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개봉한 영화 ‘박열’(이준익 감독)은 주인공 박열(이제훈 분)보다 가네코 후미코(최희서 분)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조선인 박열( (1902~1974)품에 안겨 환하게 웃는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 그를 연기한 배우 최희서의 인상적인 일본어 액센트가 섞인 한국어 발음. 그리고 옥중 사형선고를 받는 과정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당당한 모습은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아있다. 그 가네코 후미코의 묘는 경북 문경의 박열 의사 기념관 안에 있다.
가네코 여사 추도식 문경서 열려 #여사 받은 건국훈장 문경에 기증
23일 오전 경북 문경시 마성면 박열의사기념관. 60~70대 일본인 10여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기념관 안에 있는 한 묘지 앞으로 다가가 머리를 조아렸다. 준비한 향도 피웠다. 일본 가네코 후미코 연구회 오자와 류히치 이사 등 연구회 회원과 관계자들이다. 바로 영화 박열에 나온 박열(1902~1974) 의사 부인 가네코 후미코 묘를 찾아 추도한 것이다.
여사의 묘비에는 ‘(재판에서) 추호의 동요 없이 천황유해론, 약소민족 해방, 한국 독립의 정당성, 인간의 자유를 시종여일하게 주장했다. 사형선고를 받자 여사는 만세를 외쳤다’고 쓰여 있다.
7월 23일은 가네코 후미코 여사가 옥사한 날이다. 여사는 1923년 박열 의사와 함께 일본 왕세자 결혼식 폭탄 테러를 모의했다는 ‘대역죄’로 기소됐다. 어린시절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난 여사는 식민지 한국인 처지에 공감, 박문자란 필명으로 활동하며 박열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 등에 저항했다. 법정에서 여사는 “조선의 독립운동을 생각할 때 남의 일이라고는 여길 수 없을 정도의 감격이 가슴에 용솟음쳤다”고 증언했다.
1926년 3월 23일 박 의사와 옥중 결혼하고 이틀 뒤 사형선고를 받았다.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지만 결국 옥사했다. 그는 남편 박열 의사 고향인 문경에 안장됐다. 박열의사기념관 측은 2003년 현재 기념관 안으로 여사 묘를 이장했다. 이후 한국과 일본에서 번갈아 가며 추도식을 매년 열고 있다. 한번은 문경에서, 한번은 여사 외가가 있던 일본 야마나시(山梨)현에서다.
추도식에 참석한 연구회 회원들은 건국훈장을 일본에서 가져와 박열의사기념관 측에 기증했다. 지난해 11월 정부가 일제에 저항한 공을 기려 여사에게 추서한 건국훈장 애국장이다. 건국훈장을 받는 일본인으로는 독립 열사들을 많이 변호했던 후세 다쓰지(2004년 독립유공자 포상)에 이어 두 번째다. 훈장은 그동안 일본의 여사 친척이 보관해왔다. 문경시 관계자는 "냉랭한 한일 관계 때문인지, 과거 독립운동에 목숨 바쳐 참여한 일본인 여성의 이야기가 새롭게 다가온다"고 했다.
일본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한 박열 의사는 22년 2개월간 옥고를 치뤘다. 그는 독립투사,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불령선인(不逞鮮人·불량한 조선 사람) 등으로 불렸다. 그런데 박열 의사는 스스로를 '개새끼'라고 불렀다고 한다. 1922년 일본 유학생들이 펴낸 잡지 『조선청년』에 실린 '나는 개새끼로소이다'를 통해서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하늘을 보고 짖는/달을 보고 짖는/보잘것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뜨거운 것이 쏟아져/내가 목욕을 할 때/나도 그의 다리에다/뜨거운 줄기를 뿜어내는/나는 개새끼로소이다.' 이 시는 권력을 향한 박열 의사의 저항 정신을 잘 나타낸다.
박열과 함께 일제에 맞섰던 여사 역시 박열의 시 때문에 그와 함께했다고 알려져 있다. 여사는 시를 읽고 "내가 찾고 있던 사람, 내가 하고 싶었던 일, 그것은 틀림없이 그 사람 안에 있다. 그 사람이야말로 내가 찾고 있던 사람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문경=김윤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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