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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 많다고 펑펑 쓰는 남편, 법으로 막을 수 있나요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성우의 그럴 法한 이야기(2)

장남인 내가 유언장 상속 명단에서 빠졌다면? 큰돈을 갚아야할 친구가 갑자기 쓰러졌다면? 가사전문법관으로 서울가정법원 부장판사를 지낸 변호사가 우리가 현재 또는 가까운 미래에 마주할 법률문제의 해법을 사례 위주로 들려준다. <편집자>

홈쇼핑에서 일주일에 30회 정도 물건을 사고, 백화점에서 한 달에 500만원에 달하는 돈을 쓸 정도로 쇼핑 중독인 전업주부 A씨. 남편 몰래 고리로 사채를 빌려쓰고 카드깡, 핸드폰깡으로 돌려막기를 하다가 전세금까지 모두 날렸다. [사진 pixabay]

홈쇼핑에서 일주일에 30회 정도 물건을 사고, 백화점에서 한 달에 500만원에 달하는 돈을 쓸 정도로 쇼핑 중독인 전업주부 A씨. 남편 몰래 고리로 사채를 빌려쓰고 카드깡, 핸드폰깡으로 돌려막기를 하다가 전세금까지 모두 날렸다. [사진 pixabay]

A 씨(36세, 여)는 2012년 결혼하여 슬하에 딸 하나를 두고 있는 전업주부이다. 대전에서 전문대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원으로 잠시 근무하기도 하였는데, 공기업에 다니는 남편을 따라 서울로 이사한 후부터는 육아에만 전념하였다.

전업주부가 되고는 폭식을 하는 횟수가 늘어나더니, 2년 전부터는 일주일에 홈쇼핑으로 물건을 사는 것이 30회에 이르고, 한 달에 백화점에서 4~500만원이 넘는 돈을 쓰기 시작했다. A 씨의 소비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알게 된 남편에게, 필요 없는 물건을 마구 사지 않겠다는 각서를 여러 번 쓰기도 하였지만, 그것도 잠시뿐 그녀의 쇼핑중독과 낭비벽은 점점 심해져만 갔다.

남편 몰래 고리로 사채를 빌려 쓰고, 이른바 카드깡, 핸드폰깡 등으로 간신히 돌려막기를 하다가, 결국에는 전세금을 모두 날리고도 한참 모자랄 지경에 이르자 친정으로 도망쳐 버렸다. 친정 부모로부터 호된 질책과 함께 빚 갚을 돈을 얼마 받아 들고 약 두 달 만에 집에 돌아왔다. 남편에게 백배사죄하고 간신히 용서를 받았지만, 두 달도 지나지 않아 매일 아침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는 다시 백화점으로 향하고 있다.

결혼 후에도 특별한 직업을 가지지 않고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부동산 수익으로 살고 있는 B씨. 고가의 자동차 리스 비용과 유흥비, 대부업체 이자 등을 감당하려다 남은 재산을 담보로 빚만 늘고있다. [연합뉴스]

결혼 후에도 특별한 직업을 가지지 않고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부동산 수익으로 살고 있는 B씨. 고가의 자동차 리스 비용과 유흥비, 대부업체 이자 등을 감당하려다 남은 재산을 담보로 빚만 늘고있다. [연합뉴스]

B 씨(47세, 남)는 서울 시내 명문대학교와 대학원을 나왔고, 2005년 결혼하여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B 씨는 큰 사업을 하는 아버지 덕분에 유복한 생활을 하였는데, 결혼 후에도 특별한 직업을 가지지 않고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성수동 건물과 양재동 상가, 한남동 주택과 남양주 토지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살고 있었다. 그런데 3년 전부터는 클럽에 가야 한다고 하면서 밤늦게 돌아다니고, 잠은 2시간 정도만 자기 시작했다.

난폭 운전으로 시비가 붙기도 하고, 여자 치마 속을 핸드폰으로 촬영하는 등 이상행동을 하는 일이 잦아졌다.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이 미국에서 큰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고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술집에서 만난 여자에게 스폰서를 한다고 하면서 강남에 있는 아파트와 고급 승용차, 고액의 생활비용을 대주는 일까지 생겼다. 가족의 권유로 정신과 치료를 잠깐 받은 적도 있었지만, 이내 치료를 거부하면서 지금은 집을 나가 홀로 지내고 있다.

