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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친과 싸웠다, 비행기 문 열라" 민폐 승객 34% 개인 사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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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장애 등으로 인해 비행기에 탑승한 뒤 "내려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중앙포토]

공황장애 등으로 인해 비행기에 탑승한 뒤 "내려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중앙포토]

강갑생의 바퀴와 날개 

지난 5월 제주공항에선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김포공항행 승객들이 모두 여객기에 탑승한 뒤 문이 닫혔고, 이어 여객기는 활주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한 여성 승객이 공황장애를 호소하며 "내려달라"고 요청한 겁니다. 승무원들이 공항 종합상황실에 이 사실을 알렸고, 비행기는 다시 출발 게이트로 돌아와 여성 승객을 내려줬습니다.

 그 뒤 기내 객실에 대한 보안점검 등 후속 절차가 진행됐고, 비행기는 예정보다 45분가량 늦게 다시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비행기에 탑승한 뒤 승객이 먼저 여러 이유로 "나 좀 내려달라"고 요청하는 걸 항공 용어로 '자발적 하기(下機)라고 부르는데요.

 국회와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최근 3년간(2016년~2018년) 승객 요청에 따라 이륙 전에 비행기에서 내려준 사례는 모두 1120건입니다. 이 수치도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인데요.

 "나 내려줘요"..최근 3년 간 1120건 

 2016년 313건에서 2017년에는 365건, 그리고 지난해에는 442건이나 됐습니다. 하루에 한 건 이상 자발적 하기가 발생하는 셈입니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가장 많은 이유는 앞서 본 사례처럼 공황장애나 심장이상 같은 건강상 사유로 절반이 넘는 614건(54.8%)을 차지합니다.

 올해 초에도 인천공항발 일본 도쿄행 항공기에 탑승했던 30대 남성 승객이 갑자기 심장이상을 호소해 비행기에서 내린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도 보안점검 등 후속 조치를 거치느라 1시간 가까이 출발이 지연됐습니다.

 현행 규정상 자발적 하기를 요청하는 승객이 있는 경우 해당 공항의 종합상황실에 즉시 보고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출발 게이트로 다시 돌아온 뒤 공항 보안 당국의 판단에 따라 승객을 모두 내리게 해 보안 재점검을 하기도 합니다.

자발적 하기 요청이 있는 경우 승객 전원이 비행기에서 내렸다가 다시 타야하기도 한다. [중앙포토]

자발적 하기 요청이 있는 경우 승객 전원이 비행기에서 내렸다가 다시 타야하기도 한다. [중앙포토]

 굳이 승객 전부가 내릴 필요는 없다는 판단이 나오면 하기를 요청한 승객이 앉았던 자리와 주변에 대한 점검을 하는 정도로 마무리되기도 하는데요. 물론 해당 승객이 맡겨 화물칸에 실린 수하물을 찾아서 꺼내는 작업도 필요합니다.

 하기 땐 출발 1~2시간 지연돼  

 아무튼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비행기 출발은 대부분 1시간, 길게는 2시간 넘게 지연되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항공사는 물론 다른 승객들의 불편과 시간 손실이 상당한데요.

 하지만 건강상 사유는 불가피하고,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경우이기 때문에 서로 조금씩 이해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최근 3년 간 건강상 사유로 하기를 요청한 경우는 614건으로 가장 많다. [중앙포토]

최근 3년 간 건강상 사유로 하기를 요청한 경우는 614건으로 가장 많다. [중앙포토]

 또 한가지 가족 사망 등의 사유가 있는데요. 51건(4.5%)이 있었습니다. 이 또한 양해가 가능한 상황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출장이 갑자기 취소됐다거나 어제 술을 많이 마셔서 비행이 어렵다거나, 문득 여행을 안 가고 싶어졌다는 등의 개인적 사유로 내려달라고 요청하는 경우입니다. 최근 3년간 385건(34.4%)이나 됐는데요.

이때도 기내 폭발물 검사와 보안점검 등 후속 조치는 필수이기 때문에 다른 승객과 항공사에 끼치는 손해가 상당합니다.

실제로 지난 2011년에는 포항발 김포행 항공기에 탑승했던 30대 여성이 "방금 남자 친구와 통화하다가 싸움이 났는데 지금 당장 내려서 만나러 가야겠다"며 하기를 요청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남자 친구 만나야 하니 내려달라"  

 당시 비행기는 이륙을 위해 활주로에 들어선 상태였습니다. 승무원들이 "지금 내리게 되면 다른 승객들에게 큰 불편을 주게 된다"며 만류했지만, 이 여성은 막무가내로 "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하는데요.

 결국 비행기는 게이트로 다시 돌아와 이 여성을 내려줘야 했습니다. 물론 다른 승객들 역시 비행기에서 내렸다가 다시 타는 불편을 겪었는데요. 이렇게 해서 출발이 1시간이나 늦어지고 말았습니다.

 2016년에는 김포발 제주행 여객기에 탔던 30대 여성 승객이 "제주도 날씨가 좋지 않다고 하니 내려달라"고 갑자기 요청하는 바람에 출발이 2시간 반가량 지연되기도 했습니다.

갑자기 "내려달라"는 승객이 있을 경우 비행기는 대부분 다시 출발 게이트로 돌아온다. [중앙포토]

갑자기 "내려달라"는 승객이 있을 경우 비행기는 대부분 다시 출발 게이트로 돌아온다. [중앙포토]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항공사에서는 "내려달라"는 승객에게 공항테러보안대책협의회 명의로 된 '항공기 탑승 후 하기 시 관련 절차 안내'라는 안내문을 제시하는데요.

 안내문에는 자발적 하기 시 관련 규정에 따라 보안관계기관이 실시하는 조사를 받아야 하며, 해당 승객의 하기로 인해 비행기 출발이 평균 1시간 이상 지연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하지만 별 효과는 없다고 하는데요. 현행 규정상 자발적 하기를 한 경우 특별히 불법적 요소만 없다면 별다른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유 증명 못하면 벌금 1000만원  

그러다 보니 심경변화 등 지극히 개인적인 사유로 비행기 출발을 지연시키는 경우가 줄지 않고 있는데요. 지난해 말에는 이런 사례를 줄이기 위한 '항공보안법' 개정안이 발의되기도 했습니다.

 현재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의 법안심사 소위에 계류 중인 이 개정안은 자발적 하기를 요청한 승객이 사유에 대한 증빙자료를 추후 제출하지 않거나, 거짓으로 제출한 경우 1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토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요.

 공황장애나 폐소공포증 등을 이유로 댄 승객 가운데 의외로 해외여행을 여러 차례 하는 등 다소 의심스러운 사례도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부득이한 사유 없이 항공기에서 내린 사람 역시 1000만원의 벌금을 물리도록 하고 있습니다.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까지 통과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이런 개정안까지 나오게 된 사연은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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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때문에 공황장애나 심장이상 등 건강상 어려움을 겪는 경우에는 비행 전에 병원에 들러 검진을 받고, 약을 준비하는 등 미리 대비하는 게 안전한 항공 여행을 위해 필요하다고 항공사 관계자들은 조언합니다.

 아울러 지극히 개인적 사유로 인한 하기 요청은 다른 승객들을 고려해서라도 자제해달라는 게 항공업계의 당부입니다, 항공기를 탈 때는 나 하나의 고집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적지 않은 불편을 겪을 수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강갑생 교통전문기자 kksk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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