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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 잘리면 靑 흔들렸다" 여당 '정경두 구하기' 올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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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두 국방부 장관이 15일 서울 국방부 청사로 들어서고 있다. 이날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은 북한 목선 입항 사건 등의 이유로 정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연합뉴스]

정경두 국방부 장관이 15일 서울 국방부 청사로 들어서고 있다. 이날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은 북한 목선 입항 사건 등의 이유로 정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은 왜 정경두 국방부 장관을 위해 본회의를 열지 않으려는 걸까. 애면글면했던 추가경정예산안 처리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이 15일 정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제출하자, 민주당은 당초 이틀로 예정됐던 본회의도 하루로 줄이자며 버티고 있다. 국회법상 국무위원에 대한 해임건의안은 본회의 보고 후 24시간 이후 72시간 이내 처리되지 않으면 자동폐기된다. 하루만 본회의를 열면 물리적으로 해임건의안 처리가 불가능하다. 민주당이 '하루 본회의' 주장에 담긴 의도다.

여권이 이처럼 해임건의안 표결을 막으려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번에도 2·3당인 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의 해임건의안에 공동보조를 맞추고 있는 데다 민주평화당 일각에서도 정 장관에 대해 부정적 기류가 강하다. 또한 여당 일각에서도 정 장관이 물러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기 때문에 표결까지 갈 경우 해임건의안이 통과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무기명 투표여서 여권 내 '반란표'가 나오기 쉬운 조건이다.

지금까지 국무총리나 장관 등 국무위원 해임건의안은 약 80차례가 제출됐고 6번 통과됐다. 국무위원에 대한 해임건의안은 국회가 행정부에 보내는 강력한 경고이자 불신임을 의미했기 때문에 청와대는 어떻게든 막고자 했다.

그런 만큼 통과됐을 때는 여권엔 막대한 후유증을 안겼다. 김대중 정부 때는 이로 인해 새천년민주당과 자유민주연합의 공동정권의 무너지기도 했다. 반대로 이를 통과시킨 야권은 국정 주도권을 잡거나 지도부의 리더십이 탄탄해졌다.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15일 국회에서 열린 국회의장-교섭단체 원내대표 회동에 참석, 인사를 나누고 있다. [뉴스1]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15일 국회에서 열린 국회의장-교섭단체 원내대표 회동에 참석, 인사를 나누고 있다. [뉴스1]

김재수 해임건의안 거부한 박근혜, 불통 이미지 강화
가장 최근에 통과된 건 2016년 9월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이다. 김 장관은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의혹이 제기되면서 부적격 의견으로 인사청문 경과보고서가 채택됐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임명을 강행했다. 또 김 장관이 모교 동문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시골 출신에 지방 학교를 나온 ‘흙수저’라고 나를 무시하는 것이 분명하다”는 글을 올려 논란이 커졌다. 그러자 더불어민주당은 임명된 지 한 달여 만에 해임건의안을 제출하며 청와대를 재차 압박했다.

김재수(왼쪽)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1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하여 업무현황보고를 하고 있다.

김재수(왼쪽)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1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하여 업무현황보고를 하고 있다.

같은 해 4월 20대 총선에서 여소야대가 구성된 덕을 톡톡히 봤다. 여당인 새누리당의 집단 퇴장 속에 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은 찬성 160표, 반대 7표, 무효 3표로 가결됐다.

