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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맥주 마시면 천국 간다"…히틀러는 호프집서 나치 집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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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5호 07면

에일 vs 라거, 시원한 맥주 뜨거운 전쟁

# 브리타니아

시대·지역 따른 맥주 변천사 #영국 땅 점령한 로마인들 맥주에 질색 #로마 성직자들 진출, 초기 에일 만들어 #체코·독일, 필스너 '원조' 힘겨루기 #필리핀 산미겔, 스페인으로 역수출 #인도의 영국인들 위해 IPA 탄생도

“퉤 퉤 퉤, 이게 무슨 맛이냐.”
기원전 1세기에 지금의 영국 땅인 브리타니아에 진출한 로마 병사들은 거무죽죽한 음료에 기겁을 했다. 와인에 길들여졌으니까. 그리고 그들은 본국에 보고한다. ‘이 섬사람들은 곡물 발효 음료를 퍼 마심.’
이후 가톨릭을 받아들인 로마에서는 브리타니아로 성직자들을 보냈다. 하지만 미사에 필요한 와인은 포기해야 했다. 지중해에서 도버해협을 넘어오는 동안 변질됐고 강도에게 종종 털렸기 때문이다.

필스너 우르켈의 필젠 브루어리로 재현한 레스토랑 더 미트. 크리스피ㆍ밀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필스너 우르켈을 즐길 수 있다. [사진제공=전호성 객원기자]

필스너 우르켈의 필젠 브루어리로 재현한 레스토랑 더 미트. 크리스피ㆍ밀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필스너 우르켈을 즐길 수 있다. [사진제공=전호성 객원기자]

수도사들은 현지화 전략으로 맥주를 받아들여 발전시켰다. 당시 맥주는 에일의 초기 버전. 수도사들은 맥주에 빠졌다. 빵과 물만 먹어야 하는 사순절에도 맥주는 허용했다. 얼굴 불콰한 수도사가 맥주잔을 들고 ‘한잔?’하고 물어보는 것 같은 맥주 라벨(세인트 버나두스, 벨기에)이 나온 이유다.

에일이란 명칭은 계급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영국 귀족계급은 벌꿀 술 미드(mead)를 즐겼다. 곡물로 만든 에일은 ‘아랫것’들이 마시던 음료였다. 상대적으로 고온인 15~24도에서 발효시키며 이때 효모가 맥주 표면으로 떠오르기 때문에 상면발효맥주라고 한다. 과일향이 나고 상대적으로 걸쭉하다. 중세까지만 해도 맥주 하면 이 에일을 일컫는 말이었다. 인디아페일에일(IPA)·앰버에일 등 에일 계열과, 보리 맥아(홉)를 진하게 태워 만든 흑맥주 스타우트, 보리 대신 밀 맥아를 사용한 밀맥주(바이스비어) 등이 있다.

벨기에에서 만드는 세인트 버나두스의 라벨에는 성직자가 그려져 있다. [중앙포토]

벨기에에서 만드는 세인트 버나두스의 라벨에는 성직자가 그려져 있다. [중앙포토]

# 독일 vs 체코
독일 바이에른의 빌헬름4세는 1561년 ‘맥주 순수령’을 공포했다. 빌헬름5세는 이를 더 강화했다. ‘맥주는 물·홉·보리로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빵을 만들어야 할 밀로 맥주를 빚었기 때문이다. 바이에른이 보리 생산의 중심지였던 점도 감안했다. 다른 원료가 들어간 맥주에는 무거운 세금을 물렸다. 밀맥주를 만들던 양조장은 망했다. 이런 양조장들을 순수령 적용 예외 대상인 왕실과 수도원에서 ‘접수’했다고 전해진다.

맥주 강국은 의외로 체코다. 1인당 연간 소비량이 143L(한국 43L)로 24년째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1842년 체코 플젠 지방의 한 양조장에서 기존의 거무튀튀한 맥주 대신 금빛 찬란한 라거를 내놓았다. 당시 ‘신상’이었던 투명 유리잔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시장을 휩쓸었다.

