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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한 30년 만의 여행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현주의 즐거운 갱년기(19)

“얘들아, 나 8월에 가족들과 한국에 휴가 가기로 했어. 이번에는 우리끼리 짧은 여행이라도 다녀오자.”

미국에 살고 있는 친구의 메시지가 단톡방에 떴다. ‘1박2일’은 어떠냐, 일정 맞추기가 어려우니 당일치기로 가자 등 스케줄에 관한 피드백과 갈만한 장소를 추천하는 여행 정보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바쁘게 살던 고등학교 동창들이 미국에서 휴가를 온 친구 덕분에 한자리에 모였다. 각자 일상에 치여 엄두도 못 냈던 우리들이 모여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사진 김현주]

바쁘게 살던 고등학교 동창들이 미국에서 휴가를 온 친구 덕분에 한자리에 모였다. 각자 일상에 치여 엄두도 못 냈던 우리들이 모여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사진 김현주]

고등학교 시절 단짝친구 5명이 모인 이 단톡방이 만들어진 건 작년 이맘때쯤이다. 그것 역시 미국에 살고 있는 그 친구 덕분이었다. 몇 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 친구는 우리를 한 자리에서 만나고 싶어했고, 각자의 일상이 바빠 엄두도 못 냈던 그 만남이 친구의 느닷없는 제안으로 마침내 성사된 것이다.

톡 방이 생긴 건 이 만남 이후다. 두세 명씩은 간간이 만나고 연락도 했지만 다섯 명이 한꺼번에 다 모이는 건 친구가 이민을 간 고등학교 졸업 이후 30여 년 만이었다. 물론 이곳에서 살고 있는 친구들은 결혼 전까지 지속적으로 만나기는 했다. 남자친구와의 이별, 여행계획, 직장생활, 결혼식 등 소식을 전하며 위로와 격려, 축하를 나누었다. 그렇게 20대를 함께 보냈지만, 결혼 후 각자의 생활이 바빠지고 사는 곳도 달라지며 만나는 횟수가 점차 줄어들었다.

작년 가을 친구가 잠시 귀국했을 때 ‘나는 멀리 떨어져 있어 그렇다고 하지만, 같은 서울에 살고 있는 너희들은 왜 안 만나니?’라며 만남을 자극했고, 그 말을 계기로 친구 5명이 조우하게 된 것이다. 졸업한 고등학교 앞 카페에서, 옛날식으로! 한동안 함께 하지 못했던 터라 한꺼번에 모이면 조금 낯설지 않을까 싶었지만, ‘와! 이게 누구야’ 하고 인사를 나누자마자 한창 만나던 그때의 분위기로 금세 돌아가 버렸다.

근황을 나누고, 고민거리도 털어놓고,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전달하며 낄낄거리는 모습이 예전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그때는 스무 살이었고 지금은 쉰 살이라는 것, 그래서 친구들의 모습에 지나간 30년이 묻어 있다는 것 빼고는 말이다.

역시 1박2일은 무리였다. 우선 나부터 모임이 가능한 날짜에 휴가를 낼 수가 없었다. 날짜를 옮겨볼까, 후발대로 갔다가 선발대로 와볼까 등 설왕설래하다 결국 일요일 하루 가까운 근교로 나가 맛있는 음식 먹고, 사진 찍고, 이야기 많이 나누자는 것으로 정리했다. 한 친구가 운전하겠다고 나서 줬지만, 이왕이면 모두가 얼굴 맞대고 시간을 보내는 게 낫겠다 싶어 국내여행 전문여행사의 당일 여행 코스를 예약하기로 했다.

이왕이면 모두가 얼굴 맞대고 시간을 보내는 게 낫겠다 싶어 여행사의 당일 여행 코스를 예약했다. 서울역을 출발해 정동진 부채길을 거쳐 협곡열차를 타고 강원도 탄광 지역을 들러서 돌아오는 코스이다. [사진 김현주]

이왕이면 모두가 얼굴 맞대고 시간을 보내는 게 낫겠다 싶어 여행사의 당일 여행 코스를 예약했다. 서울역을 출발해 정동진 부채길을 거쳐 협곡열차를 타고 강원도 탄광 지역을 들러서 돌아오는 코스이다. [사진 김현주]

서울역 앞에서 아침 일찍 출발해 저녁 8시에 같은 자리에 내려주는 여행 상품이 이렇게 다양하다는 것을 이번 여행으로 알게 됐다. 계절별로 가보면 좋을 지역 명소들과 그곳에서 해볼 만한 액티비티, 놓치면 아쉬울 음식들을 한데 모은 프로그램들 말이다.

