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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훈 칼럼

그런데 배는 왜 12척만 남았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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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최훈 기자 중앙일보 주필
최훈 논설주간

최훈 논설주간

아베 일본의 보복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권력의 두 가지 단어가 등장했다. 대통령이 거론한 ‘12척의 배’와 청와대 민정수석이 환기시킨 ‘죽창(竹槍)’. 후대 대중이야 12척의 기적에 매번 뭉클한 자긍심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 부조리와 모순에 맞서 일어선 동학 농민들의 정의감에 125년을 뛰어넘는 공감 역시 마찬가지리라.

권력의 ‘충무공 12척’‘죽창’ 거론 #후대 정치가의 성찰 지점은 달라야 #‘부국강병’‘통합’ 국력이 역사 교훈 #“언론 정부비판=매국” 이분법 위험

이 모든 한반도의 고통과 불행에 개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서부터 청일전쟁으로 조선을 강제병합한 메이지 덴노와 이토 히로부미,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물론 수많은 한국인을 징병·징용·위안부의 지옥으로 내몬 태평양전쟁 주범인 극우 군부, 히로히토 일왕과 도조 히데키, 그리고 그 파시즘적 DNA의 환상을 좇는 철학 빈곤의 ‘어쩌다 우익’ 아베 총리의 도발에까지…. 일본 정권의 원죄와 과오는 지금도 차곡차곡 역사에 쌓여가고 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말대로라면 그러나 국정을 책임진 우리의 후세 정치가들이 되물어야 할 성찰의 지점은 일반 대중과는 달라야 옳다. “불세출의 영웅 이순신 장군 앞엔 왜 12척만 남았을까….” “고부군의 순박한 농민들은 왜 호미 대신 죽창을 들고 나서야만 했나….” 바로 우리의 정치와 국력(國力)이다.

우선 12척. 왕명거역죄의 모함과 옥고, 백의종군 끝에 돌아온 충무공이 마주한 판옥선 숫자다. 선조의 영원한 총신(寵臣)이자 이순신의 ‘대체재’였던 원균이 직전 칠천량 해전에서 전술과 리더십 부재, 나태로 134척 중 122척의 선박을 잃으며 왜군에 대패한 결과다.

‘12척 비극’의 출발은 국제정세였다. 전국시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가 주목한 건 만력제의 실정, 내분에 따른 명(明)의 쇠퇴와 청(淸)의 시조인 북방 누르하치 세력의 굴기(崛起)였다. 대륙 혼돈을 틈타 정명(征明)과 그 가도인 조선의 복속을 노렸다. 중·미의 경제 분쟁, 핵무장한 북한, 한·미 동맹의 이완 우려 속에 어수선한 한반도는 요즘 역시 힘의 공백 상태다. 잃어버린 20년 뒤 되살아난 경제력으로 전쟁 가능한 ‘정상국가’를 부르짖는 일당(一黨)국가의 아베 정권과 오버랩된다. “우리가 미국과의 굳건한 동맹을 매끄럽게 잘 관리해 왔다면 과연 아베가 이런 무모한 틈새 도발을 감행할 수 있었을까.” 언론의 의문이다.

임진왜란 1년 전. 조선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의 상극(相剋)인 보고와 결론은 또 뭘까. “침략 기색을 느끼지 못했다”는 동인(東人) 김성일의 의견이 상관인 서인(西人) 황윤길의 경고 대신 선조에게 채택된 건 당시 집권세력이 동인인 구도와 무관치 않다. 왜침 없다던 조선의 분위기가 유성룡의 『징비록』에 묘사된다. “이 태평한 시대에 성을 쌓으라니 무슨 당치 않은 일이오”라는 민초들 불평부터 “아 그 왜군의 조총이란 게 쏠 때마다 다 맞는답디까”라는 무장들의 호언까지…. 50여 년 전부터 포루투갈 조총으로 중무장한 일본. 조선의 활과 창, 칼은 그나마 문서상의 무기가 상당수였다. “부산 함락에 황급히 소집된 병사란 게 옆에 책을 낀 채의 유생, 두건 쓰고 나온 아전 등이었다”고 서애는 기록했다. 국경인 의주까지 피란 간 선조가 할 일이라곤 명에의 청병(請兵)뿐이었다. 일본의 불화수소 ‘무기’ 앞에서 “기업들은 왜 몰랐느냐”(산자부 관료) “대기업이 안 사줘서 그런 것 아니냐”(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지금부터 개발에 나서자”는 우리 모습은 이 427년 전과 뭐가 다를까.

조선 역사상 가장 인재가 흥한 때는 역으로 왜침 쑥대밭이 된 선조대였다. 이이, 유성룡, 이원익 등의 시대였다. 하지만 탕평 대신 편 가르기와 측근 정치의 당쟁이 국운의 호기를 부질없게 만들고 말았다. “양민(養民)·양병(養兵)해 대비 않으면 백성들을 내몰아 싸우게 하는 화를 면치 못할 것”이라던 서인의 뿌리 이이 역시 두 달 뒤 “임금에게 교만을 부렸다”며 동인 권력의 탄핵을 받았다.

‘죽창’. 그 출발 역시 전정(田政) 등 3정(政)의 문란, 왕실의 나라 재정 탕진, 이를 벌충할 가혹한 조세 수탈의 ‘실정(失政)’이었다. 동학혁명 1년 전 고창의 소작농이 한 해 세금 내면 한 집 평균 넉  달, 자작농은 일곱 달치 식량만 남았다 (『실록 동학농민혁명사』). “농민들 진정에 조병갑 고부군수가 익산군수로 발령난다. 하지만 영의정 조카였던 조병갑 권문세가의 입김이 무서워 이후 6명의 관리가 신병 등을 핑계로 고부군수직을 사임했다. 전라감사가 ‘조세 수납의 지속성’을 들어 조병갑 재발령을 요청, 조정에 수용됐다”는 게 기록이다. 분노의 죽창을 든 혁명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다급해진 조정이 청에 진압을 구걸하고 일본의 출병과 청일전쟁, 을사늑약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장황히 역사를 복기한 건 왜침 때마다 조정의 실정과 무능, 분열과 국력의 쇠퇴가 함께 있던 사실 때문이다. ‘불편한 진실’을 꺼내고 스스로의 성찰을 먼저 강조하는 게 민주주의 언론의 까칠한 책무이자 그들 방식의 애국이다. 그러니 역사의 평가 대상인 권력 자신이 ‘애국’과 ‘매국’을 가를 일이 아니다. 매국이란 정권 비판이 아니라 그들의 ‘잘못된 선택’에도 동조·방임하는 것이다.

최훈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