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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 알지?" 기습 뽀뽀한 병상의 남편이 원했던 한 가지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97)

남편이 지방으로 발령이 나서 주말부부로 지낼 예정이라고 했던 지인이 함께 내려가기로 했단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며 남편이 자기를 꼭 안으며 진하게 뽀뽀를 해줬는데 눈물이 나더라고. 뽀뽀가 사람 잡았다면서 웃어 보였다. [사진 pixabay]

남편이 지방으로 발령이 나서 주말부부로 지낼 예정이라고 했던 지인이 함께 내려가기로 했단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며 남편이 자기를 꼭 안으며 진하게 뽀뽀를 해줬는데 눈물이 나더라고. 뽀뽀가 사람 잡았다면서 웃어 보였다. [사진 pixabay]

지인의 남편이 지방으로 발령이 났단다. 전생에 억겁의 복을 짓고 덕을 쌓아야 받을 수 있다는 ‘주말부부’라는 티켓을 어떻게 아껴 쓸지 미리 너스레를 떨며 자랑한다. 모두 ‘좋겠다~’ ‘부럽다~’ 응수해준다. 아침에 출근해 저녁 즈음에야 함께 만나는 부부인데도 왜 이리 서로에게 짐이 되어 버린 걸까. 혼자 사는 내가 ‘그래도~’라고 이야기를 시작하려다가 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주말부부 되려던 아내 마음 돌린 진한 뽀뽀

그런데 며칠 전 모임에서 그가 잠시 주목하라며 발표하듯이 말했다. “내가 여기 남아 주말부부로 살려고 하다가 함께 내려가기로 했어요”라며 함께 하기로 마음먹은 이야기를 해준다. 떠나기 전날 짐을 싸며 각자 다른 설렘으로 나눈 많은 대화가 하나도 기억이 안 나고, 다음날 새벽 양손에 보따리를 들고 내려가는 남편을 혼자 보낼 수가 없어 주차장까지 따라 내려갔다.

그런데 앞서 걸어가던 남편이 잠시 돌아서더니 자기를 꼭 끌어안으며 귓속말을 하더란다. “날마다 새벽밥 하느라 고생 많았지. 혼자 있는 주중에 문화생활도 누리고 하고 싶은 일 많이 하고 자유롭게 지내. 밥 잘 챙겨 먹고….” 그러면서 뽀뽀를 진하게 해주더라는 것이다. 50대에 뭔 유치한 짓거리냐며 손사래를 치며 등 떠밀어 보내고는 아파트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데 눈물이 나더란다.

남편으로 산다는 건, 가장으로 산다는 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하는 일인지…. 내 생각은 조금도 안 해 준다며 투덜거려도 대꾸도 안 하던 사람의 깊은 마음속 아내 생각하는 마음이 뽀뽀 한 번에 다 들어있더라고. 그래서 같이 내려가 살면서 거기서 가끔 우렁각시가 되고, 하고 싶은 것도 틈틈이 하기로 했단다. 이 나이에 쓸모없을 것 같았던 그놈의 뽀뽀가 사람 잡았다고 웃으며 투덜거린다.

지나간 시간 속에 나 역시 생각나는 뽀뽀 사건이 있다. 간암을 선고받고 요양한다며 시골에 내려가서도 술을 못 끊는 아빠에게 아이들은 가끔 내려와 감리사처럼 조목조목 상태를 점검하며 잔소리를 했다.

“아빠, 우리를 생각해서라도 술만 끊어주세요. 하고 싶은 건 뭐든지 다 하세요. 저희가 다 하게 해 드릴게요. 술만 안 드시면 앞으로도 오래 살 수 있대요. 약속~” 다 큰 아이들이 손가락을 걸고 어리광까지 부렸다.

“오냐~ 이제부터 안 먹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올라가~” 아이들은 그렇게 빈말로라도 아비의 약속을 받아내면 불안한 마음을 내려놓고 또 돌아가곤 했다. 당신이 아직 아이들에게 필요한 존재란 것에 힘입어 얼마 동안 술을 안 먹을 때는 얼굴색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그러나 표정은 세상의 시름을 다 짊어진 듯 삶이 무의미하고 우울한 듯했다. 술은 차를 움직이게 하는 기름 격이었다.

남편이 기습뽀뽀를 하더니 "당신은 내편이지?"라면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날 남편이 좋아하는 술을 한 박스 사들고 갔더니 어린아이 같이 좋아했다. 세상에 영원히 존재할 것이 뭐가 있나. 그래, 하고 싶은거 하고 먹고 싶은 거 먹다가 그렇게 가자. [사진 pxhere]

남편이 기습뽀뽀를 하더니 "당신은 내편이지?"라면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날 남편이 좋아하는 술을 한 박스 사들고 갔더니 어린아이 같이 좋아했다. 세상에 영원히 존재할 것이 뭐가 있나. 그래, 하고 싶은거 하고 먹고 싶은 거 먹다가 그렇게 가자. [사진 pxhere]

어느 날 아침 출근하려고 시동을 거니 남편이 차를 세웠다. 내린 창문으로 큰 머리통이 사정없이 들어와 기습적인 뽀뽀를 했다. “흠마야~ 나이 들어서 유치하기는~ 영화 찍냐~” 민망해 투덜대며 머리를 밀어내려니 힘센 남편이 내 머리통을 부여잡고는 한참을 바라보며 조용하게 말했다. “당신은 내 편이지? 당신은 내 맘 알지? 끝까지 내 편이 되어 줄 거지?”

그날 퇴근길에 남편에겐 오매불망 기다린 연인 같은 술을 한 박스 사 들고 들어왔다. 어린아이같이 좋아하던 그 날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세상에 영원히 존재할 것이 뭐가 있나. 하고 싶은 거 하다가 먹고 싶은 거 먹다가…. 그래, 그렇게 가자…!

인생의 중재자 역할 한 술

사랑이란 것도, 사랑의 표현도 살아있는 동안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술은 우리에게 인생의 중재자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남편이 떠난 후 주위에서 원망 섞인 말도 들었다. 나는 오래 살 수 있는 지금 세상에서 술이 독약인 사람을 술로 떠밀어버린 나쁜 여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의 내 삶에 후회는 없다. 영혼으로 남은 그 사람이 그림자 같은 사랑으로 늘 지켜 준다는 걸 문득문득 느낀다. 사람과 사람끼리의 스킨십은 참 많은 언어를 대신해 준다. 가끔은 막혀버린 삶의 통로에서도 살아서만 할 수 있는 마음을 담은 유치한 뽀뽀가 해답을 줄 수도 있다.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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