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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하다] 쌍둥이가 싸웠다고 학폭위 불려간 부모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길 잃은 학폭위 <상>

같은 학교에 다니는 쌍둥이 형제가 쉬는 시간에 함께 어울려 장난을 치다 싸움으로 번졌다. 교무실에 불려간 쌍둥이는 이내 화해를 했다. 하지만 학교가 알게 된 이상 이는 엄연히 교내에서 발생한 학교폭력(학폭) 행위였다. 학폭 담당 교사는 쌍둥이 형제의 부모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학폭위) 개최를 통보했다.

부모가 가해·피해 입장 모두 진술 #사소한 다툼도 ‘소집’ 면피성 행정 #징계 결과에 불만 소송도 잇따라 #중재 못하고 갈등 키우는 학폭위 #학부모 “사건 축소” 불만 제기 우려 #요즘 일선 학교 “기-승-전-학폭위” #교육적 해결 갈수록 설자리 잃어

졸지에 가해학생 보호자이자 피해학생 보호자가 돼버린 부모는 황당했다. 어릴 적부터 형제끼리 싸움을 벌인 건 가끔 있던 일인 데다, 학폭위가 열릴 경우 적어도 두 명 중 하나는 학폭 가해자로 징계를 받을 수 있다. 이는 쌍둥이 형제나 부모 누구도 원치 않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학교폭력예방법에 따르면 학폭이 인지되면 학교는 반드시 학폭위를 열 수밖에 없다. 결국 학폭위가 소집됐고 쌍둥이 형제와 부모는 각기 가해학생·피해학생으로 나뉘어 각자의 입장을 진술해야만 했다.

지난해 서울의 한 고교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현행 학폭 대응 체제의 문제점을 잘 보여준다. 학생들끼리 사소한 다툼이 발생하면 교사가 중재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모든 갈등 사안을 공식 창구인 학폭위를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사건을 축소하려 했다’는 불만이 제기될까 봐 일선 학교에선 일단 무조건 학폭위를 열고 보자는 식의 면피성 행정이 판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학폭 담당자들 사이에서는 ‘기-승-전-학폭위’라는 푸념이 나온다. 학폭 업무 처리에 밝은 한 관계자는 “학교 화장실에서 한 학생을 놀리는 내용의 낙서가 발견됐는데, 이 학생 부모가 ‘국과수에 의뢰해 필적 감정을 해서 낙서한 학생을 찾아내 가해자로 학폭위에 회부하라’고 요구했다. 학교 측에서 어떻게 해야겠냐고 상급 기관에 문의했는데 형식적이더라도 일단 경찰에 수사 의뢰를 하라고 답이 왔다”고 전했다.

다툼의 당사자인 학생들은 이미 화해했는데 학부모 간 감정싸움이 격해지면서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나빠지는 경우도 있다. 2017년 9월 한 초등학교에서 일어난 ‘골대 사건’이 그랬다.

판결문에 따르면 방과후 수업 시간에 체육관에서 놀던 김민중(가명·초5)군에게 친구들이 다가와 김군을 축구 골대에 가둔 뒤 벗어나 보라고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김군과 친구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져 김군이 울음을 터트리는 일이 생겼다.

“화장실 낙서 국과수서 가리자”…한 해 학폭 심의 3만 건

JTBC 드라마 ‘아름다운 세상’의 한 장면. 드라마는 학교폭력 가해 학생 부모가 학폭위 소집을 막으려 시도하고, 학교 측은 제대로 된 조사 없이 가벼운 징계를 내리는 장면을 통해 학폭위의 문제점을 조명했다. [사진 JTBC]

JTBC 드라마 ‘아름다운 세상’의 한 장면. 드라마는 학교폭력 가해 학생 부모가 학폭위 소집을 막으려 시도하고, 학교 측은 제대로 된 조사 없이 가벼운 징계를 내리는 장면을 통해 학폭위의 문제점을 조명했다. [사진 JTBC]

이 사건은 학폭위에 넘겨졌고, 김군을 골대에 가둔 친구 4명은 서면사과 처분을 받았다. 그러자 김군 부모는 징계가 너무 가볍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행정법원은 지난해 8월 이를 기각했는데, 재판부는 김군이 학교에 낸 진술서를 근거로 들었다. 이 진술서에는 “이미 친구들에겐 화가 풀려서 엄마한테 다 끝났다고 했더니 엄마는 ‘친구 엄마들이 사과를 안 해 화가 안 풀렸다’면서 일을 더 크게 만들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피해 학생 보호를 위해 학폭 피해 신고가 들어오면 무조건 학폭위를 열게 한 제도의 취지가 가해 학생의 ‘맞신고’로 왜곡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경기도의 한 중학교에 재학 중인 박미연(가명·당시 중3)양은 지난해 4월 학교 계단에서 자신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려 한 이가은(가명·당시 중3)양을 학폭위에 신고했다. 그런데 이양은 조사를 받다가 “미연이가 2017년 7월에 (비밀로 해 왔던) 내 남자친구 이름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 정신적 피해를 봤다”며 자신도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졸지에 ‘비밀 누설’ 가해자로 지목된 박양은 학폭위에서 서면사과 징계를 받았다.

하지만 법원은 “이양은 자신이 가해자로 신고되기 전에는 남자친구 얘기를 특별히 문제 삼은 적이 없다”며 박양에 대한 징계를 취소하라고 판결했다.

고광삼 서울 경신중 인권부장(학폭 담당 교사)은 “학생들이 같이 어울려 지내다 보면 서로 놀리거나 티격태격하기 때문에 모두가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학폭위에서 가해학생으로 지목되면 나만 당할 순 없다는 심리로 맞불 놓듯 학폭위 소집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러한 맞신고는 성인들이 벌이는 맞고소와 유사한 행태다. 이처럼 학폭 처리에서 ‘교육적 해결’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학폭위 운영을 개선하기 위해 국회엔 학교폭력예방법 개정안(이종배 자유한국당 의원 대표발의)이 제출돼 있다. ▶학교에서 열던 학폭위를 교육지원청으로 상향 이관하고 ▶경미한 학폭 사안은 학교장이 자체 종결할 수 있게 하는 게 골자다. 하지만 학폭 처리 업무에 피로감을 호소해 온 교사들은 반기는 반면 학부모들은 우려한다.

조성철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 대변인은 “학폭위가 교육지원청으로 이관되면 단위학교의 교육력이 회복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반면에 조정실 학교폭력피해가족협의회 회장은 “교육지원청 차원에서 많은 건수를 다루다 보면 결국 개별 학교에서 올린 서면 자료만 갖고 기계적으로 심의하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탐사보도팀=유지혜·정진우·하준호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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