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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 갑질 두 배로 갚아준다? 일본 현실에선 바로 퇴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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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7호 25면

전 아사히신문 기자의 ‘일본 뚫어보기’

최근 경복궁 근처의 한옥 게스트하우스를 찾았다. 일본에서 온 지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지인은 윤동주 시인의 팬이다. 『윤동주 평전』이라는 두꺼운 책을 일본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이번엔 KBS가 주최하는 3·1운동 100주년 기획 ‘윤동주 콘서트 별 헤는 밤’이라는 행사에 초대를 받아서 왔다. 그 이야기를 들은 게스트하우스 주인 가족은 반가워하면서 “우리 가족은 일본 소설을 좋아합니다”라고 하며 몇 권의 책을 보여 줬다.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등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소설 한국어판이었다. “몇 번씩 되풀이해 읽었다”며 "일본에 여행을 가서 소설에 나오는 곳을 방문하기도 했다” 고 한다. 한국과 일본의 문학에 대해 한참 즐겁게 대화를 나누다가 주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나저나 한·일 관계가 악화해서 걱정이네요…….”

소설 『한자와 나오키』 로 본 한·일 관계 #일본서 크게 히트 친 드라마 원작 #최근 한국어로 번역돼 베스트셀러 #현재 일본 이해하는데 도움될 듯 #비자 걱정할 정도로 관계 나빠져 #문화교류까지 끊기지는 말았으면

외국소설 15위 내 일본 소설 7권 올라

2013년 일본에서 순간 최고 시청률 50%를 넘긴 드라마 ‘한자와 나오키’의 장면들. [사진 나리카와 아야]

2013년 일본에서 순간 최고 시청률 50%를 넘긴 드라마 ‘한자와 나오키’의 장면들. [사진 나리카와 아야]

일본 정부의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를 계기로 한·일 관계가 급속히 나빠지고 있다. 합쳐서 4년 반 한국에 살고 있는 내가 보기엔 지금이 최악인 것 같다.

마음 아픈 일이지만 걱정해서 연락해 주는 한국 친구들도 많다. 사실 아직 피해를 본 건 없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가 걱정이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다음 비자 갱신이다. 지난번 갱신할 때도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갈 때마다 추가로 필요하다는 서류가 늘어나고 몇 번 갔다가 포기해서 일본으로 귀국할 뻔했다. “한·일 관계 때문인가”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한국 거주 일본사람 중에 나와 비슷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8월은 원래 휴가철이라 비행기 값이 비싼 편이지만 최근 도쿄행 티켓을 알아보니까 평소보다 저렴했다. 일본에 놀러 가기로 했던 한국사람들이 잇따라 취소한 모양이다. 일본에 가도 주변에 이야기하지 않고 SNS에도 올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솔직히 한·일 관계가 그렇게 좋았던 적은 없지만 최근 몇 년은 정치적으로는 안 좋아도 문화교류는 활발하다고 느꼈었다. 이번에도 과연 그럴까.

한자와 나오키

한자와 나오키

궁금해서 광화문 교보문고로 가 봤다. 외국소설 코너에는 평소대로 일본 소설이 많이 보였다. 지난 7월 18일 현재 순위를 보면 15위 내에 일본 소설 7권이 들어 있었다. 그렇게 빨리 영향이 나타날 리가 없는 건 알지만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중 히가시노 게이고(東野圭吾)의 소설이 4권이었다. 14위에는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노르웨이의 숲』이 들어 있었다. 『노르웨이의 숲』은 일본에서는 1987년에 출간된 작품인데 한국에서는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일본 소설 붐을 일으킨 작품이다. 『상실의 시대』를 출판한 문학사상에 의하면 100만 부 이상이 팔렸다고 한다. 현재 14위에 있는 건 민음사에서 나온 『노르웨이의 숲』이다.

한국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일본 소설가는 히가시노 게이고와 무라카미 하루키인 것 같다. 그런데 순위를 보면서 반가웠던 건 5위 이케이도 준(池井戸潤)의 『한자와 나오키』다. 2013년에 방송된 같은 제목의 드라마는 일부 지역에서 순간 최고 시청률이 50%를 넘은 전설적인 드라마다. 원작 소설은 일본에서는 다른 제목으로 나왔지만 드라마의 지명도가 높아서인지 한국에서는 소설도 『한자와 나오키』라는 제목으로 지난 6월 번역출판됐다.

주인공 한자와 나오키(半沢直樹)는 은행원이다. 은행 안의 승진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 거래처 기업들과의 밀당, 채권 회수 등이 아주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그건 이케이도 본인이 은행원 출신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드라마 ‘한자와 나오키’는 일반 회사원들이 가진 욕구를 대변해 줬기 때문에 큰 히트를 친 것 같다. 이 드라마로 유행한 대사는 “바이가에시(倍返し)”다. 배로 갚는다는 뜻으로 2013년 유행어 대상을 받았다. 한국어판 소설 부제는 ‘당한 만큼 갚아 준다’지만 원래는 두 배로 갚는 복수극이다.

