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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은 이승, 형은 저승 관장…그럼 저승이 더 좋다는 뜻?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권도영의 구비구비옛이야기(39)

천지 분간도 못한다는 말이 있다. 하늘인지 땅인지도 분간할 줄 모르는 이들은 주로 ‘날뛴다’. 하늘과 땅을 분간한다는 것은 경계를 분명히 안다는 것이며, 제 있을 곳을 정확히 안다는 뜻이겠다. 그걸 모르니 가만있질 못하고 사방팔방 날뛰며 온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태초에 이 세상은 그렇게 천지 분간이 되지 않았기에,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상이 만들어지던 때의 이야기는 우선 하늘과 땅을 가르는 것부터 시작한다. 도수 문장이 한 손으로 하늘을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 지하를 짓누르며 하늘과 땅이 열리고 그 사이에 산과 물이 생겨났다.

그때 동방에서 솟아난 청의동자 반고씨의 앞이마와 뒷이마에 눈동자가 각 둘씩 부풀어서, 도수문장이 그 둘을 빼어 동쪽과 서쪽 하늘에 각각 붙이자 해 둘, 달 둘이 생겨났다. 뭔가 자리를 잡아가는 듯 했지만, 해도 달도 둘인 세상은 인간이 살아가기엔 여전히 힘겨운 환경이다.

거기에 괴로움을 더한 이가 있었으니 수명장자라는 무도막심한 이였다. 이제 천지왕이 나서서 마구 날뛰는 수명장자에게 마치 부처님이 손오공에게 머리띠를 씌우듯 두건을 씌웠는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오자 수명장자는 종에게 명령하여 도끼로 자기 머리를 깨버리라고 하였다.

그걸 본 천지왕은 어이가 없어 수명장자에게 씌웠던 두건을 제거하였다. 인간 세상의 무도막심함은 하늘 옥황 천지왕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말과 행동이 더할 나위 없이 도리에 어긋나고 막돼먹은 것이 태초의 인간 세상이었다. 나고 감에 순서도 없고 얽혀 있던 하늘 땅 겨우 떼놓고 보니 이번엔 해도 달도 둘이 되어 햇빛에 타죽고 달빛에 얼어죽고 인간 삶이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인간 세상의 어지러움을 어떻게 좀 해보겠다고 하늘 옥황에서 내려온 천지왕은 수명장자의 두건을 벗겨 돌아가던 중 백주할망 딸애기를 만나 하룻밤을 보냈다. 그러고는 사흘 만에 옥황으로 돌아가는데, 백주할망 딸애기가 그냥 가시면 어쩌느냐 물으니 아이를 낳거든 이름을 대별왕 소별왕이라 하라 이르고 박씨를 증표라며 주고는 가버렸다.

문명이니 제도니 하는 것은커녕 하늘 존재 땅 존재가 마구 섞이는 시절이니 여기에 현대사회의 윤리관을 들이댈 수는 없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현실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은 얼마든지 생겨나는지라 이것이 또한 인간의 삶인가 싶다.

이승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대별왕과 소별왕

대별왕 소별왕이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이들은 아버지 존재를 궁금해했다. 증표를 들고 찾아가 아버지 천지왕을 만난 형제는 천지왕에게서 천 근짜리 무쇠 활과 화살을 받아 해와 달을 하나씩 쏘아 떨어뜨렸다. 이로써 인간 세상의 어지러움이 해결되었다 싶지만, 이들은 곧바로 이승법과 저승법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에 돌입하였다. 어쩌면 이로부터 본격적인 질서 잡기가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먼저 수수께끼 내기부터 시작하였다. 대별왕이 문제를 내어 어떤 나무는 잎이 지고 어떤 나무는 잎이 안 지는지 그것은 왜 그런지, 동산의 풀은 짧아지고 구렁의 풀은 길어지는 건 왜 그런지 물었으나 소별왕은 제대로 답하지 못하였다.

소별왕이 이번엔 꽃 피우기 내기를 하자고 하였다. 자신의 꽃은 금방 시들었지만 대별왕의 꽃은 번성하는 것을 보고 소별왕은 대별왕이 잠든 사이 자신의 꽃과 바꿔치기하였다. [뉴시스]

소별왕이 이번엔 꽃 피우기 내기를 하자고 하였다. 자신의 꽃은 금방 시들었지만 대별왕의 꽃은 번성하는 것을 보고 소별왕은 대별왕이 잠든 사이 자신의 꽃과 바꿔치기하였다. [뉴시스]

소별왕이 이번엔 꽃 피우기 내기를 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자기 것은 금세 시드는 꽃이 된 반면 대별왕의 꽃은 번성하는 것을 보고 소별왕은 대별왕이 잠든 사이에 자신의 꽃과 대별왕의 꽃을 바꿔치기하였고, 이 경쟁의 결과로 이승법은 소별왕이, 저승법은 대별왕이 차지하기로 하였다.

하늘 땅이 생겨나고 해와 달의 위치를 정한 후에 바로 이어진 것이 이승과 저승의 다스림, 혹은 이승법과 저승법의 마련이라는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짓는 일이 인간 세상 질서의 처음임을 의미할 것이다. 어쨌든 이승법을 차지한 소별왕은 제일 먼저 수명장자를 불러다 호통을 친 뒤 능지처참하여 뼈와 살을 갈아 바람에 날리니 모기와 파리, 빈대, 각다귀가 되어 날아갔다.

