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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주면 당장 가능, 60만원에 해드릴게" 낙태 헌법불합치 그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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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8주 가량된 태아의 초음파 사진.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지만 법 개정 작업은 진척이 없다. [중앙포토]

임신 8주 가량된 태아의 초음파 사진.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지만 법 개정 작업은 진척이 없다. [중앙포토]

“7주 5일이네요. 남편만 같이 오시면 오늘 저녁 바로 가능해요.”

헌재의 낙태 헌법불합치 결정 100일 현장은 #여성들 국회ㆍ정부 손놓은 새 불법 낙태 내몰려

24일 서울 강남구의 A산부인과. 낙태(인공임신중절) 수술이 가능한지 묻는 기자에게 병원 측은 이렇게 안내했다. 병원 직원은 결혼 여부,  마지막 생리 시작일, 성관계 날짜 등을 물은 뒤 임신 주수를 계산했다. 그는 “보호자 동의를 꼭 받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기자가 “부작용이 생길까봐 걱정된다”고 말하자 직원은 “병원 생기고 10년이 넘었지만 사고 난 적이 한번도 없다”라고 안심시켰다.

지난 23일 경기도 성남시의 B 산부인과를 찾은 기자가 낙태 수술 상담을 요청하자 접수대의 직원은 “의사 상담부터 받아야 하고, 기록이 남으면 안되니 건강보험 적용이 안된다”며 접수비부터 현금을 요구했다. 1만5000원의 접수비를 냈더니 진료실로 안내했다. 의사는 낙태하려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는 “임신 기간이 길어질수록 수술이 위험해지고 비용도 올라간다”고 설명했다. 의사 진료 후 따로 기자를 상담실로 안내한 간호사는 “수술비를 60(만원)으로 해드린다”며 “영양제는 5만원, 10만원짜리가 있다”고 했다. 염증이 생기지 말라고 쓰는 유착방지제에 10만원이 추가로 붙는다고도 했다. 임신 주수가 올라가면 전처치에 10만원 정도 더 들어갈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계좌 이체도 안 되고 무조건 현금”이라며 “수술 기록은 안 남는다”고 설명했다.

지난 4월 헌법재판소는 낙태한 여성과 의사를 처벌하는 규정을 담은 형법 269조 1항과 270조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2020년 12월 말까지 법을 개정하도록 주문했다. 그로부터 100일 흘렀지만 법 개정 작업은 진척이 없다.

검찰은 지난 달 임신 기간 12주 이내 낙태한 피의자를 기소유예 처분(검찰이 혐의를 인정하면서도 재판에 넘기지 않는 것)하는 등 낙태 사건 처리기준을 마련했다. 임신 12~22주라면 법령이 새로 마련될 때까지 기소를 중지할 방침이다. 관련법 개정 전까지 처벌을 유보하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입법 공백기를 틈타 현실에선 여전히 낙태수술이 성행하고 있다.

중앙일보가 23~24일 서울ㆍ경기의 산부인과 20곳을 무작위로 골라 방문하거나 전화를 걸어 낙태 수술 가능 여부를 물었더니 13곳이 "가능하다"고 답했다. 2곳은 “원장 진료 후 할 수 있다” “일단 와보라”며 방문 상담을 유도했다. “안 한다”라고 잘라 말한 곳은 5곳이었다. 부르는 게 값이고, 기록에 남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며 모두 현금을 요구했다. 당일치기 수술을 할 정도로 낙태 여성의 안전성 같은 것은 뒷전으로 밀려있다.

그래픽=심정보 shim.jeongbo@joongang.co.kr

그래픽=심정보 shim.jeongbo@joongang.co.kr

법 개정 시한까지 남은 시간은 1년 5개월. 그때까지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들은 여전히 몰래 낙태가 가능한 병원을 찾아다녀야 한다. 병원에서 얼마를 제시하더라도, 수술 부작용이 생기더라도 홀로 감당한다. 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 2월 공개한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에 따르면 2017년 국내 낙태 건수는 연간 4만9764건으로 추정된다. 성 경험이 있는 여성 중 10.3%, 임신한 적이 있는 여성 중 19.9%가 낙태를 경험했다. 낙태 수술을 받은 여성 8.5%는 자궁천공, 자궁유착증, 습관성 유산, 불임 등 신체적 후유증을 경험했다. 하지만 이 중 43.8%만 치료를 받았다. 또 54.6%는 죄책감, 우울감, 불안감, 자살충동 등 정신적 후유증을 경험했지만 이 중 14.8%만이 치료를 받았다. 어디 드러내놓고 말할 수가 없어서였다.

낙태 수술을 해주는 의사들도 위험을 감수해야는건 마찬가지다. 김동석 산부인과의사회장은 “법이 여전히 살아있는 상황이라 의사 입장에선 위험 부담이 크다. 여전히 수면 아래서 암암리에 이뤄질 수 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40대 산부인과 전문의는 “좋아서 (낙태 수술을) 하는 의사가 어디있겠느냐. 자칫하면 처벌을 받을 수 있지만, 원치않는 임신한 여성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한다”라고 털어놨다.

정부는 조용하다. 보건복지부ㆍ법무부ㆍ여성가족부 등 관계부처는 “법 개정 작업을 준비 중이다”라는 입장이다. 이제껏 제대로 된 토론회 한번 열지 않았다. 손문금 복지부 출산정책과장은 “그간 헌재 결정문을 분석하고, 의료계·법조계·여성계를 차례로 만나 의견을 수렴했다. 쟁점이 워낙 많아서 시간이 상당히 걸린다”라고 설명했다.

국회도 묵묵부답이다. 지난 4월 헌재 결정 직후 이정미 정의당 의원이 발의한 ‘낙태죄 폐지’ 법안 외에 별다른 입법 움직임이 없다. 이 의원이 발의한 법안은 상임위에 계류돼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한 당직자는 “국회 파행이 이어져 제대로 된 논의가 시작되지도 못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종교계 반발을 의식해 여야 막론하고 총대 메고 나서려는 의원이 없다”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여성들의 건강권 보호를 위해 빨리 법 개정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낙태가 합법화된 나라에서도 우리나라처럼 ‘당일 낙태’가 가능한 나라는 없다. 대부분 상담ㆍ숙려 제도를 두고 있고, 저소득ㆍ청소년층은 건강보험으로 지원한다.

김동식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법 개정 논의를 서둘러야 한다”며 “입법 공백 동안 낙태는 여전히 여성과 의사 개인간의 문제로 남아있게 된다”라고 지적했다. 김 위원은 “건강보험 적용해서 취약계층 여성을 보호하고, 부작용 관리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에스더ㆍ황수연 기자 etoil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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