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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갑생의 바퀴와 날개] 80여년전 ‘에어컨’과 첫 만남…여름에 기차 창문이 닫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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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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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일본의 만철이 운행을 시작한 특별급행열차 ‘아시아’에는 에어컨도 설치됐다. [중앙포토]

1934년 일본의 만철이 운행을 시작한 특별급행열차 ‘아시아’에는 에어컨도 설치됐다. [중앙포토]

요즘처럼 더운 여름에 열차나 지하철을 타면 꽤 시원함이 느껴지는데요. 간혹 “실내가 춥다는 민원이 들어와서 냉방을 줄인다”는 지하철 기관사의 안내 멘트가 나올 정도입니다.

1902년 캐리어, 에어컨 발명 #30년대 미국서 열차에 에어컨 #국내 첫 냉방 열차는 관광호 #지하철은 서울 2호선 처음 달아

그런데 사실 열차나 지하철을 타면서 이런 호사(?)를 누린 건 철도의 역사에 비춰보면 그리 오래되지 않습니다.

세계 최초의 철도로 불리는 영국 스톡턴~달링턴 사이 40㎞ 구간을 스티븐슨이 제작한 증기기관차가 시속 16㎞로 처음 주행한 것이 1825년입니다.

에어컨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반응을 묘사한 삽화. [사진 피츠버그 프레스]

에어컨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반응을 묘사한 삽화. [사진 피츠버그 프레스]

일반 열차에 에어컨이 설치되기 시작한 건 이로부터 100년이 넘게 흐른 1930년대 초반 미국에서입니다. 그전까지는 열차의 창문을 열어 바람이 통하도록 하는 게 유일한 냉방 수단이었다고 하는데요.

앞서 에어컨이 발명된 건 1902년입니다. 히터기와 송풍기 제조회사에 다니던 미국의 공학자인 윌리스 하빌랜드 캐리어(1876~1950년)가 개발했는데요.

이 회사 고객인 뉴욕의 한 인쇄소가 여름철이면 고온과 습기 탓에 인쇄용지가 변질돼 고민하는 것을 보고 이를 해결하고자 한 게 발명의 동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캐리어는 뜨거운 공기를 채운 코일 사이로 공기를 통과시키는 기존의 난방 시스템의 원리를 활용해 냉매를 채운 코일 사이로 공기를 보내 온도를 낮추는 방식을 고안해냈는데요.

1915년 직접 ‘캐리어 엔지니어링사’라는 에어컨 회사를 차려 1924년 디트로이트의 허드슨 백화점, 1928년 미 의회에 에어컨을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30년대 초반 열차에 애어컨이 도입되기 시작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1932년 객차에 설치된 에어컨 시험을 담당했던 캐리어사의 한 직원이 그의 친척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객차에 설치된 에어컨에 정말 흠뻑 빠졌다. 객차에 타고 있는 내내 쾌적하고, 열차에서 내릴 때도 마치 처음 탈 때처럼 상쾌한 기분이다”고 적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 등에서만 일부 도입된 열차 에어컨이 얼마 안 있어 만주에 등장합니다. 흔히 ‘만철’로 줄여 부르는 일본의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가 1934년 7월 중국 다롄과 신장(지금의 장춘) 구간에서 운행을 시작한 특별 급행열차 ‘아시아’ 인데요.

바퀴의 지름이 2m나 되는 대형 증기기관차가 끄는 ‘아시아’는 시속 100㎞ 넘는 속도를 자랑하는 데다 에어컨 등 호화시설로 꾸며졌습니다. 당시 만철의 설계자가 미국과 유럽 등지를 돌며 당대 최고의 열차 기술들을 조사하고 도입한 덕분인데요.

호화롭게 꾸며진 아시아호의 전망차. [사진 『만철 일본제국의 싱크탱크』]

호화롭게 꾸며진 아시아호의 전망차. [사진 『만철 일본제국의 싱크탱크』]

『만철 일본제국의 싱크탱크』(저자 고바야시 히데오· 도서출판 산처럼) 를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아시아호 안내에 나선 설계사가 영국에서 온 사절단에게 에어컨 장치를 설명하면서 지폐를 환기구 앞에 놓아두었는데, 그것이 천장의 입구에 딱 들러붙자 일행은 ‘원더풀’을 연발하며 감탄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언제 처음 에어컨 달린 열차가 들어왔을까요. 철도 관련 기록들을 보면 1969년 2월 서울~부산 구간에서 처음 선을 보인 특급 ‘관광호’ 라고 합니다. 서울 노량진에서 인천 제물포를 연결하는 경인선 철도가 개통한 게 1899년이니 꼭 70년 만입니다.

1969년 도입된 국내 최초의 에어컨 열차 '관광호'. 객차 지붕에 에어컨용 설비가 보인다. [뉴스1]

1969년 도입된 국내 최초의 에어컨 열차 '관광호'. 객차 지붕에 에어컨용 설비가 보인다. [뉴스1]

앞서 일제 치하인 1939년 특급 ‘아카쓰키’에 에어컨이 설치되긴 했지만, 우리 열차는 아니었기에 ‘관광호’를 국내 최초의 에어컨 열차로 평가합니다.

당시 관광호는 에어컨은 물론 서양식 변기와 전자레인지까지 갖춘 초호화 열차였다고 하는데요. 요금도 지금 기준으로 보면 서울~부산이 40~50만원 정도라고 하니 서민들로선 엄두를 내기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이 관광호는 5년 후인 1974년 ‘새마을호’로 이름을 바꿉니다. 이후 도입된 특급열차들은 대부분 전기 냉난방시설들을 갖추게 됩니다.

반면 지하철은 에어컨 도입이 좀 늦습니다. 미국 뉴욕도 지하철에 에어컨이 설치된 건 1950년대 후반이라고 하는데요. 본격적으로 보급된 건 1960년대와 70년대입니다.

지하철 역시 세계 최초로 개통한 영국의 런던은 상황이 더 나쁩니다. 일부 노선을 제외하곤 아직도 지하철에 에어컨이 없습니다. 터널에 환기 기능이 거의 없는 데다 차량 역시 작아서 에어컨 설치가 쉽지 않다고 하는데요. 이 때문에 한여름에는 차내 온도가 거의 섭씨 40도에 육박하는 등 ‘찜통 지하철’이 된다고 합니다. 노선 길이가 70여㎞로 런던 지하철 중 가장 긴 센트럴 선의 경우 2030년은 돼야 에어컨 지하철이 들어올 거란 소식입니다.

우리나라는 1974년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됐는데요. 당시에는 에어컨은 없이 천장에 달린 선풍기가 전부였습니다. 서울 지하철 2호선이 순차적으로 운행하기 시작한 1983년 마침내 에어컨이 구비된 지하철이 등장하게 되는데요. 1호선도 1989년 마침내 선풍기를 떼어내고 에어컨을 달기 시작합니다.

인쇄소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고안된 에어컨이 기차를 만나 새롭고 쾌적한 철도 여행을 가능케 했다는 사실이 요즘 같은 더위 속에 새삼 흥미롭습니다.

강갑생 교통전문기자 kksk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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