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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정호 논설위원이 간다

252만자 보물창고를 캐다, 더 잘사는 나라를 그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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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조선판 브리태니커 ‘임원경제지’에 미친 사람들

조선시대 생활문화를 집대성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를 현대어로 옮기고 있는 연구진들. 앞줄 왼쪽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정정기·정명현·민철기·최시남·김광명·김현진·김용미·김수연씨. 일반 직장인처럼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6시까지 일하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조선시대 생활문화를 집대성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를 현대어로 옮기고 있는 연구진들. 앞줄 왼쪽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정정기·정명현·민철기·최시남·김광명·김현진·김용미·김수연씨. 일반 직장인처럼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6시까지 일하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시쳇말로 무식해서 용감했다. 내용을 잘 몰랐기에 달려들었다. 3년 정도 땀 흘리면 모든 일을 마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하지만 상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파면 팔수록 새로운 게 나타났다. 또 다른 시작이었다. 과연 끝낼 수 있을까. 의구심도 일었다. 그렇게 하기를 벌써 17년째. 크고 작은 고비를 숱하게 넘겼다. 이제 마무리가 보일 듯하다. 200여 년 전 시골로 들어간 그 선비는 어떻게 이 방대한 책을 낼 수 있었을까. 돌이킬수록 믿기지 않는 노고였다.

조선시대 최고의 생활백과사전 #70억원 들여 20년간 번역 작업 #만능 실학자 서유구의 애민정신 #이념보다 팩트의 중요성 깨달아

지난 15일 오후 경기도 파주시의 한 아파트를 찾아갔다. 출입문에 손바닥만한 안내판이 붙어 있다. 임원경제연구소. 안으로 들어가니 사방이 책이다. 176㎡(53평형) 아파트 방 네 개에 연구원 여덟이 두 세기 전 나온 옛 책과 씨름하고 있다. 바로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다. 우리가 국사 시간에 배우는 실학자 풍석(楓石) 서유구(1764~1845)의 대표작이다. 풍석이 40년에 걸쳐 조선 사대부들이 먹고 입고 사는 모습을 그러모은 생활백과사전이다. 총 113권 52책, 252만자 조선시대 최대 백과사전으로, 흔히 ‘조선판 브리태니커’로 불린다.

『임원경제지』는 우리 학계의 난공불락 같은 존재였다. ‘임원(林園)’은 숲과 정원, 즉 자연이 어우러진 시골을 말한다. ‘지’(志)는 기록을 뜻하는 ‘지’(誌)와 같은 말이다. 제목만 보면 음풍농월로 들리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농업·상업·의학부터 건축·요리·예술까지 옛사람들의 살림살이를 16가지 주제로 나눠 총 2만8000가지 문물을 조목조목 짚은 실용서에 가깝다. 공자 왈 맹자 왈 경학(經學)을 넘어 1년 365일 선인들의 일상을 켜켜이 체질한 데이터베이스(DB)라는 점에서 놀랍다. 그만큼 ‘지금 여기’에서 활용할 여지가 크나크다. 번역 작업을 지휘해온 정명현(50) 연구소장에게 물었다.

농부들이 씨를 뿌리는 모습. [임원경제연구소]

농부들이 씨를 뿌리는 모습. [임원경제연구소]

왜 지금껏 번역본이 나오지 않았나.
“내용의 폭과 깊이가 대단하기 때문이다. 한문 전공자는 개별 항목에 대한 지식이 짧고, 분야별 전공자는 한문 실력이 달린다. 여러 분야의 협업이 필수적이다.”
학부 때 유전공학을 전공했다.
“생명 문제에 관심이 컸는데 유전자공학의 그늘에 직면했다. 동양사상에 눈을 돌리게 됐다. 1993년 도올서원에서 한학과 인문학에 입문했다. 대학원에선 과학사를 공부했다. 물고기를 연구한 정약전의 『자산어보』로 석사 논문을 썼는데, 그때 『임원경제지』를 만났다. 그 체계와 규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유명한 책을 현대어로 옮기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2003년 주변 소장학자들과 뜻을 모았다. 나만의 짝사랑을 넓혀나갔다. 3년이면 완역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착각도 큰 착각이었다. 본문을 옮기고, 책이 인용된 원전을 찾고, 전문가 감수를 받고, 과정 하나하나가 도전이었다. 한문 해독은 기본이다. 철학·사학·유학·가정학·조경학 등 다양한 전공자가 뭉쳤다.”
문제는 돈이다. 경비는 어떻게 댔나.
“대학원생이 무슨 여력이 있겠나. 운명이랄까, 90년대 중반 학원 영어강사를 했는데 그때 연을 맺은 송오현 DYB 최선어학원장에게 SOS를 쳤다. 선뜻 3억원을 내놓았다. 3억원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역시 오산이었다. 송 원장은 여태껏 19억원 넘게 후원해왔다. 2013년부터 교육부(한국고전번역원)·문체부(풍석문화재단) 지원도 받고 있다. 작게나마 일반인 후원도 있다. 지금까지 총 45억원이 들어갔다.”
앞으로 할 일도 많지 않나.
“총 16개지 가운데 본리지(곡식·농사), 섬용지(건축·도구), 유예지(교양·기예), 상택지(주거·명당), 예규지(가정경제) 5개지가 현대판으로 출간됐다. 연내 이운지(예술·문화), 정조지(음식·술)가 선보인다. 2023년 용어사전까지 순차적으로 낼 계획이다. 전체 초역을 95% 정도 마쳤기에 무리는 없을 것 같다.”
20년이 넘는 장정(長征)이다.
“한마디로 『임원경제지』에 미친 이들이 벌인 일이다. 사명감 하나로 버텨왔다. 주변에선 ‘꼴통’들이 모였다고 한다. 그 말이 듣기 싫지 않다. 초창기에는 대학 빈 강의실·세미나실 등을 돌며 공부했다. 지금까지 참여한 번역자만 80여 명에 이른다. 교감(校勘)·감수자를 더하면 100명이 넘는다. 2023년 완간까지 70억원쯤 들 것 같다. 빈손에서 시작했으니 나름 기적이 아닐까 싶다.”
숫자로 보는 임원경제지

