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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깊이읽기] 해석의 양념 뺀 세계사 '날것의 현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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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1912년 대서양 항해 도중 빙산과 충돌해 침몰했던 호화여객선 타이타닉호. ‘절대로 가라앉지 않는 배’라는 명성에 무색하게 1500여 명의 사망자를 낸 대형참사였다.

역사의 원전

원제:The Faber Book of Reportage
존 캐리 엮음, 김기협 옮김, 바다출판사, 896쪽, 3만원

역사학자는 기록자의 관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료를 다시 나름의 관점과 해석의 틀에 따라 요리해낸다. 그렇게 굽거나 끓이거나 볶아서 향신료를 넣고 고명을 얹어 나온 요리가 아니라, 원재료의 맛이 싱싱하게 살아 있는 요리를 먹을 수는 없을까?

옥스퍼드대학 영문학 교수 존 캐리가 엮은 이 책에서 바로 그런 요리들과 만날 수 있다. 역사의 현장을 목격한 이가 기록한 글과 목격자의 진술에 근거해 제3자가 기록한 것, '해석의 덧칠이 가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원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기록'을 골라 엮은 덕분이다. 그 현장의 시대 범위는 기원전 5세기부터 1980년대 초까지 2500년에 달하며 지역은 유럽이 주요 무대지만 사실상 전 세계를 포괄한다.

1950년 11월 27, 28일에 레지널드 톰슨이 목격한 청천강에서의 미군 후퇴 상황이다. '수천 수만 개의 횃불과 모닥불에서 솟는 연기가 달의 모습을 지워버리고 고생하는 피난민들의 맥 빠진 모습을 실루엣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어떤 고대 벽화와도 같은 모습, 끝없이 되풀이되는 민중의 역할, 인간의 이야기는 터벅터벅 이어져 간다. 밤이 된들 휴식도 취침도 없었다. 경보가 정신 없이 울리면 5초 이내에 공격이 들어왔다.'

70년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킬 당시 제 아들을 먹은 어느 여인의 울부짖음을 유대인 역사가 조세푸스가 기록했다. '불쌍한 아가야, 전쟁과 기아로 가득한 이 세상에 너를 살려둬서 뭐 하겠니? 로마군이 들어올 때까지 살아남는다 해도 노예가 될 수밖에 없고, 어차피 노예가 되기도 전에 굶주림이 우리를 덮칠 거다. 그리고 반도(叛徒)들은 로마군이나 굶주림보다도 더 잔인하구나. 자, 아가야, 내 식량이 돼라. 그래서 반도들에게 분노의 복수가 되고, 유대인의 처참한 수난을 완결짓는 공포의 이야기를 이 세상에 남기거라.'

엮은이도 밝히고 있거니와 이 책에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에 관한 것도 많지만 '천박한 이야기든, 하찮은 이야기든, 독자들 마음의 눈에 그림자를 확실히 새길 만한 내용'도 많다. 엮은이는 사건의 역사적 중요성을 따지기 전에 관찰과 서술의 수준을 우선적으로 살핌으로써 '해설의 덧칠이 없는 순수한 현장 기록'을 꾀했다.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의 처형 현장, 타이타닉호 침몰 당시 어느 화부(火夫)의 기록, 10세기 바이킹족의 장례식장, 아즈텍인들이 인간 제물을 바치는 장면, 1차 대전 당시 독일 유(U)보트의 영국 함선 공격 현장, 훈족 아틸라왕이 베푼 만찬 모습, 흑사병의 창궐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참상.

이 책에 실린 180개의 현장 기록을 읽다보면 역사를 읽는 게 아니라 '역사를 살고 있다'(프랑스 역사학자 쥘 미슐레)는 기분이 든다. 번역에 그치지 않고 각 기록의 배경을 꼼꼼하게 해설한 편역자가 독자들에게 '역사를 바라보는 방법 그 자체에 관심을 기울여 달라' 당부한 것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표정훈(출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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