현대식 맥주의 대명사인 라거는 10도 정도의 낮은 온도에서 발효시킨 후 낮은 온도에서 몇 주간 숙성시킨다. 발효시 효모가 맥주 바닥에 가라앉아 발효되기 때문에 하면발효맥주라고도 한다. 연한 황금색에 탄산이 풍부해 강한 청량감이 특징이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당시 본선 32강에 진출한 국가들의 맥주를 그래픽으로 만들었다. [중앙포토]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당시 본선 32강에 진출한 국가들의 맥주를 그래픽으로 만들었다. [중앙포토]

체코의 필스너는 독일로 역수출됐다. 독일에서도 수준 높은 맥주를 만들어냈지만 속이 불편했다. 차마 필스너를 필스너로 부를 수 없었다. 독일에서는 체코가 ‘원조’라는 의미를 씻어내기 위해 필제너(pilsener), 혹은 필스(pils)로 표기했다. 체코도 필스너 우르켈(urquell, 원조)이라는 명칭을 독일에서 사용하지 못하도록 법원에 제소했다. 요즘도 갈등은 여전하다. 바이에른 출신 기업인과 식사 자리에서 "역시 맥주는 필스너"라고 했다가 "필스너는 독일 장인(마이스터)들이 독일 기술로 물 좋은 플젠 지방에 가서 생산한 것일 뿐"이라는 항의를 받은 적이 있다. 점잖은 신사가 얼굴을 붉힐만큼 민감한 주제다.

# 아메리칸 스탠다드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라거가 미국으로 건너간 후 보리와 홉의 사용량을 줄이고 옥수수나 쌀 등을 섞어 생산 단가를 낮추고 대량생산에 적합하게 변화했다. 밍밍하다는 비판도 많지만 세계 맥주시장의 70% 이상이 가볍게 마실 수 있는 아메리칸 라거다. 버드와이저·밀러·쿠어스 등 미국산 맥주를 비롯해 중국의 칭따오, 이탈리아의 페로니, 터키의 에페스, 필리핀의 산미겔 등 낯익은 제품이 많다. 국산 카스(오비맥주), 하이트·테라(하이트진로) 등도 여기에 속한다.

맥주 자체의 풍미는 떨어지는 편이지만 요리나 프라이드치킨·피자 등과 함께 먹기에는 가장 적합하다. 카스 맥주 광고에서 '블러디 프레쉬(끝내주게 신선하네)'라고 외쳤던 유명 요리사 고든 램지는 "한국 맥주는 맛이 없다는 일부 유럽인들의 평가는 양념이 강한 한국 음식을 먹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라거 가운데 필스너 우르켈과 같은 필스너 계열의 국내 제품으로는 클라우드(롯데)와 골든라거(오비맥주) 등이 있다. 쌉쌀한 맛이 강한 유럽식 페일라거는 네덜란드의 하이네켄이 대표적인다. 필스너와 페일라거를 포함한 라거 계열의 시장 점유율은 90%에 달한다. 반면 에일 계열은 소규모 제조업체의 크래프트 맥주가 많다. 독일식 밀맥주인 바이젠으로는 파울라너가 유명하고, 벨기에식 밀맥주는 호가든이 대표적이다.

# 맥주의 개혁
수도원들은 막대한 권력과 재력을 얻게 됐다. 예로부터 돈과 힘이 쌓이거나 고여 있으면 쉽게 썩었다. 가톨릭에서 자정운동을 벌였다. 1098년 베네딕토회 계열의 수도사들이 시토회를 결성했다. 시토(Citeaux)는 프랑스의 마을 이름이다.