숫자로 보는 임원경제지

『임원경제지』에는 지금 당장에 써먹을 대목이 많다. 이념·관념이 아닌 정보·사실 덩어리다. 요즘 말로 ‘팩트풀니스(factfulness)’다. 실사구시를 추구한 서유구의 진면목이다. 동시대 학자 다산(茶山) 정약용이 법과 제도의 개혁을 통한 ‘나라다운 나라’를 그렸다면, 풍석은 백성들이 좀 더 잘사는 ‘풍요로운 나라’를 꿈꿨다. 풍석은 실제로 입만 살아 있는 관념적 선비들을 ‘흙으로 국을 끓이고 종이로 떡을 만드는’ 토갱지병(土羹紙餠)에 견주기도 했다.

가정경제를 다룬 근간 ‘예규지’에도 이런 풍석의 면모가 또렷하다. 중국 전국시대 재물 모으는 재주가 특출했던 계예와 백규를 줄임말인 이 책에서 그는 돈을 쓰고 불리는 법, 도둑을 막는 법, 논밭을 관리하는 법, 사람을 다루는 법 등을 꼬치꼬치 짚어본다. 경기·충청·전라 등 전국 8도의 특산품을 추려냈고, 전국 장터 1053곳의 장날·거래품목은 물론 전국 각 읍(邑) 사이의 거리도 한눈에 알 수 있게 정리했다. 올봄 나온 주거(住居)백과 ‘상택지’를 보면 집터 고르기, 집 짓기, 황무지 개간. 나무 심기, 우물 파는 법 등이 줄을 잇는다, 전국의 살기 좋은 명당 233곳도 소개했다.

21세기 서유구의 후예들도 한몫을 거들었다. 단순 번역을 넘어 원전에 없는 사진·지도 등 다양한 시각자료를 첨부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물론 오늘날 네이버·구글 지도 등을 찾아가며 과거와 현재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덕분에 요즘 독자들도 보다 쉽게 200년 전 세상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첨단 디지털 세상에서 퀴퀴 묵은 옛 책을 왜 읽어야 할까. 예스런 복고 취향은 아닐까. 자리를 함께한 연구원들이 손사래를 쳤다.

“풍석은 중국·조선 서적을 무수히 참고·인용·정리했다. 보물창고 같다. 문화콘텐트의 보고다. 요즘의 DB 구축을 닮았다.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애민정신에서다. 이념 과잉시대를 반성하게 한다.”(최시남) “인공지능(AI) 시대의 지식인 상이다. 아동학·식품영양학·의상학도 하나로 뀄다. 풍석이 지금 태어난다면 영화·스포츠·질병도 다루지 않았을까. ”(정정기) “풍석은 한 곳을 파는 벽(癖)이 있는 사람이다. 요즘의 덕후(마니아)를 닮았다. 개성·취향 존중의 시대와 맞아떨어진다. 전통생활문화 도감도 준비 중이다” (김수연) “21세기 화두는 삶의 질이다. 행복권에 대한 관심이 높고, 자기만의 사고방식이 중요해졌다. 그런 선구적 경험에 동참하게 된다.”(김광명)

서유구가 꼽은 ‘부자 되는 법’ 5가지

실학자 서유구

실학자 서유구

신조어 ‘탕진잼’이 유행이다. 불황·취업난의 시대, 많은 젊은이들이 딱히 필요하지 물건에 돈을 펑펑 쓰는 데 재미를 느낀다고 한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돈은 쓰는 것보다 모으는 게 어렵다. 서유구는 『예규지』 첫머리에 절약과 검소를 배치했다. 그가 꼽은 ‘부자 되는 법’ 다섯 가지 원칙이다.

① 수입의 10분의 7만 쓴다=국가든 가정이든 수입을 헤아린 뒤 지출하라. 10분의 5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인색하게 된다. 남은 예산이 있다면 곤궁한 이를 도와준다.

② 옹졸하게 굴지 마라=인심을 잃으면 다툼거리가 생긴다. 살림이 넉넉하지 않으면 10분의 2, 10분의 1만 남겨두어도 괜찮다.

③ 부귀는 지키기가 어렵다=지위가 높고 저명한 집안일수록 재산 보전이 어렵다. 가세가 기울어져도 옷과 음식 등 예전의 씀씀이를 버리지 못한다.

④ 1년, 1개월 계획을 짜라=잘살든 못살든 갑작스런 상황에 대처해야 한다. 매월 말 수지를 계산하라. 넘치고, 부족한 것을 늘 살펴야 한다.

⑤ 하루 쓸 돈부터 정하라=중국 소식(蘇軾)은 한 달에 쓸 돈을 30 뭉치로 나눠 집 들보에 걸어놓았다. 여윳돈이 생기면 따로 모아 손님을 대접했다.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