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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배임 권하는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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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하현옥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하현옥 금융팀장

하현옥 금융팀장

일본 TBS의 인기 드라마 ‘한자와 나오키’에는 동명의 주인공인 은행원이 등장한다. 5억 엔을 대출해 준 회사가 도산해 대출금 회수가 요원해지자 지점장은 그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다. 하지만 ‘계획 도산’한 회사의 숨겨둔 돈을 찾아 대출금을 회수하고,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지점장의 배임 행위를 응징한다.

기업 오너 등의 단골 죄목인 배임(背任)은 임무를 저버리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그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로써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거나 제3자로 하여금 이를 취득하게 해 본인에게 손해를 가함으로써 성립하는 범죄를 일컫는다. 기업의 이사회가 회사나 주주의 이익에 반하는 결정을 해 손실을 끼친 경우가 대표적이다.

한국전력 소액주주들이 김종갑 한전 사장 등 이사진을 업무상 배임죄로 검찰에 고발했다.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6년 만에 적자로 돌아선 상황에서, 전기요금 인하 등 정부 정책에 따른 손실을 떠안은 책임을 물은 것이다. 배임 우려로 한 차례 반기를 들었던 한전 이사회는 정부에 손실보전 대책을 요구하고 있지만 확답은 얻지 못한 상태다.

금융감독원의 키코(KIKO) 재조사 결과를 기다리는 은행권도 배임 우려에 떨고 있다. 금감원이 세계금융위기 당시 환율이 급등하며 피해를 보았던 업체에 손해의 일부를 보상하라는 권고를 내놓을까 전전긍긍이다. 대법원 판결이 났고 손해배상 시효도 지났지만, 금감원의 서슬에 법률상 의무가 없는 보상에 나서면 주주에 대한 배임이 될 수 있다.

‘탈원전’ 공약 수호에 선거를 앞두고 전기요금 인하로 선심을 쓰려는 정부의 압박과 ‘금융 적폐 청산’이라는 명분을 앞세운 금감원장의 결기에 한전과 은행들이 자신의 임무를 저버릴 위기에 처했다. 정의와 선의로 포장한 정책이 배임을 권하는 사회가 됐다.

하현옥 금융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