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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병기 曰] 다자주의의 종언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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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4호 30면

홍병기 경제전문기자

홍병기 경제전문기자

일선 기자 시절 모 경제부처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던 이야기가 있었다. ‘언론에 비판 기사가 나오면 일단 ‘사실무근’ ‘오보’라고 펄펄 뛰며 부인해라.’ ‘어느 정도 보도를 막고 나면 은근슬쩍 ‘검토 중’이란 말을 흘리며 사실 확인의 위기를 넘어가라.’ 고참 공무원들 사이에 회자되던 언론 대응 노하우였다. 이처럼 ‘검토 중’이란 단어는 공무원 세계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성난 여론을 달래고 시간을 벌기 위해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던 단골 무기였다.

한·일 분쟁, 국제 통상 질서 인식이 우선 #WTO 제소 과신 말고 양자협상 대비해야

반도체 소재를 놓고 일본과 통상 분쟁이 불거지자 한국 정부는 즉각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발표했다. 여당 일각에선 벌써부터 “승소까지 문제없다”며 으름장이 등장할 정도다. 일본의 정치적인 보복 조치를 WTO의 ‘정의로운 판결’로 심판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과연 그럴까. WTO는 일본과의 분쟁을 단박에 해결할 수 있는 만능 카드인가.

일본의 공세에는 최근 급변하는 세계 통상 질서 내의 벌어진 틈새를 노린 주도면밀한 전략이 담겨있다. 1995년 새로운 다자간 국제 통상체제로 출범한 WTO는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국익을 앞세워 탈퇴를 불사하겠다는 미국에 밀려 점점 퇴색하고 있다. 지난 G-20 정상회의에선 아예 WTO 개조론까지 나왔다. 공정성을 내세웠던 다자주의가 퇴조하고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양자 협상 위주로 판이 새로 짜이는 형국이다. 일본은 이런 보호무역주의의 흐름을 쭉 지켜보다 미국의 묵시적 방관을 믿고 한국을 양자 담판의 외통수로 몰아넣는 선제적 강수를 던진 것이다. 중국의 사드 보복 조치 때 WTO 제소를 포기했던 한국 정부의 어정쩡한 행보도 맞장에서 힘으로 밀어붙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더해준 셈이 됐다.

다자통상체제의 근간인 WTO 조직 자체도 흔들리고 있다. WTO 회원국 간의 제소 판정은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된 ‘패널 위원회’와 임기 4년의 위원 7인으로 구성된 ‘상소기구’로 이어지는 분쟁해결기구(DSB)에서 다뤄진다. 하지만 2심 격의 상소기구에 현재 3명의 위원밖에 없다는 게 문제다. WTO가 못마땅했던 미국이 임기가 만료된 유럽과 개발도상국 출신 위원들의 후임 선출에 계속 반대했기 때문이다. 오는 12월엔 남아있던 인도 등 2명의 위원 임기마저 끝난다. 중국 출신 위원 1명만 홀로 남게 되면 업무가 전면 중단될 수밖에 없다. 제소해봤자 판정해줄 사람이 없는 상황이다. 이번 사태의 대책을 주도하는 김현종 국가안보실 2차장이 이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그는 2016년 말 한국 최초의  WTO 상소 위원이었던 장승화 서울대 법대 교수의 후임으로 선출됐다. 그러다 2017년 7월 통상교섭본부장 자리가 나자 8개월 만에 위원직을 중도 사퇴해버려 후임 거부 도미노의 빌미가 됐다. 상소 위원 사임 후 90일간 공직을 맡지 못한다는 WTO 규정도 무시했다는 비판까지 겹치면서 WTO 내부에선 한국에 대한 분위기가 더욱 싸늘해졌다는 후문이다.

WTO에 제소해도 우선 60일간 당사국끼리 양자 협의를 거쳐야 한다. 일괄 타결을 중시하는 다자간 협상과 달리 양자 무대에선 ‘리퀘스트 앤 오퍼’ 방식의 섬세한 주고받기 기술이 요구된다. 일본을 ‘적폐’로 규정하는 식의 선악 논리를 넘어서 국익을 우선하는 현실적이고 냉정한 자세가 협상의 기본이다.

금수 규제가 아니라 우대 조치의 철회에 불과하다는 일본 측 주장을 무너뜨릴 정교한 논리도 필요하다. 자칫 ‘정가’를 받고 팔겠다는 가게 주인에게 "‘할인’을 왜 안 해 주냐”며 따지는 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본과 1대1로 맞서기 위해 청와대는 어떤 협상 카드를 갖고 있는가. ‘WTO 필승론’ ‘일본 응징론’ 대신 급변하는 국제 통상 환경에 대한 적확한 인식만이 바로 문제 해결의 시작이다.

홍병기 경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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