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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가 지났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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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최인철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최인철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무언가를 창조하는 사람들이란 자발적으로 고통의 세계로 이주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외부의 평가나 보상, 그리고 위협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매일 백지의 원고와 악보·캔버스가 주는 공포와 맞선다. 그들은 내면의 명령에 이끌리는 사람들이기에 그들의 피 속에는 보통 사람들이 겪지 않는 불안과 좌절이 흐른다. 학문을 하는 연구자들도 마찬가지다.

쇠락의 두려움을 용기로 바꿔 #수백, 수천 배 힘을 발휘한다면 #전성기는 언제든 올 수 있는 것

그들은 자신의 전성기가 이미 지났는지도 모른다는 악몽에 시달린다. 과연 전성기가 올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의심으로 고통스러워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물리학자에게는 공포다. 서른을 넘긴 물리학자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폴 디랙(Paul Dirac)의 말을 듣고 나면 그 공포는 거의 패닉 수준으로 상승한다. 천재의 독선이라고 웃어넘기려 해도, 물리학 분야에나 적용되는 법칙일 거라고 아무리 자위하려 해도, 나이와 함께 찾아오는 정신의 쇠락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서른 넘은 물리학자는 죽는 게 낫다”

하버드대학의 아서 브룩스(Arthur Brooks) 교수는 연구 결과라는 이름으로 이 공포를 한껏 부추긴다. 그는 ‘애틀랜틱(The Atlantic)’이라는 미국 시사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우리의 전문성은 우리의 예상보다(더 정확히는 우리의 바람보다) 훨씬 일찍부터 쇠퇴하기 시작한다고 주장한다. 그러고는 자기 연구 결과에 충실하고자 오랫동안 맡았던 미국의 유명한 싱크탱크 CEO 자리를 그만두었다. 예전 같지 않은 현재의 자기 자신, 그리고 결코 예전 같지 않을 미래의 자기 자신을 보며 용퇴한 것이다. 그의 이런 행보는 우리를 심하게 위축시킨다.

물론 나이와 함께 전문성이 크게 쇠락하지 않는 분야도 있을 수 있다. 나이가 들어서 전성기를 구가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예외를 들먹이더라도 기민함, 혁신, 문제의식, 도발성, 파격, 예리한 문장의 쇠락이 야기하는 공포로부터 벗어나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설 수는 없다. 우리를 죽이는 건 위협 자체가 아니라 위협에 대한 공포가 아니던가.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이라는 영화 ‘명량’의 대사를 되새겨본다. 전성기가 지났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전성기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그 용기는 수백 배, 수천 배 강한 힘이 되지 않겠는가.

누구에게나 분명 존재하는 전성기

2018년 ‘네이처’에 발표된 한 연구가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어주었다. 이 연구는 예술가들, 영화감독들, 그리고 과학자들의 업적을 바탕으로 소위 ‘대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이나 논문이 한 사람의 커리어에서 언제쯤 등장했는지를 분석했다. 그 연구에 따르면, 대박은 30대나 40대에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커리어의 어느 단계에서나 일어난다. 어떤 개인이 평균적으로 만들어내던 수준을 능가해서 이전의 그가 아닌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전혀 다른 작품과 논문을 쓰는 시기는 커리어의 모든 시기에서 일어날 수 있으며, 그 시기는 대략 3~5년 동안 지속된다고 한다.

영감이 유성우처럼 쏟아지는 시기가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1905년 한 해에만 현대 물리학의 기념비적인 논문을 4편이나 발표했고, 영화감독 피터 잭슨은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지 약 25년이 지난 후에야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짧은 몇 년 동안 연속해서 발표했다. 어떤 사람은 이런 폭발적인 창조의 시기를 평생 두세 번 경험하기도 한다.

너무 일찍 전투를 포기하는 사람들

나이와 함께 찾아올 정신의 쇠락을 걱정하는 마음은 성찰적이다. 그러나 그 성찰이 너무 일찍 퇴로를 준비하도록 스스로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지 않기를 소망한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너무 일찍 전투를 포기하고 있다. 나이와 함께 늘어나는 일상의 의무들과 조직에서 맡게 되는 보직들을 핑계 삼아 탁월성에 대한 추구를 포기한 채 조로 (早老)의 삶을 살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성과가 줄어드는 이유는 나이 자체 때문이 아니라 나이가 들수록 노력을 훨씬 덜 하기 때문이다.

전성기는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 어쩌면 바로 눈앞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전성기가 지났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클수록 전성기가 자신의 목전에 와 있다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그 용기는 수백 배, 수천 배 힘을 발휘할 것이라는 ‘명량’의 대사를 잊지 않겠다고 다짐해본다.

최인철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