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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파가 몽땅 사라졌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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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7호 17면

안충기의 삽질일기

잎채소 계절이 가고 이제 열매채소 계절이다. 모진 비 맞으면서도 익어가는 열매들. 가지는 상처투성이고, 오이는 허리 굽고 배까지 볼록하다. 옥수수에는 벌레가 들고, 토마토는 갈라지고 터졌다. 마트 진열대 위에서 매끈한 피부를 뽐내는 열매들과는 거리가 멀다. 고추는 그나마 낫다. 숨은그림찾기: 빨간 고추

잎채소 계절이 가고 이제 열매채소 계절이다. 모진 비 맞으면서도 익어가는 열매들. 가지는 상처투성이고, 오이는 허리 굽고 배까지 볼록하다. 옥수수에는 벌레가 들고, 토마토는 갈라지고 터졌다. 마트 진열대 위에서 매끈한 피부를 뽐내는 열매들과는 거리가 멀다. 고추는 그나마 낫다. 숨은그림찾기: 빨간 고추

눈을 의심했다. 한 주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대파가 몽땅 없어졌다. 대체 어떤 자가… 뚜껑이 확 열리며 눈에 번쩍 불이 켜졌다. 고라니가 대파를 먹는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먹더라도 뿌리는 남길 텐데, 이건 어떤 흔적도 없다. 저쪽에서 밭 쥔장이 대형 수조를 채우러 오고 있었다.

봄부터 애지중지 돌봤는데 #대체 누가 탈탈 털어갔을까 #수색을 하다가 옆밭을 보니… #아닐 거야, 설마 그럴 리가

“아니 여기 있던 파 다 어디로 갔대요? 누가 뽑아간 거 같은데….”

장마 지나간 밭의 몰골. 잎채소가 있던 자리는 아마존 밀림이 됐다. 들깨 너만 믿는다.

장마 지나간 밭의 몰골. 잎채소가 있던 자리는 아마존 밀림이 됐다. 들깨 너만 믿는다.

“에이 그럴 리가, 내가 매일 왔다 갔다 하는데. 여기는 여태까지 도둑맞은 일 없어요. 사장님 밭에는 나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와요. 그 분들이 가져간 거 아녜요?”

쥔장은 그렇잖아도 큰 목청을 더 크게 열며 펄쩍 뛰었다. 사장님은 나를 가리키는 말이다. 서리를 당했는지 아닌지도 모르고, 당했더라도 쥔장을 나무랄 생각이 아니었다. 쥔장이 너른 밭을 하루 종일 보고 있을 수도 없고, 작물들 키가 자라 은폐 엄폐가 쉬우니 서리꾼이 작정하면 막을 방법이 없다. 이럴 때 여러 말이 오가면 서로 감정 상하기 십상이다. 애꿎게도 내 밭에 오는 손님들이 의심을 받는 상황이 됐다.

서리당하기 전의 파밭, 생각할수록 아깝고 원통하고 분하다.

서리당하기 전의 파밭, 생각할수록 아깝고 원통하고 분하다.

남들 보기에 너저분한 풀밭처럼 보이지만 파밭은 봄부터 내손이 가장 많이 갔다. 키 큰 풀들을 갈 때마다 뽑아주고 고랑에는 다른 데서 뽑아낸 풀들을 부지런히 깔아줬다. 친구 오 이장이 신탄진까지 가서 모종을 사다 심었다. ‘이장’은 밭일의 대소사를 맡은 친구를 농사동무들끼리 부르는 이름이다. 나 혼자 농사지으며 이장을 자칭하다가 여럿이 모이며 슬쩍 떠넘겼다. 일 잘하고 붙임성 있고 사람 잘 챙기는 친구라 적격이었다. 동무들은 수시로 지인들을 불러다 고기 굽고 놀며 채소 한 봉지씩을 들려 보낸다. 채소가 한창일 때는 동무들과 그 지인들이 실컷 뜯어가도 남는다. 그러니 몰래 와서 서리할 리는 없다. 뽑아갈 때는 먹을 만큼 적당히, 다른 친구들을 생각하는 우리 밭의 불문율이다.

섭씨 35도. 낫질 몇 번하니 등골에 땀이 줄줄 흐른다. 두 시간도 일하지 못 하고 샘가로 도망쳤다. 밭 쥔장이 넋 나간 내 꼴을 보더니 ’이 날씨에 뭔 일을 그리... 그러다 큰일 나요.“ 그늘과 땡볕을 가르는 선이 천국과 지옥의 경계다.

