 확보의 기회로 삼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창우 기자 changwoo.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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