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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운서 7명은 MBC 12층 '외딴 골방'에 모여 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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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장세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MBC 계약직 아나운서 7명은 지난달 16일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다며 서울고용노동청에 사측을 신고했다. (사진 왼쪽부터) 김민호 박지민 이선영 안주희 정다희 정슬기 아나운서의 표정이 착잡하다. 장세정 기자

MBC 계약직 아나운서 7명은 지난달 16일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다며 서울고용노동청에 사측을 신고했다. (사진 왼쪽부터) 김민호 박지민 이선영 안주희 정다희 정슬기 아나운서의 표정이 착잡하다. 장세정 기자

폭언·따돌림·험담 등 '직장 내 괴롭힘' 행위의 금지를 사상 처음으로 명시한 개정 근로기준법('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7월 16일 시행되면서 사업장마다 술렁이고 있다. 5일 고용노동부 근로기준정책과 최태호 과장에 따르면 8월 1일까지 전국 48개 고용노동 관서에는 모두 227건의 괴롭힘 진정서가 접수됐다. 같은 기간 서울 지역에 접수된 77건의 괴롭힘 유형(복수 응답)을 분석해보니 폭언(40건), 부당 인사조치(25건), 따돌림(10건), 업무 미부여(6건) 등의 순이었다.
 서울 중구 을지로에 있는 서울고용노동청 창구에 가봤다. 상담을 맡은 이건종 공인노무사에게 문의 전화가 계속 걸려왔다. "선배(상사)가 나에게만 일을 많이 시켜서 피곤하고 괴롭다"는 직장인의 하소연이 많았다. 반면 "권리 의식이 강한 젊은 후배들에게 일을 시키기 힘들다. 괴롭혔다고 신고할까 겁난다"는 선배들의 푸념도 적지 않았다.
 개정법 시행 이후 전전긍긍하는 사용자 측 인사담당자들은 "괴롭힘의 범위가 너무 포괄적이고 불명확해 어디까지를 괴롭힘으로 봐야 할지 모르겠다"며 업무 처리의 고충을 호소했다. 정부의 괴롭힘 금지법이 기업 인사 담당자들을 괴롭히는 셈이다. 전소영 서울고용노동청 근로감독관은 "상시 근로자 5명 미만 사업장 근로자, 원청 업체의 괴롭힘에 시달리는 하청 업체 근로자, 파견 근로자들이 괴롭힘을 호소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이들은 개정법상 신고 대상이 아니다. 7월 16일 0시 이전에 발생한 괴롭힘의 경우 이후에 지속해서 괴롭힘이 이뤄지지 않으면 신고 대상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을 조사하는 서울고용노동청 이미향, 전소영 근로감독관.  장세정 기자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을 조사하는 서울고용노동청 이미향, 전소영 근로감독관. 장세정 기자

 앞서 MBC 계약직 아나운서 7명은 MBC 사용자 측(최승호 사장)에 의해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다면서 지난 7월 16일 개정 근로기준법이 시행된 첫날 서울고용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직장 내 괴롭힘 신고 사례 1호 사건'으로 기록됐다. 개정법의 실효성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 같아 이 사건 현장을 따로 취재했다.
 괴롭힘을 당했다고 신고한 7명을 포함해 아나운서 11명(1명은 이후 정규직으로 채용)은 2016년과 2017년 각각 전문 계약직으로 입사해 1년 단위로 갱신하며 근무해왔다. 그런데 촛불 시위로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탄핵당하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MBC에는 파업과 사장 교체 등 태풍이 불었다. MBC 노조가 2017년 9월 김장겸 사장 퇴진을 요구하며 파업하는 과정에서 당시 사측은 이들 아나운서를 방송에 일시 투입했는데, 김 사장이 물러나고 2017년 12월 최승호 사장 체제가 되면서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었다. 이듬해 4월 MBC는 이들 계약직 아나운서들에게 계약해지를 통보했다. 파업 기간에 사측에 의해 투입된 신입 아나운서들을 '적폐 세력의 부역자'로 몰아 조직적으로 불이익을 줬다거나, MBC에서도 가장 선민의식이 강하다는 정규직 아나운서들의 순혈주의 기득권에 의해 밀려났다는 말까지 돌았다.