물려받은 재산이 상당하였지만, 그중 일부는 이미 팔아서 없어졌고 고가의 자동차 리스 비용과 유흥비, 자신과 술집 여성의 생활비, 대부업체 이자 등을 감당하기 위하여 남은 재산을 담보로 빚을 늘려가고 있다.

A 씨나 B 씨와 같이 무분별한 낭비로 재산을 탕진함으로써 자신은 물론 가족의 생계를 위태롭게 하는 사람이 혼자서는 물건을 사거나 빚을 지지 못하게 할 수 있을까? 그가 이미 저질러 놓은 일들을 취소할 수는 있을까?

생소한 용어일 수도 있고 이름 정도는 들어본 용어일 수도 있겠지만, 2013년에 개정되기 전 민법에는 '금치산자(禁治産者)' '한정치산자(限定治産者)'라는 말이 있었다. 말 그대로 풀어쓰면 '재산을 다스릴 능력이 없는 사람' '재산을 돌볼 능력이 부족한 사람'을 의미하지만, 법률적으로는 자신이 하는 법률행위의 의미를 알고 단독으로 유효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이 없거나 부족한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당시 민법은 한정치산자의 예로 '낭비자(浪費者)'를 들고 있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낭비자'는 전후 사정에 대한 고려 없이 재산을 탕진하는 습성이 있어서, 자기나 가족의 생계를 어렵게 할 염려가 있는 사람이다.

과거 민법에 의하면 한정치산선고를 받을 경우 후견인의 동의가 없으면 단독으로 물건을 사거나 돈을 빌릴 수 없었다. 2013년부터는 금치산자, 한정치산자 제도가 없어지고,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인권에 주목한 성년후견제도가 도입됐다. [사진 pxhere]

과거 민법에 의하면 한정치산선고를 받을 경우 후견인의 동의가 없으면 단독으로 물건을 사거나 돈을 빌릴 수 없었다. 2013년부터는 금치산자, 한정치산자 제도가 없어지고,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인권에 주목한 성년후견제도가 도입됐다. [사진 pxhere]

낭비의 정도는 그 사람의 지위나 재산에 따라 개별적으로 고려되고, 반드시 비도덕적인 목적에 소비하는 것만이 낭비인 것이 아니라 교육·종교·자선 등을 위하여 소비하는 경우라도 본인과 가족의 생활 상태, 재산, 지위에 비추어 과다한 소비로 가족의 생계를 위태롭게 하면 낭비가 될 수 있었다.

A 씨와 B 씨는 예전의 민법에 의하면 낭비자로서 한정치산 선고를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낭비자로 한정치산선고를 받으면, 후견인이 동의해 주지 않으면 단독으로 물건을 사거나 돈을 빌리는 것과 같은 법률행위를 할 수 없고, 동의 없이 한 낭비자의 행위는 후견인이 나중에라도 취소할 수 있었다.

금치산자나 한정치산자, 특히 낭비자 제도는 과거 농경을 주로 하던 대가족시대에 한 가족이나 가문 전체의 재산을 보호하는 기능을 하였고, 때로는 낭비자에 대한 징벌적 효과와 나머지 가족들에 대한 예방적, 교육적 효과를 기대하였다. 한편 부모와 같은 가까운 가족이 없는 재산 소유자가 정신 능력이 다소 떨어진다는 것을 이용하여, 주위에 있는 친척 등이 이 제도를 이용하여 실질적으로 재산을 탈취할 목적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금치산, 한정치산제도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속한 집안의 재산을 보호하고 거래의 안전을 도모하는데 일정 부분 기여하였을지는 몰라도, 정작 도움을 받아야 할 정신장애인을 위한 제도는 아니었다. 개인적인 잔존능력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아무 행위도 못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도움을 받아야 할 바로 그 사람의 생각이나 이익의 보호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2013년 금치산자, 한정치산자 제도가 없어지면서 새롭게 도입된 성년후견제도는 과거의 제도에 비하여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인권에 주목한 제도이다. 한국 전통사회에서 정신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을 보호해 오던 대가족제도나 지역적·혈연적 공동체는 사회제도나 가치관의 변화에 따라 이미 대부분 사라지거나 예전과 같은 기능을 담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최근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도 남아있는 능력의 범위 내에서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하면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하고, 일률적으로 배제해서는 안된다는 의식의 변화도 있다. [연합뉴스]

