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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여야 정쟁에 발목잡혀 길 잃은 추경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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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낙연 국무총리가 지난달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추경 처리를 촉구하는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여당에 대한 항의 표시로 이날 본회의에 불참했다. 김경록 기자

이낙연 국무총리가 지난달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추경 처리를 촉구하는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여당에 대한 항의 표시로 이날 본회의에 불참했다. 김경록 기자

 나라 살림살이를 책임지는 기획재정부 예산실은 요즘 ‘곡소리’가 난다. 일이 바빠서라기보다, 일을 할 수 없어서다. 매년 7~8월은 내년도 예산안을 짜느라 바쁠 때지만 최근엔 여의도 국회만 바라본다. 실ㆍ국장 등 고위 관료는 세종정부청사 대신 국회의원실을 방문해 “추가경정예산(추경)을 제발 통과시켜 달라”고 읍소하느라 바쁘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4월 25일 국회에 제출한 추경안은 여ㆍ야간 정쟁에 발 묶여 95일째 감감무소식이다. 2000년(107일) 이후 역대 최장 표류 중이다.

결국 기재부는 24일 ‘홍남기 부총리, 추경의 조속한 통과 촉구’란 제목의 보도자료를 내고 추경안 통과의 필요성을 호소했다. 자료 내용을 요약하면 ▶추경은 ‘타이밍’이 관건인데 국회 통과가 장기간 지연돼 효과가 반감하고 있고 ▶일본 수출 규제 조치에 대응하는 예산을 추가했는데 이는 기존 추경안에 반영하지 못한 긴급한 내용이며 ▶내년 예산 편성을 8월 말까지 마쳐야 하는데 추경 예산을 확정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18일 국회 기재위 전체회의에 참석해 추경안 처리를 호소한 홍남기 경제부총리. [연합뉴스]

지난 18일 국회 기재위 전체회의에 참석해 추경안 처리를 호소한 홍남기 경제부총리. [연합뉴스]

최근 경기 부진에 대한 해명과 사과 없이 추경을 밀어붙이는 정부의 호소라 썩 미덥지 않았다. 하지만 국회가 ‘직무유기’란 지적엔 일견 수긍했다. 야당은 효과 없는, 선심성ㆍ관행적 추경이란 이유로 추경안의 국회 처리를 계속 뭉개고 있다.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는 “당장 예비비를 활용해 재정 지원을 할 수 있는데도 백지수표 추경안을 들이밀었다. 국가적 위기마다 정쟁용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딱히 대안을 내는 것도 아니다. 추경 자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지만 정경두 국방부 장관 해임건의안 처리, 북한 목선 사건 국정조사 등 정치 이슈와 추경안 처리를 연계해 협상을 더 어렵게 하고 있다.

야당은 최근 기재부가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와 관련한 대책으로 부품소재 연구개발(R&D) 예산을 추경에 넣자 ‘핵심 품목 100대 리스트’를 요구하기도 했다. 리스트를 공개할 경우 오히려 일본이 공격할 빌미를 줄 수 있는데도 무조건 공개를 요구해 ‘발목잡기’란 지적이 나왔다. 한 자유한국당 의원은 “국회에서 추경안을 협상 카드로 쓰는 건 관행”이라며 “야당으로서 추경안 처리를 지연시키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했다. 발목잡기를 자인하는 소리로 들렸다.

야당의 반대와 비판은 상수(常數)다. 결국 여당이 정치력을 발휘해 풀어야 하지만 ‘유연한 자세’ ‘대승적 결단’이 보이지 않는다. 경제를 살리는 일차 책임은 정부ㆍ여당에 있는데도 남 탓만 하는 모양새다. 그러는 사이 추경안 처리는 하릴없이 꼬이고 있다. 기재부 관계자는 “추경안이 요건에 부합하지 않으면 예산을 깎으면 된다”며 “국회에서 심사는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한국 경제가 ‘추경이라도’ 해야 하는 비상 상황이란 데는 당ㆍ정ㆍ청이 공감한다. 국회는 ‘무조건 보이콧’ 대신 일단 추경안을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고 꼼꼼히 따져야 한다. 추경을 통과시켜야 한다는 게 아니라 정치 이슈와 분리해놓고 들여다 봐야 한다는 얘기다.

비록 누더기, 반쪽짜리더라도 일본의 조치에 대응하는 예산까지 포함한 추경을 처리한다면 우리 국회의 단결된 메시지를 일본에 전하는 또 하나의 대응카드가 되지 않을까. 정부가 ‘이순신’과 ‘서희’를 들먹이며 일본과 다투는 마당에 여야가 벌이는 정쟁이 한가로워 보여서 하는 얘기다.

김기환 경제정책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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