한국사람들이 보기에도 일본사람들은 전체적으로 얌전해 보일 것이다. 특히 도쿄는 사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지하철이나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부부든 친구든 일본사람들은 불만이 있어도 말로 표현하지 않고 참는 경우가 많다. 하물며 회사 상사에게 대드는 일은 거의 없다. 참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이상한’ 문화가 있다. 분위기를 깨고 발언하는 사람을 ‘KY’라고 부르며 안 좋게 볼 정도다. 분위기 파악을 못 한다는 뜻으로 “구키오 요메나이(空気を読めない)”에서 온 신조어다.

닮은 듯한 한국·일본 살아보면 아주 달라

한국에서 지난 6월 번역출판된 『한자와 나오키』와 원작 소설가 이케이도 준.

한국에서 지난 6월 번역출판된 『한자와 나오키』와 원작 소설가 이케이도 준.

그런 일본에서 상사에게 두 배로 갚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마음속으로는 상사가 잘못됐고 불합리하다고 생각해도 말로 못 하는 회사원들은 이 드라마를 보고 대리만족을 느꼈을 것이다.

실제로 한국의 뉴스 중 일본에서 크게 관심을 얻는 것 중 하나가 ‘갑질’ 관련 뉴스다. 일본에서는 ‘파와하라’라고 한다. 파워 허래스먼트(power harassment)의 줄임말이다. ‘땅콩 리턴’ 사건, ‘물컵 갑질’ 사건 등이 일본에서도 엄청나게 화제가 됐다.

아마도 갑질은 한·일 공통의 관심사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자와 나오키’의 복수극의 카타르시스는 한국 독자들에게도 매력적으로 다가갈 것이다.

다만 나의 경험으로 보면 일본사람보다 한국사람이 더 상사에게 의견을 정확히 이야기하는 편이긴 하다. 그것을 알게 된 건 대학생 때였다. 한국에서 1년의 어학연수를 마치고 일본에 돌아왔는데 한국어를 쓰는 아르바이트를 찾다가 한국 식당에서 서빙 일을 하게 됐다. 나를 제외한 모든 알바생은 한국 유학생이었고 점장도 주방장도 모두 한국사람이었다. 그런데 나랑 비슷한 나이의 한국 여학생들이 나이가 두 배로 보이는 점장한테 “그건 아니에요!”라고 확실하게 의견을 이야기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일본 식당이었다면 바로 잘렸을지도 모른다.

일본에서 5년 동안 일해 본 한국 친구는 소설 『한자와 나오키』를 읽자 “무엇이든 매뉴얼화해서 과정을 중요시하는 일본, 융통성을 앞세워 그때그때 상황을 대처해 가는 한국, 이러한 한·일 차이도 결국은 사람이 만든 조직에서 나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주인공 한자와가 꼼꼼하게 과정을 따지는 사람이고 그런 식으로 상사들에 착실하게 반박하기 때문이다.

일본과 한국은 닮은 듯하지만 살아 보면 아주 다르다는 것을 많이 느낀다. 살아 보지 않아도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부분도 있다. 내가 문화교류에 힘을 쓰는 것도 단순히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쌍방의 문화를 통해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문화까지 불매운동의 대상이 되어버리면 그건 정말 아쉬운 일일 것이다.

『한자와 나오키』는 현재의 일본을 이해하는 힌트가 될 수도 있다. 소설의 배경은 버블경제 붕괴 후의 일본이다. 한국 독자들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상기할 수도 있겠다. 일본에서 버블경제가 무너진 건 1990년대 전반이다. 당시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영향을 받긴 받았다. 재빨리 붕괴를 알아챈 아버지는 오사카(大阪)의 집을 팔고 고치(高知)로 이사를 한 것이다. 버블 붕괴가 없었다면 죽 오사카에 살았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오사카 출신이지만 아버지는 시골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었고 집값이 폭락하기 직전에 그걸 실현한 것이다. 고치를 선택한 건 자연환경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바다나 강, 산을 만끽하며 자랐다.

은행이나 증권회사 도산 뉴스는 남의 일처럼 봤었다. 그게 아니라고 느낀 건 대학교에 입학한 다음이다. 버블 붕괴 후 기나긴 불황 때문에 대학 선배들은 원서를 수십 통 보내도 좀처럼 취업을 못 하고 괴로워했었다. 그것에 비하면 한국은 외환위기 후 정말 빠른 속도로 회복한 것 같다.

일본이 지금 경제가 조금 좋아 보이는 건 정말 오랜 불황기를 겪은 다음의 일이다. 집권 자민당에 대한 젊은 층의 지지율이 높은 것도 외교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고 경제적으로 보다 안정적일 거라는 기대감 때문인 것 같다.

나리카와 아야 전 아사히신문 기자
나리카와 아야(成川彩) 2008~2017년 일본 아사히신문에서 주로 문화부 기자로 활동한 후,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석사과정에 유학. 한국영화에 빠져서 한국에서 영화를 배우면서 프리랜서로 일본(아사히신문 GLOBE+ 등)과 한국(TV REPORT 등)의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칼럼을 집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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