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삶의 향기

흔들리며 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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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건용 작곡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이건용 작곡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피카소와 당대의 작가들”이라고 기억된다. 10여년 전 뉴욕의 현대미술관에서 보았던 한 기획전의 이름이다. 전시는 피카소의 그림을 그가 영향받았던 후기 인상주의 작가들 및 당대 작가들과 비교하면서 보여주는 것이었다. 세잔·고갱·마티스·브라크, 그 외 여러 작가의 그림이 피카소와 함께 전시되었다. 나란히 놓고 보니 그림들은 놀랍도록 비슷했다. 피카소의 작품이지만 고갱의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주는 그림도 있고, 세잔의 영향을 받은 그림, 마티스와 닮은 그림도 있었다. 브라크의 작품과 비교 전시한 전시실도 있었는데 그 방의 작품들은 이름을 보기 전에는 누구의 작품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작가는 시대의 영향에 흔들려 #방황의 노정이 작가의 정체성 #삶은 여정이지 목적지가 아냐

미술관을 나오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피카소는 당대의 많은 경향에 영향을 받으면서 자신의 그림 세계를 만들어나갔다.” “만일 그 중의 한 작업 단계에서 삶이 끝났더라면 오늘의 피카소는 없었으리라.” “지금 우리가 시기마다 다른 화풍의 그림을 모두 피카소의 그림으로 알아보는 것은 일생에 걸친 그의 작업을 알기 때문이다.” “다양한 저 그림들을 관통하는 혹은 포괄하는 ‘피카소’란 어떤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는 모든 예술가에게 중요한 질문이어서 작곡가들도 이를 붙들고 고민한다. “나는 아직 나의 고유한 음악 정체성을 갖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은 작곡가로서 가망성이 없다는 뜻인가요?” “나는 누구 같은 작곡가가 되고 싶은데 이 목표가 말이 되나요?” 등등. 나 역시 이런 질문 혹은 고민을 안고 살아왔다. 후배들이 조언을 구할 때 나는 때로 위에서 언급한 피카소 전시회의 소감을 얘기해 준다. “우리가 피카소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일생에 걸친 그의 족적을 통해서다. 너의 아이덴티티도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뒤에 있다. 네가 너의 시대를 살면서 남기는 작업이 결과적으로 너를 이루는 것 아니겠는가?”

젊은 작가들에게 나의 답은 답답할 것이다. “당장 길을 찾지 못해서 고민 중인데 그냥 가면서 길을 찾으라니 그런 하나 마나 한 답이 어디 있는가?” “‘내가 가는 길이 곧 나의 방향’이 되는 것이라면 그럼 아무렇게나 가도 된다는 말인가?” 길을 묻는 영혼에게 나의 대답은 ‘계속 방황하고 흔들려라’는 것이니 이렇게 반문하는 것도 당연하다.

방황도 계속하면 나름의 노정이 남는다. 이 노정이 쌓이면 방향이 된다. 다만 이 방향을 읽을 수 있을 때까지 견디는 것이 쉽지 않다. 모든 작가, 작곡가들은 주변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 영향에 따라 작가들은 흔들리며 자신의 길을 간다. 시대와 환경의 영향이 강력하면 심하게 흔들린다. 당연 방황도 하고 우여곡절도 겪는다. 그 곡절과 방황은 작품에 담긴다. 그 족적은 작가마다 다르다. 같은 시대를 살아도 어떤 사람은 투쟁적으로 살고 다른 사람은 폐쇄적으로 산다. 어떤 작가는 비관하고 다른 작가는 초월한다. 이러한 환경과 자신과의 피드백이 작품이 되고 그의 이력서가 되고 그의 아이덴티티가 되고 ‘그’가 된다. 그러니 흔들리며 나아가는 것이 맞고 방황을 통해서 방향이 생기는 것도 맞다. 누구도 방향을 가르쳐 줄 수 없다. 흔들릴 때에 작동하는 자신 안의 고유한 방향타만이 그를 안내할 것이다.

옛날에 망망대해에서 항로를 찾는 사람은 나침반을 사용했다. 지구에 대한 앎이 부족했던 시절 먼바다 건너의 목적지에 가기 위해서는 방향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해류에 밀리고 풍랑에 휩쓸려도 나침반이 있으면 다시 방향을 찾을 수 있었다. 방황하는 작가에게도 나침반이 필요하다. 항해사의 나침반은 지구 어디서나 같은 곳을 가리키지만, 그 나침반은 제각기 다른 삶의 방향을 가리킨다. 항해의 나침반은 구입할 수 있지만 작가의 나침반은 스스로 안에서 찾아가질 수밖에 없다.

며칠 전 식탁 냅킨에 인쇄된 글귀가 마음에 들어왔다. “Peace is a journey not a destination. (평화는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입니다.)” 그 날 이후 그 글귀를 이리저리 음미하는 중이다. “평화는 어딘가에 도달해야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평화는 그렇게 사는 과정 안에 있다.” “목적지에 가기 위하여 여정을 희생할 수 없다.” 등등. 그리고 여러 가지 단어를 평화 대신에 넣어 본다. 멋진 말이 되는 것도 있다. “행복은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입니다.” “‘나’는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입니다.”

하기는 음악은 여정 그 자체다. 음악이 그리는 것은 길 떠남과 이탈과 방황과 회귀의 과정이고 그 과정이 자아내는 감동과 아름다움이다. 그렇다면 방황과 흔들림의 노정 역시 예술이다.

이건용 작곡가·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