ATP(Authentic Trappist Product)로 인증 받은 맥주. 트라피스트 맥주는 깐깐한 검증으로 유명하다. [중앙포토]

ATP(Authentic Trappist Product)로 인증 받은 맥주. 트라피스트 맥주는 깐깐한 검증으로 유명하다. [중앙포토]

이후 1664년 더 엄격한 규율을 내세운 엄률시토회가 라 트라프(La Trappe)에서 만들어졌다. 이들은 스스로를 트라피스트(Trappist)라 불렀다. 이들이 만드는 맥주는 깐깐한 공정을 거치기로 유명하다. 국제트라피스트협회 탄생으로 이어지며 맥주에 트라피스트 인증(ATP·Authentic Trappist Product)을 부여한다. 트라피스트 양조장으로 승인 받은 곳은 세계에서 13곳뿐이다. 인증 기간은 5년이다. 엄률시토회가 결성된 연도와 같은 ‘1664’ 라벨이 붙은 프랑스 맥주는 트라피스트 인증 맥주가 아니다.

시민운동도 벌어졌다. 영국의 캄라(CAMRA)다. 1971년 에일이 라거에 밀리는 현실을 안타까워한 나머지 출범했다. 에일과 펍 홍보를 통해 에일 종주국의 부흥을 이끌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맥주의 천국
맥주는 역사와 함께 했다. 필리핀의 산미겔은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던 1890년부터 스페인 기술로 만들어졌다. 스페인이 필리핀에 진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대항해 시대의 서막에 포르투갈과 맺은 협약 때문이었다. 1494년에 체결한 토르데시야스 조약은 현재의 브라질 동쪽을 기준으로 그 서쪽의 지구는 스페인이, 그 동쪽은 포르투갈이 나눠 갖기로 했던 것이다. 이대로라면 브라질은 포르투갈이, 필리핀은 스페인이 차지할 수 없는데, 브라질과 필리핀에 대해서는 상대국의 진출을 서로 용인해 줬다. 산미겔은 1953년부터 스페인으로 역수출되며 스페인 맥주 시장 1위에 올랐다.

지난 2월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크래프트(수제) 맥주 전문점에서 손님들이 건배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 2월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크래프트(수제) 맥주 전문점에서 손님들이 건배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19세기 중반, 인도로 진출한 영국인들은 본국의 에일 맥주를 맛보고 싶었다. 그런데 맥주가 몸 성히 가기에는 너무 멀었다. 변질을 막으려 알코올 함량을 높이고, 방부제 역할을 하는 홉을 듬뿍 넣은 IPA(Indian Pale Ale)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임페리얼 스타우트(Imperial Stout)도 IPA와 비슷한 이유로 독해진 맥주다. 19세기 이전 영국에서 러시아로 보내진 스타우트는 변질되기 쉬웠다. 홉을 많이 넣어 변질을 막았고 맥아를 들이붓다 시피해서 결빙을 막았다. 맛은 썼고 알코올 도수는 10%에 이르게 됐다.

지난 6월 서울 을지로 노가리 골목에서 열린 맥주축제. [변선구 기자]

지난 6월 서울 을지로 노가리 골목에서 열린 맥주축제. [변선구 기자]

아돌프 히틀러가 1920년 2월 첫 나치 집회를 연 곳이 뮌헨의 ‘호프브로이하우스’였다. 호프브로이하우스는 바이에른 왕실이 운영한 맥줏집이었다. 맥줏집에서 힘을 키운 나치는  이후 맥줏집에서 벌어지는 담론들이 정권에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해 단속에 나서기도 했다.

체코의 벨벳혁명을 이끈 바츨라프 하벨 전 대통령은 맥주공장 노동자였다. 소련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던 정권에 반기를 든 혁명의 중심에 맥주공장 노동자들이 있었다.

종교개혁에 앞장선 마르틴 루터는 맥주 애호가였다. 그의 부인 카트리나 폰 보라는 수도원에서 맥주를 만들던 수녀였다. 담장을 넘어 도망친 뒤 루터와 연을 맺었다. 아내 덕에 맛있는 맥주를 마음껏 마실 수 있었던 루터는 집에 사람들을 모아 종교개혁 사상을 다듬었다. 이를 받아적은 책이 『탁상담화』다. 여기서 루터의 맥주 예찬이 나온다. “맛있는 맥주를 마시면 잠을 잘 자고, 잠자는 동안은 죄를 짓지 않으니 천국에 갈 수 있다.”
김창우·김홍준 기자 changwoo.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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