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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의 오판을 한국경제의 축복으로 만들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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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상렬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이상렬 경제 에디터

이상렬 경제 에디터

일본과의 경제전쟁이 본격화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우리는 다시는 일본에게 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의 결의는 우리 국민들의 가슴을 두드린다. 하지만 전쟁은 의지와 각오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는 세계 3위(국내총생산 기준)의 경제대국 일본이다.

여당 내 반기업 정서 해소하고 #과감한 규제혁파·세제지원으로 #기업 신명나게 해야 극일 가능

한국 기업들의 대일(對日) 의존도는 일본 기업들의 대한(對韓) 의존도를 능가한다. 충돌은 양쪽 모두에게 상처를 입히겠지만, 의존도가 큰 쪽이 당장은 더 큰 피해를 입기 마련이다. 전후 지구촌 번영의 토대가 된 자유무역의 기본을 짓밟은 아베의 오판은 대가를 치를 것이다. 글로벌 공급망 와해의 불씨를 던진 일본에 대한 국제적 신뢰는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절대적 구매처인 삼성, SK하이닉스 등 한국 대기업들이 대체 조달루트를 찾는다면 일본 소재업체들은 벼랑으로 내몰린다. 하지만 한국 경제는 상당한 내상을 입을 수 있다.

게다가 일본은 기축통화국이다. 금융에서 전쟁이 붙으면 우리가 불리할 수밖에 없다. 일본 자본이 빠져나가는 것도 문제지만, 다른 외국 자본들이 기축통화국 일본의 자금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에도 일본계 금융회사들의 자금 회수가 위기의 트리거(trigger)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근거 없는 것이 아니다. 아직은 자금 회수 등 일본의 금융 교란이 없지만, IMF를 겪어본 국민들은 일말의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일본과의 전면전을 앞두고 그나마 한국 경제에 다행스러운 조짐이 몇 가지 있다.

서소문 포럼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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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하나가 청와대와 여당이 대기업 귀하고 중한 줄 알게 된 것 같다는 점이다. 결국 경제전쟁의 전면에 서는 것은 대기업일 수밖에 없다. 그들이 버텨줘야 한국경제가 견딘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4일 당정청 회의에서 “무엇보다 정부가 관련 기업들을 철저하게 보호한다는 의지가 분명해야 한다. 의지가 분명할 때 기업도 위기를 넘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자세가 현 집권세력의 뿌리 깊은 반기업 정서를 몰아내는 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2017년 집권하자마자 작심하고 결행했던 법인세율 인상은 세계적 흐름과 거꾸로 갔다. 법인세율은 전향적으로 내리는 것이 맞다. 세금이 무거우면 기업은 의욕을 잃는다.

대기업이 중소기업과의 상생 중요성을 절감하는 계기가 된 것도 긍정적이다. 아베 정권의 첫 번째 공격 타깃은 삼성과 SK하이닉스가 일본 기업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반도체 핵심소재다. 익명을 요구한 국책은행장은 “서방 글로벌 기업들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거래선을 일부러 분산한다. 우리 기업들의 핵심소재 대일 의존도가 90%가 넘는다는 것은 너무 안이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미국, 일본의 집중 견제를 뚫고 세계 최고가 된 국내 대기업들에겐 야속한 얘기다. 피 말리는 경쟁에서 앞서려면 가장 뛰어난 부품과 소재를 써야 한다. 하지만 대기업들이 앞만 보고 달린 것도 맞다. 아무리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기업의 생리라지만, 리스크 분산도 고려했어야 한다. 물론 일본의 돌변을 예상하긴 쉽지 않았겠지만.

무능한 정치권이 위기감을 갖게 된 것도 위안거리다. 5조8269억원 추경안은 아베 정부가 각의에서 화이트리스트 배제를 결정하고 나서야 국회 문턱을 넘었다. 정부의 추경안 제출 100일 만이었다. 정치권의 대각성이 절실하다. 이번 기회에 정치의 효율성을 확실하게 높여야 한다. 더 늦기 전에 탄력근로제 확대안 등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입법을 서둘러야 한다.

지금 청와대와 여당엔 “이번 사태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다짐이 넘쳐난다. 맞는 말이다. 다만 그러기 위해선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일본과 비교해서 우리의 기업 규제환경은 어떤지, 노사 협력 관계는 어느 정도인지, 세제는 얼마나 기업의 의욕을 북돋워 주는지 등. 이런 질문에 자신 있게 “우리가 낫다”거나 “앞으로 틀림없이 우리가 나아질 것”이라고 답할 수 없다면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을 것”이란 대통령의 다짐은 공허해진다. 덜 일하고, 규제로 기업을 옭아매고, 세금을 더 물리면서 경제전쟁에서 이기길 기대해선 안 된다. 정부와 국민이 이런 각성으로 뭉친다면 한국경제는 극일을 넘어 진정한 선진 경제로 도약할 수 있다. 아베의 오판을 한국경제에 축복의 전환점으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이상렬 경제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