하지만 국회의 가결 직후 청와대가 수용 거부 입장을 천명하면서 큰 파문이 일었다.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은 “임명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장관에게 직무능력과 무관하게 해임을 건의했다는 점과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제기된 의혹은 모두 해소됐다는 점 등을 참작해 박 대통령은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1987년 개헌 이후 대통령은 국회의 해임건의안을 반드시 받아들여야 한다는 조항은 없어졌지만, 지금까지 수용을 거부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청와대의 이런 입장은 ‘박근혜 대통령=불통’ 이미지를 고착화했고 여권 내부에서도 우려가 나왔다. 정국은 급냉각됐다. 얼마 후 최순실 국정농단 게이트가 터지면서 이로부터 석 달도 지나지 않아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정세균 국회의장이 2016년 12월 9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상정하고 있다. [중앙포토]

정세균 국회의장이 2016년 12월 9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상정하고 있다. [중앙포토]

임동원 해임건의안, 공동정부 붕괴로 이어져
2001년 임동원 통일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 가결은 ‘87년 체제’ 이후 처음이자 1971년 오치성 내무부장관 이후 30년 만이었다.

불씨는 다소 이례적인 데서 터졌다. 2001년 8월 평양에서 열린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한 강정구 동국대 교수가 만경대를 방문해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 위업 이룩하자”고 쓴 것이 알려지며 논란이 됐다. 만경대는 김일성 북한 주석의 생가로 알려진 장소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 접근법에 강한 불신을 가지고 있던 야당인 한나라당은 이 사건의 책임을 물어 방북 허가를 내준 임동원 통일부 장관의 교체를 요구했다. 여기에 공동 여당이긴 했으나 보수적 성향의 자민련도 가세했고 결국 국회 제출된 해임건의안이 가결됐다. 이 사건으로  새천년민주당-자민련의 공동정권이 3년 7개월 만에 붕괴했고, 여소야대 정국으로 바뀌게 됐다.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와 김종필 자민련총재가 1997년 국회 의원회관에서 대통령후보 단일화에 대한 합의문 서명식을 가졌다. [중앙포토]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와 김종필 자민련총재가 1997년 국회 의원회관에서 대통령후보 단일화에 대한 합의문 서명식을 가졌다. [중앙포토]

노무현 정부 때는 2003년 9월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이 통과됐다. 야당인 한나라당은 당시 한총련 소속 대학생들의 미군 사격훈련장 점거 및 한나라당 중앙당사 기습시위와 관련해 책임을 물어 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제출했다. 당시 한나라당은 국회 재적 과반(137석)보다 12석이 많은 149석을 갖고 있었으며, 표결 결과는  찬성 150표, 반대 7표, 기권 2표, 무효 1표였다.

앞서 임철호ㆍ권오병ㆍ오치성 장관은 국회 해임건의안 가결에 따른 강제 규정이 있어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반면 임동원ㆍ김두관 장관 때는 대통령이 반드시 따라야 하는지 아닌지를 놓고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두 장관 모두 해임건의안이 통과되자 스스로 사표를 제출해 대통령의 부담을 줄였다.

임동원 통일부 장관 [중앙포토]

임동원 통일부 장관 [중앙포토]

장관 해임안 통과에 격노한 박정희, 찬성한 여당 의원들 제명  

권위주의 시대였던 박정희 정부 때도 장관 해임안은 두 차례 통과됐다. 권오병 문교부 장관은 1969년 3월 7일 국회에서 국회의원에게 발언을 취소하라고 했다가 야당인 신민당의 반발을 샀다. 당시 신민당 원내총무였던 김영삼 의원이 나섰다. 김 원내총무는 “권 장관이 국회 본회의에서 폭언한 것은 국회를 모독하고 헌법에 보장된 국회의원의 발언권을 무시한 것”이라며 정부의 해임을 촉구하는 한편 국회에 해임안을 제출해 통과시켰다.

이 사건은 당대 정계에 큰 파장을 안겼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어떤 일이 있어도 부결시키라”고 했는데, 3선 개헌에 부정적이던 친김종필계 의원들이 이를 어기고 해임안에 동조해 가결했기 때문이다. 총투표수 152표 중 찬성이 89표였다.

당시 진해에서 휴가를 즐기던 박 대통령은 격노해 상경했고 ”항명 의원들을 색출해 일주일 이내 제명하라“고 지시했다. 이로 인해 양순직·예춘호·박종태·김달수·정태성 의원 등 김종필계 핵심 멤버가 의원총회에서 제명됐다. ‘4·8 항명 사건’이라고도 불린다.