최근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도 남아있는 능력의 범위 내에서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하면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하고, 일률적으로 배제해서는 안된다는 의식의 변화도 있다. [연합뉴스]

그뿐만 아니라 이제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도 남아 있는 능력의 범위 내에서 스스로 무엇인가를 결정하면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하고, 그들을 사회에서 일률적으로 배제하거나 할 수 있는 행동이 없도록 막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의식의 변화도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지조차도 따지지 않고 오로지 가산을 탕진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에서 홀로 아무 일도 못 하게 하는 '낭비자' 제도는 전근대적이고 비인권적인 제도였다.

그렇다면 새로운 성년후견제도로는 A 씨나 B 씨의 폭주를 막을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다만 성년후견제도는 질병, 장애, 노령 등으로 인한 '정신적 제약'이 있는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제도이다. 따라서 집안의 재산을 탕진한다는 것만으로는 후견이 개시될 수 없고, 무분별한 재산의 낭비가 정신적인 문제로 인한 것이어야 한다.

실제 재판정에서 A 씨는 남편과 함께 나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자신을 믿을 수도 없고 컨트롤할 수도 없으므로, 자신에게 법률적인 족쇄를 채워 달라고 요청했다. 반면 B 씨는 자신의 정신상태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의 재산을 자신이 마음대로 쓰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지 되물으며, 부인이 이혼소송의 대용으로 자신의 재산을 탈취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후견을 받아야 할 사람의 정신적 상태가 중증 치매나 코마 상태와 같이 명확하게 판정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 A 씨나 B 씨처럼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지가 불분명하거나 서로 다투어지는 경우에는 보통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등 전문가에 의한 감정을 거친다.

재산을 무분별하게 탕진하는 가족이 있다면 먼저 애정을 가지고 그러한 행동에 빠지게 된 원인을 살펴보자. 그에 대한 치료와 배려를 다 한 후에도 방법이 없다면 후견이나 이혼을 고려해 보길 권한다. [사진 pixabay]

재산을 무분별하게 탕진하는 가족이 있다면 먼저 애정을 가지고 그러한 행동에 빠지게 된 원인을 살펴보자. 그에 대한 치료와 배려를 다 한 후에도 방법이 없다면 후견이나 이혼을 고려해 보길 권한다. [사진 pixabay]

감정 결과 A 씨는 경도의 우울증이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반면에 B 씨는 조현병 가족력이 있었고, 본인도 정신과 질환으로 군대 면제를 받았으며, 3주간의 입원감정 결과 양극성정동장애(조울증), 경도의 인지장애 및 사회성숙도 저하 등으로 인하여 금전관리에 필요한 사무처리 능력이 부족하다고 진단되었다. 결국 A 씨는 남편과 함께 상담과 치료를 병행하기로 약속하는 대신 후견 신청을 취하하였고, B 씨에게는 한정후견 결정이 내려졌다.

이처럼 자기와 가족의 재산을 무분별하게 탕진함으로써 가족에게 고통을 주고 생계를 위태롭게 하는 경우에는 그것만으로 독립적인 이혼사유가 될 여지도 있다. 하지만 앞서 본 바와 같이 단지 가족이 낭비벽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행위능력을 박탈하거나 이혼 대신 상대방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후견제도를 이용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먼저 애정을 가지고 가족이 그러한 행동에 빠지게 된 원인을 살펴보고 그에 대한 치료와 배려를 다 한 후에, 더는 방법이 없는 경우에 후견이나 이혼을 고려해 보길 권한다.

김성우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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