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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대청에서 죽부인과 낮잠자기, 남산골서 체험 어때요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홍미옥의 폰으로 그린 세상(32)

달밤에 발 씻기, 숲에서 활쏘기, 느티나무 아래에서 그네타기, 대자리 위에서 바둑 두기, 그리고 연못의 연꽃 구경하기, 숲속에서 매미 소리 듣기, 비 오는 날 한 시 짓기, 강변에서 투호 놀이까지….

이 무슨 호강에 잣죽 쑤는 속 편한 얘기일까? 이건 다름 아니라 옛 선비들의 지혜로운 여름나기 비법이란다. 가만 보니 활쏘기나 그네타기 투호 놀이는 오히려 땀이 날지도 모르겠다. 발 씻기와 매미 소리 듣기 정도가 좋을 것 같긴 하다.


남산한옥마을 윤 씨 가옥 내 대청마루에서는 고즈넉한 풍취를 제대로 맛볼 수 있다. 갤럭시 탭 S3, 아트레이지사용 [그림 홍미옥]

남산한옥마을 윤 씨 가옥 내 대청마루에서는 고즈넉한 풍취를 제대로 맛볼 수 있다. 갤럭시 탭 S3, 아트레이지사용 [그림 홍미옥]

프랑스 파리의 한낮기온이 43도를 기록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이집트 카이로보다 더 더운 날씨라며 금발의 아나운서는 호들갑이다. 뭐, 그 정도 더위라면 우리도 지지 않는다. 지난여름, 40도를 오르내리던 여름을 생각하면 벌써 지치기 시작한다. 시간마다 무더운 날씨가 뉴스의 시작을 알리곤 했던 역대 최고급 여름! 보나 마나 올해도 반갑잖은 무더위는 우릴 찾아올 것이다. 아니 이미 왔다.

가전업계의 1인 가정을 겨냥한 창문형 에어컨은 이미 품절 대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아! 어쩐다. 이놈의 여름’ 그렇다고 마냥 방구석에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다소 식상하지만 '피하지 말고 즐겨라'는 말처럼 올여름도 더위와 무던히도 친해 볼 참이다.

지하철 충무로역에 내리면 남산한옥마을이 있다. 유명세답게 언제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의 여행자들로 북적이는 곳이다. 도심 한복판에서 고즈넉한 바람과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남산한옥마을에서는 몇 해 전부터 여름이면 특별한 체험이 열린다. 남산골 바캉스가 그것이다. 올해로 3년째라는 이 체험 행사는 한옥마을 내 윤 씨 가옥에서 열리고 있다. 초록이 우거진 길을 따라 돈 내고 낮잠을 자러 가는 건 어떤 기분일까?

 체험형 여름나기가 열리는 남산한옥마을. [사진 홍미옥]

체험형 여름나기가 열리는 남산한옥마을. [사진 홍미옥]

 남산한옥마을 윤 씨 가옥 앞마당. [사진 김혜원]

남산한옥마을 윤 씨 가옥 앞마당. [사진 김혜원]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엔 박 참판 댁이라 불렀던 커다란 한옥이 있었다. 마침 그곳은 친구네 집이어서 또래의 동네 친구들은 넓은 대청마루에서 공기놀이도 하고 만화책도 보면서 깔깔대곤 했다. 반들반들하던 짙은 갈색 대청마루의 서늘함은 아직도 피부에 추억으로 각인되어 있다. 간혹 여행지나 전국의 한옥마을을 가면 '앉지 마시오' 혹은 '올라가지 마시오'라는 푯말 앞에 번번이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 했다. 하지만 여긴 앉는 것도 모자라 누울 수도 있다. 게다가 낮잠이라니! 서울 한복판에서의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일이다.

벼르고 별러 어릴 적 친구들과 남산골 바캉스를 즐기자며 길을 나섰다. 옛 선조들의 피서 법을 그대로 따라 해 보겠다며 나선 길은 즐겁기만 하다. 오전 10시 무렵의 한옥마을은 벌써 부지런한 여행자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림 속의 '쉿!'처럼 윤 씨 가옥은 고즈넉하기만 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지기 시작한다.

 탁족체험 코너와 오수체험이 열리는 한옥의 내부 [사진 김헤원]

탁족체험 코너와 오수체험이 열리는 한옥의 내부 [사진 김헤원]

 약 20여명의 인원이 오수체험이용 가능한 윤 씨 가옥 대청마루. [사진 김혜원]

약 20여명의 인원이 오수체험이용 가능한 윤 씨 가옥 대청마루. [사진 김혜원]

대청마루에 오르기 전 해야 할 일이 있다. 탁족(濯足)이다. 말 그대로 항아리의 시원한 물에 발을 씻는 일이다. 조롱박 바가지로 퍼붓는 물은 왠지 더 시원한 것만 같아 벌써 더위가 기죽는 느낌이다.

이제 한옥 대청마루에서 달콤한 낮잠, 즉 오수(午睡)체험을 즐길 차례가 왔다. 내 어릴 적 기억 속의 대청마루 같은 널따란 마루 위엔 대자리와 죽부인, 모시 침구가 놓여 있다. 살에 닿는 까끌까끌한 촉감이 그만이다. 곳곳에 뚫린 창문과 방문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제법 시원하다. 창문형 에어컨이 인기라더니 이게 바로 그거다 싶었다. 아침 시간이어선지 체험자는 우리뿐이었다. 선조들의 지혜로운 여름나기를 체험해 보겠다고 아침부터 서둘러 온 우리다.

그런데 우습게도 너무 신이 났던 모양이었다. 낮잠을 자기는커녕 이곳저곳 둘러보고 사진으로 남기느라 한 시간이 후딱 가버렸다. ‘혹시 낮잠도 연장이 되나요?’ 예약제이기 때문에 어림없단다, 후훗.

아쉬웠지만 삐걱대는 대청마루를 살금살금 걸어 나왔다. 사실 한 시간 남짓의 한옥마을 오수체험이 뭐 그리 시원하냐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위와 함께했던 선조들의 여름나기를 맛보고 싶다면 살짝 추천해 본다. 담 너머 늘어진 붉은 능소화를 바라보며 야무지게 짜인 죽부인과 함께 하는 남산골의 여름나기!

홍미옥 스마트폰 그림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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