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론

피의사실 공표와 인권, 그리고 국민의 알 권리

중앙일보

입력 2019.08.07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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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현 변호사·전 대한변호사협회장

김현 변호사·전 대한변호사협회장

울산경찰청은 허위 약사 면허증으로 약을 제조한 남성을 구속한 뒤 지난 1월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그 후 울산지검은 울산경찰청이 피의사실을 공표했다며 수사에 착수했다. 형법의 피의사실 공표죄는 검찰이나 경찰이 알게 된 피의사실을 기소 전에 공표하는 범죄다. 국민의 인권과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다. 헌법상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모든 사람은 확정판결이 나기 전에 무죄로 추정되는데, 수사기관이 기소하기도 전에 피의 사실을 공표하면 마치 피의자가 유죄인 것처럼 잘못된 인상을 주어 나중에 무죄판결을 받더라도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피의자에게 입히기 때문이다.

인권과 알권리의 동시 조화 필요
영장 발부 전까지는 공표 막아야

피의사실 공표의 또 다른 해악은 법률에 따른 재판이 아니라 여론 재판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범죄 사실이 언론에 대문짝만하게 보도되면 일반인은 물론 판사조차 피의자에 대해 유죄의 심증을 갖게 될 가능성이 크다. 검찰은 그동안 관행적으로 범죄사실을 언론에 흘려 피의자에게 망신을 주고 검찰의 의도대로 수사를 이끌며 심한 경우 인격살인까지 해왔다는 지적을 받았다.

실제로 수많은 사람이 피의사실 공표에 따른 희생자가 됐다. 지난해 노회찬 당시 국회의원이 드루킹 측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이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특검 수사가 진행되던 중 노 의원은 결국 투신자살했다.

최근엔 국정감사 증인 무마 청탁 대가로 자녀가 KT에 특혜 채용되도록 한 혐의로 불구속기소 된 김성태 의원이 검찰 관계자들을 피의사실 공표 혐의로 고소했다. 특권을 누린다는 국회의원조차 범죄사실이 기소 전에 공표되면 명예가 크게 실추된다며 울먹였다. 하물며 힘없는 일반 국민이야 오죽하겠나.

한편 언론계에서는 현실적으로 불구속재판 원칙이 지켜지지 않아서 구속 여부가 중요하고 유무죄 판단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데 이를 무시하고 기소 후에만 범죄사실을 보도하라는 것은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반발한다.

그렇다면 국민의 인권과 알 권리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필자는 여기서 두 가지 해결책을 제시해 보려 한다. 첫째, 최소한 구속영장이 발부되기까지는 피의사실을 공표하지 못하게 하자. 만일 영장이 기각되면 사안이 매우 중대하지 않다는 의미이므로 이 경우에는 피의자의 프라이버시를 국민의 알 권리에 앞서서 보호하자는 것이다. 반면 영장이 발부되면 범죄가 중하고 법원이 유죄 가능성을 높게 본다는 의미이므로 이 경우에는 알 권리를 위해 범죄사실을 공표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둘째, 가칭 ‘피의사실 공표 심사위원회’를 만들자. 개별 사건에 대해 검찰이나 경찰의 신청이 있는 경우 피의사실을 어디까지 공표할 것인지를 제삼자가 판단하게 하는 것이다. 피의자의 신원 자체는 일절 공표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위원회는 법무부 산하에 두되 법원행정처장이 추천하는 판사 2인, 법무부 장관이 추천하는 검사 2인, 대한변호사협회장이 추천하는 변호사 2인, 법학전문대학원 협의회가 추천하는 법학 교수 1인, 언론계가 추천한 언론인 1인, 시민단체 1인 등 모두 9인 정도로 구성하고 중립적인 변호사가 위원장을 맡는 것이 어떨까.

선진국에서는 피의사실 공표가 한국처럼 광범위하게 이뤄지지 않고 법원의 재판 중심으로 보도하는 것이 원칙이다. 반면에 한국에선 사건이 법원에 가기도 전에 검찰 단계에서 피의자에게 유죄의 낙인을 찍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수사 중인 사건에 관해 원칙적으로 언론 발표를 하지 않는다. 수사가 종결된 뒤 테러사건이나 정치적 스캔들처럼 사회적 관심을 집중시킨 사건에 한해 예외적으로 검찰 공보관이 가치평가를 배제하고 확실하게 규명된 사실관계만 예외적으로 언론에 브리핑한다. 피의사실 공표는 수사기관의 잘못된 관행이다. 이제는 고치자.

김현 변호사·전 대한변호사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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