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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전범국가 일본에 묻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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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

한국 금수조치에 대한 일본 각의 결정이 타전되었을 때 군 복무 시절이 떠올랐다. 감촉마저 생경했던 살상용 쇠붙이들이 긴 세월을 가로질러 적의(敵意)를 몰고 왔다. 스스로 놀랐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의 브리핑은 구토를 유발했다. ‘대항조치가 아니다’는 궤변은 진주만 공습 직전 미국 국방성에 수신된 일본 외교문서를 상기시켰다. ‘우리는 평화 교섭을 원한다.’ 항모 6척에서 발진한 360대의 제로센 전투기가 진주만 공격을 개시한 시각이었다. 태평양전쟁은 미국의 석유금수조치에 대한 일본의 항전이었다.

금수조치는 적개심의 징표 #‘용서한다’가 평화의 심성, 일본은? #불신국가는 속죄하지 않는 일본 #망망대해 떠도는 독부가 될 것

금수조치란 적개심의 명백한 징표다. 청·일, 러·일 전쟁 때는 조선을 강제로 떼 내 합병한 일본이, 백여 년 후 지금, 중·북·러 진영으로 밀어내는 저의는 무엇인가? 금수조치에 전쟁을 불사했던 나라가 금수조치로 전쟁을 방지한다는 모순된 언명을 어떻게 세계에 납득시킬 수 있는가. 고작 위안부 합의 파기, 징용 배상 판결을 했다고 ‘불신국가’로 낙인찍는 저 졸렬한 행동은 전범 조부(祖父)의 황도노선에 대한 사적 봉공인가, 아니면 팔굉일우(八紘一宇) 깃발로 수백만 명을 살상한 야만을 아예 잊었다는 뜻인가?

가해자도 고통을 느낀다. 그 인간적 비애는 ‘개인사’로 사장되기 쉬운 반면 피해자의 고통은 시대적, 현재적이다. 세대 간에 유증되고 재발한다. 1937년 12월, 일본은 난징 침공에서 30만 명을 학살했다. 일본군은 살인기계였다. 살인, 강간, 학살, 방화 등 모든 유형의 만행을 ‘오족협화’ 명분으로 자행했다. 난징학살추모관 벽에 숫자 ‘300,000’이 쓰여 있다. 악의 평범한 자행, 당시 죄의식은 없었다. 왜 그랬을까? 살인축제에 참여한 병사들은 전후 가슴앓이를 하다가 대체로 1990년대에 죽었다. 국회의원 이시하라 신타로가 중국에 조롱하듯 물었다. 학살 증거를 대보라고. 1942년에 일본군은 ‘삼광(三光)작전’을 벌였다. 모조리 불태우고(燒光), 모조리 죽이고(殺光), 모조리 뺏는다(搶光). 산둥에서만 민간인 수만 명이 생포돼 남방 섬에 보내졌다. 그 중 20%가 죽었다. 전후, 산둥지역 사단장 후지타 시게루(藤田茂) 전범재판에서 중국 법정은 금고 13년 형을 언도했다. 후지타 중장은 오열했다. 사형시키라고 울부짖는 방청객들에게 재판장은 북경 지도부의 말을 전했다. ‘일본과의 영원한 우정을 고려해 용서한다.’ 중국 정부는 200만 일본 포로를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호사카 마사야스. 정선태 역, 『쇼와 육군』)

몇 년 전, 난징학살추모관에서 만난 대학생은 시진핑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말했다. ‘용서한다. 그러나 잊지는 않겠다.’ 수십만 동족의 죽음을 어찌 묻을 수 있을까만, ‘용서한다’는 그 한 마디가 평화의 심성이다. 전범 일본은 이런 토대를 만들었는가? 1955년생 필자는 어떤가? 나의 ‘적의’는 100만 징용자의 강제노역, 수만 징병자의 죽음, 수천 명 무고한 조선인의 학살 현장에서 피어오른다. 3·1운동 당시 농민, 학생시위대 교살 장면은 분노를 현재화하고야 만다. 가해는 다르다. 가해 당사자가 죽으면 기억은 묻힌다. 독일처럼, 지도자가 꾸준히 기억을 들춰내지 않으면 ‘현시대사(史)’가 되지 않는다.

1954년생 아베는 아니다. 그는 전쟁세대가 이웃 나라에서 벌인 잔인한 범죄를 죽은 조개처럼 역사의 무덤에 버렸다. 하얼빈에서 난징, 미얀마에서 남양군도까지, 평화·속죄를 담은 일본조형물은 없다. 대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 피해 위령탑을 세웠다. 그렇게 둔갑한 역사를 밟고 선 아베의 대륙 ‘적개심’과, 식민지민의 통한이 일상 속에 재현되는 필자의 ‘적의’ 사이에 접점이 있을 리 없다.

급부상한 중국, 틈을 노리는 러시아, 핵보유국 북한의 위협 앞에 아베는 화려했던 제국(帝國)이 일개 민족국가로 축소되는 위기감을 느꼈을 터이다. 한국의 북한 포용정책도 심각한 위협이기에 차제에 ‘일본 대(代) 대륙’의 원점에서 전의를 다지고 싶은 게다. 섬나라로 위축된 불만을 확산해 혐한(嫌韓) 강병(强兵)의 길로 나서는 아베의 일본에겐 안중근 의사의 질책이 딱 들어맞는다. ‘용과 호랑이 위세로 뱀과 고양이 행동을 한다.’ 110년 전, 안중근 의사가 ‘동양평화론’에서 이렇게 썼다. 서세동점 환란, 특히 러시아의 위협을 동양인이 일치단결해 막는 것도 벅찬데, “어찌하여 동종인 이웃 나라를 치고 우의를 끊어 스스로 방휼지세(蚌鷸之勢)를 만드는가?”

전범국가 일본에 묻는다. ‘조개와 도요새가 물고 물리는 형세’를 이 시대에 다시 연출해서 무엇을 꾀하고자 하는가? ‘이웃 나라를 해치는 자는 독부(獨夫) 신세를 면치 못하거늘’, 한국을 대륙에 밀어붙이고 일본은 망망대해를 떠도는 독부가 되려 하는가?

그대들이 짓밟은 이웃 나라의 고통을 진정으로 공감한다면, 5억 달러 보상금이 시대사적 고통, 인륜적 패악을 완치한다고 생각하는가? ‘불신국가’는 외려 전쟁범죄를 망각한 자국 일본임이 분명해졌다. ‘동양평화론’의 대국적 가르침으로 쇠붙이의 유혹을 겨우 진정시켰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