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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민의 시선

지금 우리에게 유성룡이 있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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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정민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민 논설위원

이정민 논설위원

『징비록(懲毖錄)』의 저자 유성룡은 임진왜란 7년 전쟁을 총지휘한 사실상의 사령탑이었다. 육상의 권율, 해상의 이순신 두 장수를 천거함으로써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조선을 구해냈다. 관직에서 물러난 훗날, 선조가 “서애가 떠나간 후 국사가 날로 엉성해지고 더욱 해이되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다”고 탄식했듯이 충신이자 뛰어난 재상이고 정치가였다.

“다시는 지지 않겠다” 선언 #반일 선동과 구호소리만 요란 #극일 전략가도, 지혜도 안 보여

유성룡은 탁월한 전략가이자 외교관이었다. 한반도가 사색당쟁의 광풍에 휩싸여 있을 때, 그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충돌이 빚어낼 거대한 지각변동에 주목했다. 왜(倭)의 침략에 쫓겨 의주까지 피난한 선조가 압록강을 건너 명(明)으로 가려 하자 “조선 땅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나가면 조선은 우리 땅이 아니다”며 막아섰다. 세계정세를 보는 안목과 통찰, 정확한 판단력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정치사상가들의 리더십 연구에 몰두해온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는 자신의 책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에서 임진왜란의 성격을 명과 왜의 ‘조선분할 전쟁’으로 규정, 국토 분할을 막아낸 건 유성룡의 전략과 리더십이라고 평가했다.

명은 선조에게 임금에서 물러나고 세자(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라고 압박했다. 조선을 직할통치하려는 속셈이었다. 선조는 유성룡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격장군 척금에게 양위의 글을 전한다. 그날 저녁, 척금의 거처를 찾아간 유성룡은 통역도 물리친 채 필담을 나눈다.

“그대도 만 권의 책을 읽었을 터인데 어찌 고금의 일을 듣지 못하는가. 조선은 지극히 위태로운 상태에 있다. 나라를 위기에서 구함에 있어 전위 때문에 군신간, 부자간 잘못이라도 생긴다면 이야말로 재앙을 가중시키는 것이다.” 오랫동안 유성룡을 응시한 척금은 붓을 들어 ‘시시시시(是是是是, 옳은 말이다)’라고 쓴 뒤 그 자리에서 종이를 불태웠다고 한다. 위태로운 고비가 이렇게 넘어갔다.

강제 징용노동자 배상을 둘러싼 외교 갈등이 경제 전쟁으로 번졌다. 청와대와 민주당은 일본의 수출규제와 화이트리스트(수출 절차 우대국) 배제 조치를 ‘경제 침탈’이라고 규정하고 대일 전면전을 선포한 상태다. 국정을 이끌어가는 고위 인사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죽창’ ‘의병’ ‘제2독립’ ‘신흥무관학교’ 등 반일 정서를 파고드는 감성적 용어를 쏟아내고 있다.

민간의 일본 불매운동도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자신 소유의 4500만 원짜리 일본차 렉서스를 망치로 부숴버린 한 시민은 언론과 인터뷰에서 “일본이 우리에게 한 짓을 알고 나서 내가 일본차를 타고 다니는 게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자가용을 부수고 버스로 출퇴근한다는 이 시민이나 “독립운동은 못 했지만 불매운동은 참여해야죠”라는 청년들의 애국심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대대손손 우리 뼛속에 각인돼 온 이 지독하고도 순박한 ‘나라사랑 DNA’야 말로 누란의 위기에서 번번이 나라를 구원해 낸 원동력이다.

그러나 의병이 할 일과 관군이 할 일은 다르다. 관군까지 ‘의병 따라하기’를 해선 곤란하다. 도쿄 여행금지 선포,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 도쿄 올림픽 보이콧 검토와 일본 폭망론까지…. 괴담 수준의 대화가 집권당의 회의 석상에서 대책이랍시고 오갔다니 귀를 의심케 한다. 의병이 일어나 왜군의 유린으로부터 국토를 지키고 조선의 기개를 보여준 것은 자랑스런 유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더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유성룡과 같은 충성심과 기개 있는 인재·전략가들이 뒤를 받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국민들이 ‘관군’에 거는 기대도 이런 것일 테다. 이번에야말로 진정한 극일(克日)을 위한 치밀한 전략을 짜달라는 것, 실행 계획을 차분하게 추진해 나가달라는 것, 당대 최고 전문가들의 지혜와 아이디어를 모으고 집단지성을 결집해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는’ 드림팀을 이끌어달라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무역 분쟁 한 달이 넘도록 부품·소재의 국산화, R&D 지원 같은 낡은 레코드판 돌아가는 소리만 요란하다.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 깊은 전략가도, 국민 역량을 하나로 모을 그릇 큰 리더십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에게 유성룡이 있는가’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이다. 병법의 최고수로 일컬어지는 손자도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게 최선’이라고 했다. 전쟁은 구호나 웅변으로 하는 게 아니라 지혜와 외교로 하는 것임을 강조한 말이다. 손자는 또 “전쟁에 이기는 자는 먼저 이겨놓고 싸우고, 전쟁에 둔한 자는 먼저 싸움부터 벌여놓고 이기려 한다”고 했는데, 지금 우리가 그런 처지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이정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