섭씨 35도. 낫질 몇 번하니 등골에 땀이 줄줄 흐른다. 두 시간도 일하지 못 하고 샘가로 도망쳤다. 밭 쥔장이 넋 나간 내 꼴을 보더니 ’이 날씨에 뭔 일을 그리... 그러다 큰일 나요.“ 그늘과 땡볕을 가르는 선이 천국과 지옥의 경계다.

파가 있던 자리를 살펴봤다. 알뜰하게 훑어갔다. 대파는 아니라도 중파만큼은 자랐는데 젓가락 같은 뿌리 두엇만 남았다. 서두르다가 흘렸는지 실파 몇 뿌리가 땡볕에 나뒹굴고 있었다. 엎질러진 물이고 죽은 자식 부랄 만지는 격이니 잊어버리자며 부지런히 낫질을 했다. 일하다 보면 타는 속이 좀 식을까 했는데 웬걸 땀이 날수록 부아가 끓어올랐다. 낫을 마구 휘두르다가 오이덩굴 밑동을 싹둑 잘라버렸다. 통통하게 다 자란 오이 둘과 줄줄이 꽃을 달고 있는 줄기였다. 낫을 집어 던졌다.

새떼인지 쥐떼인지가 익어가는 옥수수를 덮쳤다. 죽 쒀서 개 줬다.

새떼인지 쥐떼인지가 익어가는 옥수수를 덮쳤다. 죽 쒀서 개 줬다.

혹시 무슨 단서가 있을까 해서 주변 정찰과 수색에 나섰다. 범인은 반드시 흔적을 남기는 법이다. 그런데, 한 칸 건너 옆 밭에 못 보던 파밭이 생겼다. 밭 두 개에 허리 자른 파가 절반씩 누워있었다. 한쪽은 따낼 때가 된 강낭콩 울타리 안이고, 다른 쪽은 꽃핀 상추를 뽑아낸 자리다. 그 옆 통로에는 잘라버린 윗부분이 흩어져 있었다. 심어놓고 잔뜩 물을 준 모양인데 흙이 다 마르지 않은 걸로 보아 하루나 이틀 전에 심은 게 분명했다. 고랑과 이랑을 내고 비스듬히 묻은 솜씨가 농사 좀 지어본 사람이다. 눈대중으로 보니 내 밭에 있던 파의 양과 비슷했다. 밑동의 굵기도 내 밭에 있던 파처럼 들쭉날쭉했다. 염천에는 모종을 팔지 않는다. 씨를 넣어봐야 물러버린다. 혹시 판다고 해도 대파 모종은 실처럼 가늘고 새끼손가락 길이 밖에 안 된다. 그러면 저 파는 어디서 가져왔을까.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집으로 돌아오며 밭 주변에 늘어선 비닐하우스를 눈여겨봤다. 봄부터 갖가지 모종을 키워 파는 화원들인데 어디에도 파는 없었다.

설마 옆집 밭을 털어갔을까. 국물도 남기지 않고 탈탈, 풀이 많으니 버린 밭이라고 단정했나, 그래도 오가며 내 얼굴을 봤을 텐데, 파는 다른 데서도 얼마든지 얻어다 심을 수 있잖아, 괜한 의심은 그만 … 생각이 생각을 불렀다.

집에 와서 단톡방의 농사동무들에게 비극을 전했다.

“쥔장은 밭을 오가는 우리 쪽 아녀자들이 그랬을 거라는데 아무래도 그건 아닌 거 같구먼”

밭 주위를 환하게 밝히며 벌떼를 불러 모으던 접시꽃, 이제 열매가 더 많다.

밭 주위를 환하게 밝히며 벌떼를 불러 모으던 접시꽃, 이제 열매가 더 많다.

애먼 이들을 의심하는 것 같아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찌 보면 별 일 아닌데 자칫하면 서로 의가 상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실종 사건을 공개하지 않으면 다들 의아할 터였다. 역시 우리 편에서는 누구도 뽑아가지 않았다. 깨끗이 잊기로 했다. 파고들어봐야 머리만 아프고, 집 나간 대파가 돌아올 리도 없으니 말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 마무리 장면, 비 쏟아지는 터널 앞에서 형사 송강호가 연쇄살인용의자 박해일을 개 패듯이 두들긴다.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는 상황이다. 그러며 한마디 던진다. “밥은 먹고 다니냐”

삽질일기

삽질일기

내 밭에서 벌어진 ‘서리의 추억’도 심증만 있을 뿐이다. 그래도 범인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 “파는 먹을 만 하냐”

아, 이러면 내가 속 좁은 사람이 되니까 정정해야겠다.

“맛나게 잡수세요. 파하하하하”

그림·사진·글=안충기 아트전문기자 newnew9@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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