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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기업 정책으로 극일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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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손해용 기자 중앙일보 경제부장
손해용 경제정책팀장

손해용 경제정책팀장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256M D램 개발에 성공한 것을 공표한 날은 1994년 8월 29일이었다. 경술국치 84년째 되는 날이었는데, 기술력으로 일본을 눌렀다는 극일(克日)의 의미를 담았다. 이후 삼성전자는 이를 알리는 신문 광고를 냈다. 광고 상단에는 구한말 당시 태극기가 큼직하게 자리 잡았다. 당시 김광호 삼성전자 사장은 “적어도 D램 기술에선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양국이 평등했던) 구한말 이전 상태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7월 9일 B2면 참고> 문재인 대통령이 “지금까지 우리는 가전·전자·반도체·조선 등 많은 산업 분야에서 일본의 절대우위를 하나씩 극복하며 추월해왔다. 우리는 할 수 있다”면서 언급한 사례도 바로 극일의 선봉에 선 이런 기업들이 주인공이다.

주요 경제 지표에서 일본은 한국을 앞선다. 평균적인 경제규모를 보여주는 지표인 1인당 국내총생산(GDP)도 그렇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일본이 1만 달러를 넘은 1981년, 한국은 1870달러로 일본의 18%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후 한국은 꾸준히 격차를 좁혀나가더니 2000년대 들어 이 비율은 50%를 넘어섰고, 지난해 한국의 1인당 GDP는 3만1346 달러로 일본(3만9306달러)의 79.7%까지 따라왔다.

일본 대비 한국의 ‘1인당 GDP’ 수준.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일본 대비 한국의 ‘1인당 GDP’ 수준.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이처럼 일본을 추격하는 한국의 경제 성장에는 기업의 노력과 열의가 바탕이 됐다. 삼성·LG·현대차·SK·포스코·현대중공업 등은 각 분야에서 일본을 추월하거나, 일본이 얕잡아볼 수 없는 글로벌 메이커가 됐다. 우리가 해외에서 ‘괜찮게 사는 나라’로 대접받는 것도 이들이 적극적으로 해외 시장을 개척한 덕분이다.

하지만 지금 기업들은 활력을 잃어 가고 있다. 2년간 29.1%나 오른 최저임금, 세계와는 거꾸로 간 법인세율 인상, 과격 시위를 밥 먹듯 하는 강성 노조, 투자를 옥죄는 각종 규제, 정치권의 ‘기업 패싱’ 등이 발목을 잡고 있다. 이는 문 대통령이 극복 대상으로 지목한 일본이 파격적으로 규제를 풀고 법인세를 낮추는 것과 대비된다. 공교롭게도 IMF는 한국의 일본 대비 1인당 GDP 수준이 2018년 정점을 찍은 뒤 2024년 73.3%까지 계속 떨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일본을 이기려면 우리 기업의 실력을 키우는 길밖에 없다. 반(反)기업·반시장 정책을 고수해서는 안 된다. 다행히 정부가 최근 기업의 세제 혜택을 늘리고, 화학물질 관련 규제를 푸는 등 밋밋하게나마 방향을 바꾸려는 조짐이 보인다. 좀 더 과감한 규제개혁과 경영환경 개선을 통해 기업이 힘을 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진정한 ‘극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손해용 경제정책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