이 신화를 보면서 누구나 궁금해하는 부분이 첫째는 이승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웠다면 그래도 저승보다 이승이 좋다는 건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한날 한시에 태어났지만 그래도 대별왕이 형이고 소별왕이 동생이고, 지혜와 인품에서 대별왕이 아무래도 한 수 위인데 소별왕이 이승을 다스리게 되었다는 결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대별왕이 소별왕에게 남긴 말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꽃 피우기 내기에서 진 대별왕은 소별왕에게 앞으로 인간 세상에는 살인, 역적, 도둑, 간음이 많아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리고 자신이 맡을 저승의 법은 맑고 청랑한 것이 되리라 선언하였다.

이 말들이 대체 무슨 뜻일까 생각을 나누는 자리에서 교정시설의 한 수강생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란 말을 떠올렸다. 어쩌면 이 서사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현실적 사유 범위 안에서 그렇다. 이 세상의 근본을 좀 더 파고들어 가면 사실 이승법은 저승법의 지배 영역 안에 있기도 하다.

이승 법보다 맑고 청랑한 저승 법

세상에 선보이기로는 웹툰이 먼저였지만 영화로 좀 더 많은 분들이 접하였을 〈신과 함께〉에서 망자가 저승에 가자마자 겪는 일은 일곱 지옥을 지나며 심판을 받는 일이었다. 영화에서는 ‘귀인(貴人)’이라며 모든 과정을 무사통과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원작에서 그려내듯, 이 지옥의 심판에서는 알고도 모르고도 지은 이승에서의 온갖 죄에 대해 벌을 받도록 한다.

그런데 화탕지옥에서 연상하듯 끔찍한 고통 속에서 영원히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지은 죄가 있다면 그에 걸맞은 대가를 치르면 된다. 그 과정을 온전히 다 거치고 나면 인도환생하든 극락으로 가든 결정이 되는 것이다.

영화 <신과 함께 - 죄와 벌> 스틸컷.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신과 함께 - 죄와 벌> 스틸컷.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지장보살상과 그 좌우에 무독귀왕, 도명존자, 시왕(十王)과 귀왕, 판관, 사자상, 동자상, 인왕상 등 명부전의 권속 총 31구의 상은 조선 인조 14년(1636)에 조성되었다. 전등사 본말사지에 보면 조선 영조 43년(1767)에 한영대사에 의해 시왕(十王)을 채색했으며 헌종 5년(1839)에 시왕전을 중수한 사실과, 고종 21년(1884)에 지장상에 개금하였다고 한다. 목조지장삼존상과 시왕상 및 그 권속들은 모습이 독특하고 아름다우며 보존이 잘 되어있다. [사진 전등사 홈페이지]

지장보살상과 그 좌우에 무독귀왕, 도명존자, 시왕(十王)과 귀왕, 판관, 사자상, 동자상, 인왕상 등 명부전의 권속 총 31구의 상은 조선 인조 14년(1636)에 조성되었다. 전등사 본말사지에 보면 조선 영조 43년(1767)에 한영대사에 의해 시왕(十王)을 채색했으며 헌종 5년(1839)에 시왕전을 중수한 사실과, 고종 21년(1884)에 지장상에 개금하였다고 한다. 목조지장삼존상과 시왕상 및 그 권속들은 모습이 독특하고 아름다우며 보존이 잘 되어있다. [사진 전등사 홈페이지]

영화에서는 이런 대사도 나온다.

“이승의 사람이 진심으로 용서한 죄를 저승은 심판하지 않는다.”

저승의 맑고 청랑한 법은 이승의 질서에 관여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태초의 세상을 그리는 신화들에서 세상의 악은 인간과 함께 본래부터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믿었을 때 사실은 인간 세상의 험난함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좀 더 갖게 되는 것 같다.

본래 그러한 것임을 인정하고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임을 아는 것, 그리고 잘못된 일에 대해서는 저승에서라도 반드시 심판을 내려줄 것임을 믿는 것. 거기에서부터 인간 삶의 질서가 잡히게 되는 것은 아닐지.

위에 소개한 대별왕과 소별왕 이야기는 제주 지역에서 전해지는〈천지왕본풀이〉이다. 큰굿의 첫 번째 차례에 주로 구송되는, 세상 창조의 이야기이다. 한국에도 창세신화가 있고, 여기엔 우주적 세계관이 깃들어 있으며, 무엇보다 인간 세상의 질서에 대한 논리를 찾을 수 있다.

창세신화란 태초의 혼돈에서 우주적 질서가 잡히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인데, 세상에 질서가 잡힌다는 것은 곧 이 세상 각각의 존재가 각각의 그 고유한 자리를 잡는다는 것을 뜻한다. 대별왕과 소별왕이 그러했듯 너와 내가 있을 자리를 정하고, 각 존재는 자신의 위치와 과업을 인지하는 것이다.

제 있을 위치를 헤아리지 못하고 천방지축 나와 너의 경계와 영역 없이 넘나들 때 세상은 혼돈에 이를 수밖에 없다. 그 천지분간 못하는 일은 수명장자처럼 위아래 근본도 없이 자신의 욕망대로 헤집고 다니는 무도막심함에서 비롯한다. 그것을 잡기 위해서라도 자연만물에는 수명이라는 한계가 주어진다. 살아 있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것이지만,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해야겠다는 시인의 노래는 삶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드러낸다.

지금 이 세상이 혼탁하게 느껴진다고 해서 구원의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바라기보다 각자 고귀한 존재로서 자신의 고귀함을 알아차리고 각자 자리 잡은 그곳에서 자신의 몫을 충실히 하는 데에 힘써야 할 것임을 신화는 말해 준다. 나이, 지위, 성별 따위의 분별을 넘어선 오롯한 우주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의식하고 거기에서 스스로의 신성을 발현하는 것. 그게 신화를 통해서 우리가 깨닫고 익혀야 할 것이다.

권도영 건국대학교 서사와문학치료연구소 연구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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