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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수거 하는 날, 어머니 얼굴이 유난히 밝아지는 까닭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이한세의 노인복지 이야기(32)

과연 노인은 가만히 앉아서 쉬는 것을 좋아할까? 이들은 작은 일이라도 사회에 보태며 자존감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 사진은 봉화군의 노인들이 추수하고 난 뒤 거둔 볏짚으로 망태기와 망석, 짚신을 만드는 모습. 이런 좋은 소일거리는 노인에게 역할을 부여하고, 좋은 부수입이 된다. [중앙포토]

과연 노인은 가만히 앉아서 쉬는 것을 좋아할까? 이들은 작은 일이라도 사회에 보태며 자존감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 사진은 봉화군의 노인들이 추수하고 난 뒤 거둔 볏짚으로 망태기와 망석, 짚신을 만드는 모습. 이런 좋은 소일거리는 노인에게 역할을 부여하고, 좋은 부수입이 된다. [중앙포토]

어르신들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말 중의 하나가 “많이 힘드시지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편안히 쉬세요” 같은 말이라고 한다. 이러한 것을 반영이라도 하듯 2004년 총선 때 한 정치인이 “60~70대 어르신은 굳이 투표하지 않고 집에서 쉬셔도 된다”라고 언급했다가 곤혹을 치른 적이 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편안히 쉰다”는 것은 존재감의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 노인이 겪는 4고가 생활고, 병고, 외로움 그리고 존재감 상실이라고 한다. 존재감 상실이 생활고나 병고와 맞먹는 4고의 하나라고 하니, 존재감은 먹고 사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중요한가 보다.

자존감 상실은 노인의 4고 중 하나

나의 아버지는 15년 전인 2004년 6월에 급성 심장마비로 집에서 돌아가셨다. 점심 드시고 방으로 들어가 쉰다고 침대에 눕더니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30분 만에 운명했다. 실로 황망한 죽음이기도 하려니와 요즘 같으면 아직 정정한 72세였으니 자녀로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72세로 일찍 운명한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후회하는 것이 있다면 ‘왜 아버지가 존재감이 약해지고 있을 때 자존감을 세워드리지 못했을까’다. 아버지는 대학교 때 학생회장도 하고, 졸업 후 정치권도 기웃거릴 정도로 외향적이었다. 결국 공화당 시절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해 집안이 풍비박산됐다. 그 이후 50대에 손댄 사업이 크게 실패하고, 돌아가실 때까지 변변한 경제활동을 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눈치 보면서, 만날 사람도 없이 매일 아침이면 낡은 양복을 입고 어딘가 나갔다가 저녁에야 처진 어깨로 돌아오는 아버지였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만 살던 시절, 부모님을 뵈러 가면 나를 본 아버지는 신이 나서 장황하고 조금은 허황한 이야기를 한 보따리씩 풀어 놓았다.

선거에서 낙선하고 사업까지 실패한 아버지의 어깨는 참 무거웠을 것이다. 아버지는 미안함에 집에 있지 못하고 낡은 양복을 입고 바깥을 돌아다니곤 했다. 이따금 부모님을 뵈러 가면 아버지는 신이 나서 말을 붙이곤 했는데 내가 차갑게 반응해 상처를 드리곤 했다. (이 사진은 이해를 돕기 위한 것으로,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 [중앙포토]

선거에서 낙선하고 사업까지 실패한 아버지의 어깨는 참 무거웠을 것이다. 아버지는 미안함에 집에 있지 못하고 낡은 양복을 입고 바깥을 돌아다니곤 했다. 이따금 부모님을 뵈러 가면 아버지는 신이 나서 말을 붙이곤 했는데 내가 차갑게 반응해 상처를 드리곤 했다. (이 사진은 이해를 돕기 위한 것으로,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 [중앙포토]

자유당 시절 학생운동 하던 이야기부터 시작해 요즘 정치 돌아가는 이야기, 그리고 내가 다니던 직장에 대한 조언까지 모르는 게 없을 정도다. 원론은 틀리지 않지만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지겨운 마음에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금세 풀이 죽곤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그저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이야기 내용이 맞고 틀리고는 그다지 중요치 않았다. 내가 아버지 조언대로 실행하든, 하지 않든 그것도 별개의 문제였다. 기껏해야 한 달에 두 번 정도 부모님 집에 와서 한 시간 정도 아버지 이야기를 듣는 것이 뭐가 그리 힘든 일이라고. 진지하게 들어 주면서 고개도 끄덕여 주고 “와 정말 좋은 말씀이세요”라고 추임새 두어 번만 넣어주면 되는 것을….