1966년 6월 8일 대전 유성만년장호텔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 공화당의장이 청와대 출입기자단과 조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1966년 6월 8일 대전 유성만년장호텔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 공화당의장이 청와대 출입기자단과 조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1971년 오치성 내무부 장관 해임안도 여권 내 파워게임이 화근이 됐다.

당시 오치성 장관과 공화당 재정위원장이던 김성곤 의원은 알력 관계였는데 1971년 9월 30일 야당인 신민당이 오치성 내무부 장관  등 장관 세 명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오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만 가결됐다. (찬성 107표, 반대 90표, 무효 6표) 당시 공화당에선 ‘4·8 항명사건’으로 힘을 잃은 JP 대신 김성곤, 길재호 의원 등 소위 ‘4인방’이 신주류로 잘 나가던 때였다.

공화당 의원총회에 앞서 기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김성곤 전 의원 [중앙포토]

공화당 의원총회에 앞서 기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김성곤 전 의원 [중앙포토]

그런데 오 장관의 해임안 통과에 ‘4인방’ 세력인 공화당 의원 20여 명이 가담한 것이 알려지면서 이들 모두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 탈당계를 제출한 이들은 의원직을 박탈당했을 뿐 아니라 1973년 총선에서도 공천 탈락했다.

첫 장관 해임은 쌀값 안정 실패한 농림부 장관…YS, 정계 스타로 급부상
해임건의안이 처음 국회를 통과한 것은 3대 국회 때인 1955년 7월이다. 쌀값 폭등과 이에 대한 부실한 대책 등으로 지탄을 받던 임철호 농림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이 제출됐다. 당시 야당 측 설명에 따르면 임 장관이 취임한 1955년 2월 1석당 1만2600환이던 쌀값이 4개월 만에 2만환대를 훌쩍 뛰어넘었다. 여기에다가 임 장관이 적절한 수습책을 내놓지 못해 쌀값 안정에도 실패했다.

1948년 7월 17일 이승만 초대 국회의장의 제헌국회가 제정한 헌법에 서명하고 있다. [중앙포토]

1948년 7월 17일 이승만 초대 국회의장의 제헌국회가 제정한 헌법에 서명하고 있다. [중앙포토]

당시 임 장관의 해임을 거세게 요구한 정치인이 28세의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주목받던 김영삼 의원이다. 야당인 민주당 소속이던 그는 “전례를 보면 불신임안은 토론 없이 바로 표결로 넘어갔다”며 발언을 막는 이기붕 국회의장에게 “국무위원 불신임 결의라고 하는 것은 정치적 의의가 있다. 토론이 필요치 않다는 조문은 결코 없다”고 반박해 발언권을 얻어냈다.

김 의원은 “대한민국의 장관이 그동안 근 100명에 가까운 사람이 바뀌었지만, 현재의 임철호 농림장관처럼 정책이 없는 장관을 보지 못했고 그렇게 무능력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또한 그처럼 우리의 농민들을 울린 장관도 보지 못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청년시절 모습 [중앙포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청년시절 모습 [중앙포토]

그러면서 “우리 국회가 생긴 후에 개별적인 국무위원 불신임 결의를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옛말에 일벌백계란 말이 있다. 이번 기회에 책임 없는 행정을 하는 모든 국무위원에게 경종을 울려주고 우리 국민에게 안도감을 주고 정부의 잘못을 규탄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 주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해임건의안 투표는 총 184표 중 찬성 103표, 반대 77표, 무효 1표, 기권 3표로 통과됐다. 3대 총선에서 여당인 자유당이 114석으로 압승을 거뒀다는 점을 고려하면 야당 측의 완승이었다. 또, 김영삼이라는 정계 스타가 등장한 순간이기도 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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