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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급 연설···37세 게이 시장, 트럼프 저격수 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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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트 부티지지 미 대선 후보. [AP=연합뉴스]

피트 부티지지 미 대선 후보. [AP=연합뉴스]

[美 대선 트럼프 대항마 시리즈 ①]

37살 게이 변호사가 미국 대통령이 된다면? 펑크록 밴드 출신인 해커가 백악관에 입성한다면? 오프라 윈프리가 ‘영혼의 선생님’으로 삼은 베스트셀러 작가가 문재인 대통령과 한ㆍ미 정상회담을 하게 된다면?

말이 안 되는 얘기가 아닙니다. 미국 야당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 실제로 출마한 후보들 실제 면면이니까요.

유력 후보 아니면 어차피 들러리일 뿐이라고요? 글쎄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도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혜성처럼 등장했을 땐 ‘듣보잡’ 흑인 정치인이었습니다. 선거에선 모든 이변이 가능합니다. 그게 민주주의의 매력이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대항마로 돌풍을 일으킬 후보는 누구일까요. 주목해야 할 이변의 후보 5인을 골랐습니다. 이들 돌연변이 후보들의 스토리를 미국 언론 인터뷰부터 소셜미디어네트워크(SNS)까지 뒤져봤습니다.

① Pete Buttigieg  

이 이름을 어찌 읽어야 하오리까. 이름은 ‘피트’로 쉬운데 성(姓)이 문제다. 부티기그? 부러지그? 부터지그?

속터지기 전에 정답은 이거다. 부티지지.

헷갈리는 건 미국인들도 마찬가지. 유명 토크쇼 진행자인 엘렌 드제너러스가 지난 4월 그를 초대해 던진 첫 질문이 “내가 당신 이름 제대로 발음한 거 맞아요?”였다. 뉴욕매거진은 그와의 인터뷰 기사에서 발음기호를 병기했다. 트위터 본인 소개란에도 “그냥 ‘피트 시장’으로 불러주세요”라고 적었다.

부티지지 네 글자를 오늘부터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미국 정계에 혜성처럼 나타난 이 돌연변이 정치인이 미국 대통령 선거 판도에 작지만 강한 변수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숫자가 그의 저력을 대변한다. 올해 1/4분기 기준 그가 모금한 후원금은 700만달러(약 82억원)으로, 민주당 내 유력 후보인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을 제쳤다. 지난 4월 여론조사에선 민주당 경선 선두주자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과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부티지지를 모르면 미국 정치를 논할 수 없는 수준이 된 셈이다. 일약 스타덤에 오른 것을 두고 부티지지 자신도 뉴욕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일이 이렇게까지 잘 풀리는 이유를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고 털어놨을 정도다.

뉴욕매거진은 그를 이렇게 평했다. “‘정치인’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들을 가져다가 실험실에서 적절히 배합하면 부티지지가 나올 것.”

피트 부티지지가 지지자들과 악수하고 있다. 그는 밀레니얼 세대들에게 강력한 지지를 받는다. [EPA=연합뉴스]

피트 부티지지가 지지자들과 악수하고 있다. 그는 밀레니얼 세대들에게 강력한 지지를 받는다. [EPA=연합뉴스]

부티지지, 당신은 누구십니까  

출생: 1982년 1월19일생(만 37세).
현직: 인디애나주(州) 사우스벤드 시장
학력: 하버드대(역사ㆍ문학 전공)
남편: 채스턴 글래즈먼(직업: 교사)

잠깐. 부티지지는 남자인데 ‘남편’이 있다고? 오타가 아니다. 부티지지는 커밍아웃한 게이다. 부티지지보다 7살 어린 남편 채스턴은 본래 성 ‘글래즈먼’ 대신 ‘채스턴 부티지지’라는 이름을 쓴다.

부티지지가 백악관에 입성할 경우, 그는 미합중국 역사를 새로 쓰게된다. 최연소 대통령이자 최초의 동성애자 대통령으로. 그의 남편 채스턴은 생물학적 남성으론 최초로 백악관의 ‘안사람’이 된다.

게이라는 특징이 지배적이긴 하지만 부티지지는 여러 면에서 ‘엄친아’급이다. 미 해군에서 정보장교로 아프가니스탄전에 참전한 경력도 있다. 독실한 성공회교 신자이기도 하다. 뉴욕타임스 등 미 언론이 “게이는 게이인데 게이스럽진 않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다.

엄친아 스펙은 이제 시작이다. 부티지지가 구사하는 외국어는 노르웨이어ㆍ아랍어ㆍ스페인어ㆍ프랑스어ㆍ이탈리아어ㆍ다리어ㆍ몰타어 등 7개에 달한다. 피아노 연주 실력도 수준급. 마음씨까지 따뜻한지 유기견 두 마리도 키운다. 뉴욕매거진은 “너무 완벽해서 무서울 정도”라며 “도대체 어떤 엄마가 이런 아이를 좋아하지 않고 배기겠나”라고 적었다.

부티지지의 강점은 호소력 짙은 연설이다. [AP=연합뉴스]

부티지지의 강점은 호소력 짙은 연설이다. [AP=연합뉴스]

연설까지 잘한다. 부티지지를 유튜브에서 검색하면 ‘오바마와 부티지지 닮은 점’이 인기 영상으로 뜬다. 주로 연설 스타일을 비교해놓은 영상 편집이다. 연설의 달인인 오바마와 비견될 정도로 부티지지의 대중 연설 스킬이 뛰어나다는 얘기다. 오바마 전 대통령의 최측근 중 하나였던 데이비드 악셀로드는 한 인터뷰에서 부티지지 지지 의사를 밝히며 “종교적 신념이 투철하다는 점에서도 부티지지는 오바마와 닮았다”며 “(오바마 역시 최초 흑인 대선 후보였지만) 종교적 신념은 그를 일반적 유권자들의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오바마도 했는데, 부티지지라고 못할 게 없단 얘기다.

