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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가 시킨 ‘후래자 삼배’‘사적 심부름’도 대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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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내일 시행 

직장인 A씨는 얼마 전 출장을 다녀오느라 그날 잡힌 회식 자리에 1시간 정도 늦게 도착했다. A씨가 합류했을 무렵 이미 몇몇 동료들은 술에 취해 있었다. A씨의 상사는 “‘후래자 삼배’를 해야 한다”며 맥주잔을 건넸다. ‘후래자 삼배’는 회식 자리에 늦게 온 사람에게 세 잔 연속 술을 건네는 것을 뜻하는 직장인 은어다. 그러면서 이 상사는 잔에 맥주가 아닌 소주를 가득 채웠다. A씨는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 그 술을 마셔야 했다.

Q&A로 풀어본 ‘직장 내 괴롭힘’ #음주·흡연·회식 무조건 참여 압박 #남자만 힘든 일 맡는 경우도 해당 #녹취나 동료 증언 확보하면 유리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에 접수된 이 같은 유형의 회식을 주도하는 직장 상사는 16일부터 징계·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 직장 내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필요하지 않은 일을 시켜 후배 직원에게 정신적 고통을 줬다는 판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고용노동부는 최근 발행한 『직장 내 괴롭힘 판단 및 예방대응 매뉴얼』 책자에서 ‘의사와 상관없이 음주·흡연·회식 참여를 강요하는 것’을 직장 내 괴롭힘 행위라고 소개했다.

Yes/No로 풀어보는 ‘직장 내 괴롭힘’

Yes/No로 풀어보는 ‘직장 내 괴롭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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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시행되는 ‘직장 괴롭힘 금지법’(근로기준법 등 개정안)에 따르면 자신의 수행기사에게 수시로 사적인 심부름을 시킨 이도 징계 대상이 될 수 있다. B씨는 기사에게 세탁물을 맡기거나 골프장 예약, 본인 가족의 관광 안내까지 맡겼다. 이 역시 새 법에 규정된 ‘직장에서의 우위를 이용해 업무 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킨 행위’로 판단될 수 있어서다.

직장갑질 고발자들의 얼굴을 가리기 위해 ‘직장갑질 119’에서 사용한 용품들. [중앙포토]

직장갑질 고발자들의 얼굴을 가리기 위해 ‘직장갑질 119’에서 사용한 용품들. [중앙포토]

새 법 시행에 따라 괴롭힘 신고를 접수한 회사는 해당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가해자에 대한 징계나 근무장소 변경과 같은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피해 신고를 한 직원에게 불이익이 생기면 회사나 그 임원은 최대 징역 3년이나 벌금 3000만원의 처벌을 받을 수 있다. 대표이사가 가해자라면 회사 측은 이사회에 그 내용을 보고해야 한다.

하지만 법 시행을 앞두고 ‘이런 것도 괴롭힘에 해당하는지 모르겠다’는 직장인들의 문의는 그치지 않고 있다. 노동 전문 조상욱·김완수 변호사(법무법인 율촌)에게 헷갈리는 직장 내 괴롭힘 사례를 묻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들어봤다.

개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들어와서 지속적으로 댓글을 남기고 업무 외적으로 만나자는 상사가 있다. 성적 수치심이 드는 언행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속적인 이런 행동이 불편하긴 하다. 이것도 직장 내 괴롭힘일까.
“관계의 우위에서 발생한 일이라면 괴롭힘이라고 볼 수 있다. 얼마나 지속적으로 일어났는지, 본인이 거절 의사를 표한 적이 있었는지가 중요하다. 밖에서 만나자고 하거나 지속적으로 댓글을 다는 것은 업무상 필요성이 없는 부적절한 행위다. ‘싫다’는 표시를 간접적으로 했는데도 계속 한다면 상당성의 정도를 넘어서는 것이다. 계속 데이트를 요구한다면 성희롱으로 볼 수도 있다.”
후배한테 괴롭힘을 당하는 선배도 있나.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한다. 지위는 낮은 후배가 직장 내 관계에서 우위에 있을 수 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에서 규정하는 관계는 폭넓다. 출신 지역, 노동조합 가입, 정규직·비정규직 여부 등 관계에서의 우위를 판단하는 요소를 매우 다양하게 보고 있다.”
남자라는 이유로 정수기 물 교체 등 힘 쓰는 일은 다 도맡아 하는 경우도 있다.
“여성이 절대적으로 다수인 조직에서 여성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인데 집단적으로 남성 직원에게만 일을 몰리게 한다면 괴롭힘으로 볼 수도 있다. 집단 대 개인의 측면으로 봤을 때 이 같은 업무 지시가 반복적으로 정도가 넘어서 일어난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면 괴롭힘이라기보다는 직장 내 업무 배분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는 게 좋다.”
업무와 관련한 질책과 지시는 괴롭힘이 아니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다른 직원들 모두 앞에서 질책하는 것은 모욕감이 든다.
“업무 지시여도 사회 통념상 상당한 범위를 벗어났다면 괴롭힘에 해당할 수 있다. 물론 한두 번 지적한 것이라면 괴롭힘으로 보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모욕감을 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면 괴롭힘에 해당한다.”
직장 내 괴롭힘은 피해자 진술만 인정되는 건가.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억울한 경우도 있지 않겠나.
“피해자 진술을 100% 다 믿을 수는 없다. 하지만 현재의 원칙은 ‘피해자 진술을 쉽게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용자는 확실한 사실관계 조사를 통해 판단하는 게 중요하다. 물론 가해자에게도 충분한 진술 기회를 줘야 한다.”
증거는 피해자가 수집해야 하나.
“피해자가 괴롭힘 당했음을 입증해야 한다. 최근 많이 사용하는 증거는 녹취다. 괴롭힘을 당했을 때 그 순간에 대해 최대한 빨리 e메일로 누군가에게 알리는 것도 현장성 있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주변 동료들의 증언도 도움이 된다.”

지난 5월 한국심리학회지에 실린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팀 요인의 영향 및 팀 내 권력 불균형의 상호작용 효과’ 논문에 따르면 직장 내 평가제도와 경쟁적 풍토가 직장 내 괴롭힘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행복한일연구소 조은정 노무사는 “결국 직장 내 괴롭힘을 방지하는 것은 조직 문화 자체를 개선하는 것과 연결돼 있다”고 말했다. 김완수 변호사는 “지금은 직장 내 괴롭힘이 뭔지 정의하는 것도 혼선이 불가피한 상황”이라며 “직장 내 괴롭힘 사례가 축적되다 보면 더 나은 방향의 솔루션들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후연·최선욱 기자 lee.hoo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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