국내 여행은 대부분 직접 운전을 해서 다녀오곤 했는데, 차 한 대로 움직이기 어려운 단체거나 특별한 계획은 없지만 훌쩍 어딘가로 움직이고 싶을 때 선택하면 좋을 듯싶다. 예전에 엄마가 친구분들과 종종 가시던 여행도 이렇게 다녀오셨다는 걸, 그리고 이런 방식의 여행을 내가 직접 경험하게 된 것도 이번 모임의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우리가 선택한 상품은 아침 7시 서울역을 출발해 정동진 부채길을 거쳐 협곡열차를 타고 강원도 탄광 지역을 들러서 돌아오는 코스다. 바닷가를 따라 해안을 함께 걸어보는 것도, 기차를 타고 강원도 지역을 둘러보는 것도 좋을 것 같기에 선택했다.

“와! 반가워! 1년 만이네. 잘 지냈어?” 친구들이 속속 도착했고, 버스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주말이라 그런지 버스는 빈자리 하나 없었다. “작년보다 더 젊어졌는데. 하하하” “이렇게 다 같이 여행 가는 것, 수학여행 이후에 처음이다.” “그래서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어?” 셀카 모드로 버스 안 단체 사진을 찍는 것부터 우리들의 여행은 시작됐다.

각자 가방에 싸가지고 온 커피와 과일을 나눈 후 핸드폰을 열어 아이들 사진을 함께 보고, 최근 구입한 쇼핑 아이템이나 다녀온 병원 중 권해줄 만한 것들의 링크를 카톡방에 올리는 등 우리는 버스 안의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떠들어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인 정동진에 도착했다.

바다 앞에 서니 가슴이 뻥 뚫리는 듯 했다. 우리는 학창시절로 돌아간 듯 끊임없이 수다를 떨며 바다 경치에 감탄했다. [사진 김현주]

바다 앞에 서니 가슴이 뻥 뚫리는 듯 했다. 우리는 학창시절로 돌아간 듯 끊임없이 수다를 떨며 바다 경치에 감탄했다. [사진 김현주]

정동진 부채길은 천연기념물 제437호로 지정된 곳으로 동해를 따라 해안단구를 거닐 수 있도록 만들어진 길이다. 30도 가까운 날씨에 편도 2.8㎞의 바닷길을 걷는 게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바다 앞에 서니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학창시절로 돌아간 듯 끊임없이 수다를 떨며 바다 경치에 감탄했고, 그곳을 배경으로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다 보니 어느새 1시간 30분의 산책 시간이 끝나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으며 흠뻑 젖은 땀을 식혔다.

아, 이 장면과 이 느낌, 고등학교 시절에도 있었던 것 같다. 황태해장국을 먹으러 식당으로 향했다.

“얘, 이 나물 진짜 맛있다” “생선 좀 더 가져다줄까” “이렇게 먹어봐. 건강에 좋다네” 누군가의 엄마인 친구들인지라 밥상에 앉자마자 서로에게 음식을 권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의 평소 생활을 보는 것 같아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2시간 가까이 기차를 타고 가는 시간 역시 즐거웠다. 앞 좌석을 돌려 마주 앉은 채 창밖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며 태백 지역 철암에 도착했다.

서로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기뻐하고 위로도 했다. 각자가 살아온 30년의 지혜가 한자리에 모이니 그만큼 도움이 됐다. 그 시간을 씩씩하게 마주하며 이 자리에 모인 친구들이 대견하고 든든했다. [사진 김현주]

서로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기뻐하고 위로도 했다. 각자가 살아온 30년의 지혜가 한자리에 모이니 그만큼 도움이 됐다. 그 시간을 씩씩하게 마주하며 이 자리에 모인 친구들이 대견하고 든든했다. [사진 김현주]

아이와 남편을 챙기며 다니던 여행과는 사뭇 달랐다. 엄마와 아내가 아닌, 누군가 한 마디만 던져도 낄낄대고 웃어대던 30년 전 나로 돌아간 느낌이랄까. 단순해서 즐거웠던 그때 말이다. 이래서 어릴 적 친구들을 만나는구나.

“나이 들어 알게 된 사람은 각자의 기준으로 서로를 판단부터 하려고 하지만, 어릴 적 친구들은 그럴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되더라고.” “유치해도 웃어줄 수 있고, 그래서 어릴 때 친구들이 점점 더 그리워지는 것 같아.” “살아온 시간은 다르지만, 그때 그 코흘리개 친구들이 지난 세월을 견디며 지금에 이르렀다는 것이 대견하기도 하고.”

정말 그랬다. 어떻게 받아드릴까 걱정 없이 조언할 수도 있었고, 즐거운 상황도 힘든 상황도 부담 없이 털어놓을 수 있었으며, 그것들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위로해 줄 수도 있었다. 어릴 적 친구라 어렵지 않았고, 각자가 살아온 30년의 지혜가 한자리에 모이니 그만큼 도움이 되기도 했다. 파도 없는 바다는 없다. 굴곡 없는 인생도 없다. 그 시간을 씩씩하게 마주하며 이 자리에 모인 친구들이 대견했고 든든했다. 동해 앞에 선 우리는 그렇게 행복했다.

김현주 우먼센스 편집국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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