그의 가장 강력한 우군은 밀레니얼 세대다. 그 역시 1980년대~2000년대 초반에 출생한 밀레니얼의 일원이다. 77세인 샌더스 의원, 76세인 바이든 전 부통령과는 대척점에 서 있다. 2020년 대선이 아니더라도 그에겐 기회가 차고 넘친다. 로이터는 그를 두고 “밀레니얼 정치인의 대표주자”라고 묘사했다.

리틀 오바마, 현직 부통령과 맞짱 뜨다  

외국어 실력과 피아노 연주만으론 백악관에 입성할 수 없다. 정치인으로서의 한 방이 있어야 한다. 부티지지의 한 방은 그의 시정 성적표다. 미국 중서부 인디애나주의 작은 도시인 사우스벤드 토박이인 그는 만 서른이었던 2012년, 고향의 시장선거에 나가 당선됐고, 이후 재선에 성공했다.

사우스벤드는 인구 10만1000여명의 소도시로, 면적은 108.32㎢로 서울(605.2㎢)의 6분의1 정도다. 그가 부임하기 전 사우스벤드는 가톨릭 신앙이 강하지만 경제적으론 그다지 윤택하다고 할 수 없었다. 10명 중의 1명 이상이 실업자였다. 그러나 그가 시정을 맡은 뒤 실업률은 11.8%에서 4.4%로 떨어졌다. 투자 유치에 전력한 결과다. 그가 대선 출마를 선언한 장소도 1963년 문을 닫았다가 그가 시장이 된 뒤 재개발된 자동차 공장이었다.

그는 출정식에서 “작은 뉴스가 하나 있다”고 농담한 뒤 “이제는 과거의 구태 정치와 결별하고 완전히 다른 세상을 향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37살의 밀레니얼 시장이 (미국에서) 최고위 선출직에 도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담무쌍한지 잘 안다”면서도 “미국에 불고 있는 변화의 힘이 나의 대선 출마를 가능하게 했다”고 선언했다.

올해 초엔 마이크 펜스 현 부통령과 '맞짱'을 뜨기도 했다. 민주당 경선 토론회에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펜스 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신봉한 뒤부터 성경 말씀에 대한 신앙을 저버렸다"고 공격한 것. 펜스 부통령은 발끈해서 "부티지지에 대해 실망했다"라고 답했다.

부티지지 후보는 소탈한 모습으로 지지자들과 소통한다. [AP=연합뉴스]

부티지지 후보는 소탈한 모습으로 지지자들과 소통한다. [AP=연합뉴스]

완벽남 부티지지의 상처, 커밍아웃  

승승장구해온 그에게도 상처는 있다.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이다. 그가 커밍아웃을 한 건 33살 때로, 이미 사우스벤드 시장이었던 때다. 뉴욕타임스(NYT)는 14일(현지시간) 장문의 기획기사를 싣고 그가 커밍아웃을 하기까지의 고뇌를 소상히 소개했다. 요지는 일찌감치 정계 진출의 꿈을 꾸었던 부티지지가 ‘게이 정치인’이라는 라벨에 대해 고심이 깊었다는 것.

부티지지에 호의적인 NYT는 그의 고향 친구들을 인터뷰하며 “어릴 때부터 얘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거라고 느꼈었다”(랜달 윈스턴, 학창시절 친구)는 등의 말을 소개했다. 이 기사엔 15일 현재 75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는데, 이 중엔 자신을 부티지지의 동급생이라 소개하면서 “사우스벤드는 작은 동네이고 종교적 신념이 강한 곳이다. 그런 곳에서 자신의 성정체성을 인정하고 밝히기는 쉽지 않았을 게 당연하다”는 등의 옹호 댓글이 지배적이다.

피트 부트지지(왼쪽)와 그의 남편 채스틴. [AP=연합뉴스]

피트 부트지지(왼쪽)와 그의 남편 채스틴. [AP=연합뉴스]

그런 그가 커밍아웃을 결심한 건 2015년 여름이다. 지역 신문인 사우스벤드 트리뷴 기고문을 통해 자신이 게이임을 시민들에게 밝혔다. 그는 “십수년간 갈등의 시간을 거쳤고 이젠 (나의 성 정체성이) 내 갈색 머리처럼 나를 구성하는 일부임을 인정한다”고 적었다. 그해 그는 파트너인 채스틴과 결혼했다. 부티지지 부부는 유세장에 함께 나타나고 서로 키스를 나누며 SNS를 통해 서로를 강력 지지한다. 미국 잡지 마리클레르는 채스틴에 대해 “아이들에게 인기 만점인 학교 선생님”이라며 “둘을 엮어준 건 스카치 에그(삶은 달걀을 다진 고기로 감싼 뒤 튀겨 먹는 요리)에 대한 애정이었다”고 소개했다.

‘부티지지 대통령’이라는 가능성에 대해선 여전히 물음표가 많다. 김현욱 국립외교원 교수는 “미국이 여성 대통령뿐 아니라 게이 대통령을 맞이할 준비가 됐는지는 의문”이라며 “대선 승리는 아직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아직은 김 교수와 같은 이들이 대다수다. 그러나 부티지지에 대해 NYT 등 미국 진보성향 언론은 물론 밀레니얼이 보내는 절대 지지를 보면 그의 정치 여정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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