탄핵 촛불 집회라는 정치 사건이 터지면서 이후 MBC에는 파업과 사장 교체 등 태풍이 불었다. [중앙포토]

탄핵 촛불 집회라는 정치 사건이 터지면서 이후 MBC에는 파업과 사장 교체 등 태풍이 불었다. [중앙포토]

민주노총 산하 전국언론노조 MBC본부는 2017년 9월 파업하면서 "김장겸 사장 사퇴와 공영방송 정상화"를 외쳤다. 하지만 파업 기간에 방송에 투입된 신입 계약직 아나운서들은 이듬해 해고됐다. [중앙포토]

민주노총 산하 전국언론노조 MBC본부는 2017년 9월 파업하면서 "김장겸 사장 사퇴와 공영방송 정상화"를 외쳤다. 하지만 파업 기간에 방송에 투입된 신입 계약직 아나운서들은 이듬해 해고됐다. [중앙포토]

 사측 조치에 반발한 아나운서들은 "MBC가 사실상 정규직으로 고용할 것을 염두에 두고 채용했고 수차례 정규직 전환을 약속했다"고 주장하며 지난 3월 서울서부지법에 해고무효 확인소송을 냈다. 별도로 제기한 근로자 지위 보전 가처분신청에 대해 재판부가 지난 5월 "해고 무효 판결이 나올 때까지 근로자 지위를 가진다"고 결정해 아나운서들의 손을 들어줬다. 부당해고를 인정한 중앙노동위원회 결정에 반발한 사측이 제기한 행정소송은 이달 중에 심리가 열린다.
 그런데 가처분 결정에 따라 5월 27일부터 서울 상암동 MBC 본사로 출근하자 이 무렵부터 사측이 게시판에 업무 배제를 공개적으로 알리는 글을 올리고 공간 격리 등으로 괴롭혔다고 계약직 아나운서들은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9층에 아나운서국 사무실이 있지만 사측은 이들만 12층의 격리된 빈 회의실을 쓰도록 했다. 업무도 주지 않았고 "출근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며 근태 관리도 하지 않았다. 이메일 계정도 없앴고 사내 게시판 접근을 차단해 사내 정보를 열람할 수조차 없었다. 한마디로 "투명인간 취급했다"고 한다.

직장 내 괴롭힘을 신호한 MBC 계약직 아나운서들이 모여 있는 12층 골방 사무실. 장세정 기자

직장 내 괴롭힘을 신호한 MBC 계약직 아나운서들이 모여 있는 12층 골방 사무실. 장세정 기자

 그렇다면 진정서 제출 이후 계약직 아나운서들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이들이 격리돼 있다는 MBC 사옥 12층을 찾아가 봤다. 오전 출근시간부터 점심시간과 이른 오후 근무 시간을 포함해 약 5시간을 함께하면서 이들이 겪어왔다는 '괴롭힘'의 실상을 들어봤다. 오전 10시쯤 제일 먼저 출근한 이선영 아나운서는 12층 격리된 방에 들어가면서 입구에 걸린 '아나운서국'이란 팻말을 뒤집었다. 이곳은 정상적인 아나운서국 근무 공간이 아니라서 속상하다는 심정을 표현하는 듯했다. 10시가 조금 넘자 다른 아나운서들도 줄줄이 출근했다. 임신 7개월인 정다희 아나운서도 다소 무거운 몸을 이끌고 '출근 투쟁'에 동참했다.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직장 내 괴롭힘 신고 1호' MBC는 지금 #갈라파고스 같은 공간에 고립 #노동청 진정 직후 찔끔 양보안 #정식 복직 요구엔 아직 무반응 #MBC 조사위 "괴롭힘 증거없어" #직장갑질 119 "명백한 괴롭힘" #"전국적으로 신고·문의 쏟아져 #괴롭힘 없는 일터로 거듭날까

 책상 위에 놓인 8대의 전화벨은 줄곧 울리지 않았다. 평소 약자 보호를 외쳐온 노조 관계자도 찾아오지 않았다. 신나게 일해야 할 2030 신참 아나운서들이 '갈라파고스'처럼 고립된 공간에 말 그대로 방치돼 있었다. 하지만 조용히 토해내는 울분은 강렬했다. "귀책사유도 없는데 계약해지됐다는 이유만으로 '적폐 아나운서'로 몰려 인생이 크게 흔들렸다" "전 사장과 현 사장 시기에 걸쳐 있던 문제인데 우리 의도와 달리 억울하게 그 구조에 끼었다" "언론인 의식이 있었다면 (아나운서 시험에) 지원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비난은 지나치다" ….