나의 지속적인 무관심에 아버지는 존재감을 조금씩 잃었고, 아버지가 틀렸다는 반박으로 그 상실감을 부채질했다. 존재감의 상실에 녹아버린 아버지의 심장은 15년 전 6월 어느 날 그렇게 더는 뛰지 않았다. 얼마 전 어머니가 아버지에 대한 후회스러움을 안고 사는 나를 화들짝 놀라게 했다.

아내가 이것저것 맛있는 식사를 차려 드렸는데 “너무 고맙구나. 그런데 내가 이러한 것을 먹을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아무런 도움도 못되고 너희들에게 짐만 되니…”라고 평소 전혀 어머니답지 않은 말을 했다. 깜짝 놀란 아내가 “아니, 어머니 그게 무슨 소리세요. 어머니께서 계시다는 것 그것 하나로도 우리는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요. 그리고 매달 저에게 시장 보라고 용돈도 주시잖아요”라고 답했다.

아내와 내가 정신없이 출근하고 나면, 어머니는 집안 이곳저곳을 돌보셨다. 바빠서 미처 건드리지 못한 설거지나 분리수거를 해두고, 화초도 가꾸셨다. [중앙포토]

아내와 내가 정신없이 출근하고 나면, 어머니는 집안 이곳저곳을 돌보셨다. 바빠서 미처 건드리지 못한 설거지나 분리수거를 해두고, 화초도 가꾸셨다. [중앙포토]

나는 아내와 긴급 회동을 하고 어머니가 왜 저런 말씀을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언제 어머니가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는지, 아니면 반대로 언제 밝고 신명이 나 있었는지도 되짚어 보았다. 대체로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던 때는 우리가 회사 일이 바빠 집에 잘 들어가지 못했을 때고, 신명이 나 있었던 때는 일주일에 한 번 분리수거 차가 오는 날임을 알게 됐다.

아내와 내가 출근하고 나서 분리 수거하는 날이면 집안의 음식물 쓰레기가 항상 깨끗하게 비어 있고, 가벼운 플라스틱 쓰레기도 치워져 있었다. 어머니가 그리한 것이다. 이것을 발견한 아내가 “어머니 힘드신데 쓰레기 정리를 어떻게 하셨대요? 참 대단하세요. 다른 시어머니는 이런 것 안 해주시는데, 정말 고마워요”라고 애교를 떨면 어머니는 “뭘 그런 것 가지고 그러냐”고 밝게 웃었다.

그 이후에 아내가 어머니와 함께 마신 커피잔을 어쩌다 바빠 그대로 두고 출근하면 커피잔이 씻겨져 있었다. 화분에 물 주기, 마른 화초 손질, 신발장 정리 등 어머니의 손길을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어머니는 무언가를 하며 존재감을 확인하길 원했다. 이것을 깨달은 나와 아내는 어머니에게 작은 임무를 주기 시작했다. 귤이나 사과의 껍질을 까는 것처럼 말이다. [중앙포토]

알고 보니 어머니는 무언가를 하며 존재감을 확인하길 원했다. 이것을 깨달은 나와 아내는 어머니에게 작은 임무를 주기 시작했다. 귤이나 사과의 껍질을 까는 것처럼 말이다. [중앙포토]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더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귤 까는 것도 어머니에게 맡겼다. 어머니는 습관적으로 아침 식사 후 후식으로 사과 반 조각과 귤을 먹는다. 아내는 일부러 귤을 까지 않고 접시에 담아 어머니께 드린다. 어떤 때는 사과도 깎지 않고 귤과 함께 내오면서 “어머니 제가 출근 시간이 늦어서 지금 급하게 설거지해야 하니 귤하고 사과 좀 까 주세요”라고 부탁한다. 그러면 어머니는 장난감을 조립하는 아이처럼 신이 나서 귤을 까고 사과를 깎는다.

그리고 접시에 담아 주면서 우리에게 같이 먹기를 권한다. “어쩜 이렇게 사과도 예쁘게 잘 깎으신대요. 감사히 잘 먹을게요” 아내의 칭찬에 어머니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에 흡족한 모습이 역력하다.

치매 예방에 도움되는 과일 깎기

노인에게 손가락을 많이 사용하도록 하는 것은 치매 예방 겸 운동으로도 좋다고 한다. 그것이 가벼운 설거지가 될 수도 있고, 과일 깎기, 화초 가꾸기, 땅콩이나 호두 까기, 수놓기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자존감까지 더해진다면 바람직할 것이다. 어머니의 심장이 존재감의 상실로 녹아내리기보다, 청춘처럼 오래도록 건강하게 뛰었으면 좋겠다. 자존감, 심장을 건강하게 하는 보약이다.

이한세 스파이어리서치&컨설팅 대표이사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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