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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트럼프 말대로 될 리 없다”는 정부 유감

중앙일보

입력

간절히 원하면, 정말 이루어질까. 미국의 무역 전쟁 행보를 대하는 우리 정부의 자세를 보고 든 생각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26일(현지시간) 한국을 비롯한 11개국을 겨냥해 “세계무역기구(WTO) 개발도상국 우대 혜택을 받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는 브루나이ㆍ홍콩ㆍ쿠웨이트ㆍ마카오ㆍ카타르ㆍ싱가포르ㆍ아랍에미리트(UAE)ㆍ멕시코ㆍ한국ㆍ터키의 국가명을 나열하며 제일 마지막으로  "중국이 가장 극적인 사례"라고 했다. 트럼프가 겨눈 타깃의 우선 순위는 그가 말한 순서의 역순. 한국은 중국·터키 다음 세번째다.

한국이 받는 농산물 관세 혜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자 정부는 즉각 진화에 나섰다. 농림축산식품부는 “관세 감축 제외는 10년 이상 국제 논의가 중단돼 실현 가능성이 작다”며 “관세율은 미국과 양자 간 바꿀 수 없고 WTO 국가 간 컨센서스(합의)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약하면 “트럼프 말대로 될 리 없다”는 해명이다. 하지만 냉정한 분석이라기보다 간절한 희망에 가깝게 들렸다.

정부로서는 ‘비관론’에 근거한 우려가 과도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비관론이 터무니없는 주장은 아니라는 전문가 지적이 많다. 김완배 서울대 농경제학과 교수는 “정부가 (무역 전쟁이라는) 국제 정세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순진하게 대처하다가 농산물 통상 분쟁 이슈가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서진교 대외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WTO에서 개도국 지위 문제를 다룰 경우 한국을 개도국으로 판단할 가능성이 작다”며 “한국만 못한 개도국도 지위를 포기하는데 ‘나 홀로 개도국’으로 남기 어렵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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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엄포에 대응하는 개도국의 움직임을 들여봤다. 남미의 대표 개도국 브라질은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3월 가진 정상회담을 계기로 ‘탑-다운 ’식 빅 딜에 성공한 경우다. 브라질은 WTO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는 대신 오랜 염원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에 대한 트럼프 지지를 끌어냈다.

대만은 아예 납작 엎드렸다. 지난해 10월 앞장서 개도국 지위를 포기했다. 왕 메이화(王美花) 대만 경제부 차장(차관)은 “대만의 결정이 모범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설명했다. 서진교 위원은 “(개도국으로 남기 원하는) 중국과 차이점을 강조하고 국제 위상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결국 두 나라는 트럼프의 트윗이 겨냥한 개도국 11곳에서 빠졌다.

두 나라가 옳다는 게 아니다. 트럼프의 엄포에 ‘무반응’ 대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각자도생’하는 전략을 택했다는 게 중요하다. 심지어 중국마저 개도국 지위 유지와 관련해 “WTO에서 우리의 경제발전 수준과 역량에 부합하는 의무를 기꺼이 다하겠다”며 유화책을 내민 상황이다.

더욱이 상대는 트럼프다. 그가 합리적이고 WTO 규범을 철저히 지키는 ‘모범생’이라면 모르지만, 반칙(?)을 일삼는 인물인 만큼 무역 전쟁의 불똥이 어디로 튈지 예단할 수 없다. 자유 무역의 원칙을 무시하고 다투는 미ㆍ중 무역 전쟁이 대표적이다. ‘피그말리온 효과(긍정적 기대가 좋은 영향을 미치는 효과)’를 믿고 대응하기에 적절치 않은 상대란 얘기다.

트럼프 발언의 실현 가능성이 1%에 불과하더라도 정부는 “최악의 가능성에도 물샐 틈 없이 대비하겠다”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문제없다”며 피그말리온 효과만 되뇌는 정부에게 지금 필요한 건 ‘거안사위(居安思危ㆍ편안할 때 위기를 생각)’의 자세 아닐까.

김기환 경제정책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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