민주노총 산하 MBC본부노조는 1심 판결 이후 계약직 아나운서 사건에 대한 입장을 내겠다고 한다.

민주노총 산하 MBC본부노조는 1심 판결 이후 계약직 아나운서 사건에 대한 입장을 내겠다고 한다.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서울고용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했더니 바로 다음 날 반응이 왔다. 사측 관계자가 "옛 사번으로 인트라넷 접속이 가능할 테니 해보라"고 통보해왔다. 사측이 진정서 제출 하루 만에 보인 작은 변화였다. 사측은 직장 내 괴롭힘 신고·조사 위원회(내부 2인, 외부 1인 참여)를 구성했고 조사위는 7월 30일 "회사가 의도적으로 괴롭히기 위해 (별도 공간 격리와 업무 배제 등) 조치를 시행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조사 결과를 최승호 사장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MBC 조사위는 다만 "노동 인권 차원에서 현 상황의 개선이 필요하다"면서 아나운서들에게 적절한 직무를 부여하고 9층 아나운서국 사무실에 배치하라고 권고했다.
 이에 따라 사측은 7월 31일 계약직 아나운서들과의 면담에서 "9층 아나운서국 공간으로 이동하라"고 통보했지만, 9층 공간이 협소해 기존 정규직 아나운서 일부가 12층으로 이동해야 하는 문제가 생기면서 일이 꼬였다. 이런 사실을 사측이 미리 알려주지 않아 뒤늦게 알았다는 계약직 아나운서들은 "우리가 주장한 화해 조치와 맞지 않는 데다 선배들로부터 오해를 받고 싶지 않다"며 거부했다. 사측은 지난 2일 "적절한 직무를 부여하라"는 조사위의 권고에 따라 계약직 아나운서들에게 2020년 한글날 우리말 관련 다큐멘터리 기획안을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계약직 아나운서들의 요구 수준에는 턱없이 못 미치지만, 꿈쩍도 하지 않던 MBC가 찔끔 움직이는 시늉을 한 셈이다.

민변은 7월 24일 "MBC는 계약직 아나운서에 대한 괴롭힘을 중단하라"며 이례적인 비판 성명을 발표했다.

민변은 7월 24일 "MBC는 계약직 아나운서에 대한 괴롭힘을 중단하라"며 이례적인 비판 성명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직장 내 괴롭힘 사례 1호 사업장'으로 여론에 찍힌 데 따른 부담감이 작용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은 7월 24일 "MBC가 계약직 아나운서들에게 제대로 된 업무를 주고 직장 내 괴롭힘 행위를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며 이례적으로 강한 비판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조직적 괴롭힘이라는 주장에 대해 황선숙 MBC 아나운서국장은 "업무배제와 사무 공간 분리는 괴롭힘 차원에서 한 조치가 아니다. 계약직 아나운서들이 파업에 불참해 불이익을 받은 것도 아니고 비정규직이라 차별받은 것도 아닌데 부당 해고당한 '약자 프레임'으로 보려고 하니 안타깝다"고 말했다.
 서로 엇갈린 주장으로 갑론을박이 계속되지만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에 따르면 MBC 사건은 신고 이후 25일, 한차례 연기하더라도 50일 안에 결론을 내야 한다. 고용노동부와 법원이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수많은 이해관계자가 예의주시하고 있다. 군대 병영 같은 상명하복과 갑질 문화가 뿌리 깊은 대한민국 직장은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도입을 계기로 서로 배려하는 민주적 일터로 거듭날 수 있을까.

서로 손가락질하는 듯한 형상 때문에 '니 탓이오 동상'으로 불린다는 MBC 앞 조형물. 상명하복과 갑질이 뿌리 깊은 대한민국은 '직장 내 괴롭힘 급지법'을 계기로 민주적 일터로 바뀔 수 있을까. 장세정 기자

서로 손가락질하는 듯한 형상 때문에 '니 탓이오 동상'으로 불린다는 MBC 앞 조형물. 상명하복과 갑질이 뿌리 깊은 대한민국은 '직장 내 괴롭힘 급지법'을 계기로 민주적 일터로 바뀔 수 있을까. 장세정 기자

장세정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김혜린 인턴기자가 이 기사의 영상 편집작업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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